의학, 건강

프로이트, 여성분석가들, 그리고 페미니즘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심리적인 원리들 2022. 3. 31. 06:57

프로이트, 여성분석가들, 그리고 페미니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 단지 미국 정신분석학회 만이 아브라함 브릴(Abraham Brill)에 의해서 의사들에게만 정신분석 학교 입학을 허용했다. 이후에 법정 소송을 통해서 대학을 졸업한 전문가들에게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의 뉴욕대학원과 컬럼비아 대학원은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만이 정신분석학교에 입학하도록 규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입학의 문제가 국제 정신분석학 총회에서 제기되어졌을 때 프로이트는 각국의 규정들은 나라의 실정에 알맞도록 그 나라의 정신분석학회가 결정하도록 해서 프로이트는 간섭하지 않았다(Ernest Jones, 1953).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프로이트의 기대대로 모든 분야에서 차별이 없이 정신분석 학교 입학을 허용을 했다. 학력에 관계가 없이(고교 졸업으로 하버드 대학의 종신교수가 된 에릭 에릭슨(Eric Erikson), 비엔나 대학 인문학부 3학년 때 결혼으로 학업을 중퇴한 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어 대상관계 이론을 창조멜라니 크레인(Meline Klein)이 대표적), 직업에 관계없이(예술가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크리스티나 몰간(Christiana Morgan – TAT(주제 통각 심리검사지를 만든 장본인 - 아래의 글을 보라),

재 1 차 세계대전 후에 패배한 오스트리아의 고아, 길거리 청소년들을 모아서 교육교사로 정신분석가 오그스트 아치혼(August Aichhorn)(자아 심리학을 창설한 코호트가 아치혼으로부터 수련과 치료를 받았음), 종교에 관계가 없이(정신분석가의 대부분이 유태인들, 개신교의 목사롤로 메이(Rollo May)가 정신분석가로 그리고 실존주의와 인본주의 심리학자가 된 사람, 카톨릭 신부로써 정신분석가가 되어 청소년 심리치료 전문가가 된 오스카 피스트(Oska Pfister)가 대표적),

환자로써 정신분석을 받아서 회복된 이후에 세계적인 정신분석의 대가가 된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이 멜라니 크레인이다. 그녀는 부부문제로 샌도르 프랜치(Sandor Ferenczi) 한데서 우울증 치료를 받은 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영국인 조안 리비에(Joan Riviere)는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에게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존이 프로이트를 소개를 했고 그녀가 프로이트 만나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아래의 글을 보라). 마가레트 리틀(Margaret Little)은 정신분열증 환자로써 도날드 위니코트(Donald Winnicott)에게 10년 이상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회복된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 아래의 글을 보라).

이 블로그에서는 여성분석가들의 공헌들에 초점을 맞춰보자, 4 분류의 여성분석가들이 차례로 소개되어질 것이다. 첫 번째는 프로이트의 인격에 매료되어 평생을 프로이트에게 도움을 주고받은 6명의 여성분석가들, 두 번째로 신경증 치료의 정신분석을 성격장애, 정신증 쪽으로 길을 닦은 정신분석의 개혁가가 된 9명의 여성정신분석가들, 세 번째로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개인의 치료에서 끝나지 않고 환자들의 근친상간, 강간, 학대와 폭력에 직면해서 사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여성해방주의자가 된 5명의 여성분석가들,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 안에서 환자와 분석가의 평등한 관계 쪽으로 정신분석의 흐름 바꾼 4명의 여성분석가들의 공헌으로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프로이트는 남녀의 분석가들을 평등하게 똑 같이 인격적으로 대우를 했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맺은 분석가들 중에서 프로이트를 배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특별히 여성분석가들은 프로이트의 인격과 지식에 감동하고 그들의 맨토로써 평생을 함께 했다. 프로이트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프로이트를 지극정성으로 도와준 사람들이다.

첫 번째가 덴마크의 공주이자 그리스의 공주인 프랑스인 정신분석가 마리아 보나파르트이다(Marie Bonaparte)이다. 그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나폴레옹 1로써 나폴레옹의 본명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아닌가? 그녀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보나파르트가 되었다(2022, 3, 5: 위키피아). 그녀는 부모로부터 막대한 부(富)를 물러 받았다. 프로이트에게 불감증(오르가슴 장애)으로 치료를 받았고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독일의 나치정권이 유태인 출국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인 1930년데 유태인 대탈출이 시작되었을 때 제자들에 의해서 탈출을 권고 받았다. 특별히 남미의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학회(유럽의 정신분석가들이 미국과 캐나다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에 대거 이민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정신분석활동을 하고 있는 쪽이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학회이다)에서 프로이트를 초대를 하면서 그에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권고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3살 때 비엔나에서 살아왔고 고향이기 때문에 거부를 했었다(Ernest Jones, 1953: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보라). 이후에 나치의 유태인 출국 금지가 내려지면서 프로이트가 비엔나에서 갇히게 된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프로이트 구명 운동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간 사람이 마리아 보나파르트였다. 아래의 글은 필자의 프로이트와 5명의 여성의 블로그에서 인용한 것이다(2018, 6, 23일자 인용).

첫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2살 아래의 독일의 이비인후과 의사인 프레이스(Fliess)와 10년간의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면서 프로이트의 유아기 섹스 이론의 절대적 지지자로 격려와 칭찬을 했던 친구 프레이스에게 그 동안에 보냈던 284 통의 편지들이 1928년에 프레이스의 사망으로 그의 미망인 스타할(Reinhold Stahl)이 프로이트에게 이 편지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조건으로 한 서점 유태인 상인에게 그 편지들을 판매한 것을 보나파르트가 알고 그것을 100 파운드로 재 구입을 해서 비엔나의 로스차일트(Rothchild)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것을 다시 덴마크의 공사에게 맡겨 두었다.

마리아 보나파르트가 프로이트에게 이 편지들을 재 구입해서 가지고 있다고 말을 했을 때 프로이트가 분노해서 그것을 절반 값에 프로이트에게 다시 팔아라 라고 제의를 했지만 그녀는 이 편지가 파괴될 것을 예견하고 그리고 이 편지들이 정신분석의 연구에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거부를 했다. 이후에 제 2 차 세계 대전으로 혼란해지자 그 편지의 보관이 어렵게 된 것을 알고 이 편지를 영국으로 발송할 때 그 편지가 독일의 U-보트 공격(잠수함의 무차별 공격으로 4척의 영국 화물선의 침몰)으로 파손되어질 것을 우려해서 방수로서 포장을 해서 영국의 프로이트 가족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에 안나 프로이트와 정신분석가 크리스(Ernest Kris)에 의해서 그 편지들이 출판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벤트는 나치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1938, 3, 11일에 나치의 친위대원들이 프로이트 짐에 침입해서 가족들을 구금하고 집안을 수색하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서 마리아 보나파르트가 연락을 받고 3, 17일에 파리로부터 프로이트의 집에 도착을 했다. 그녀가 어네스트 존과 그리고 프랑스 미국 대사인 불릿(Bullitt)과 합동으로 프로이트 구출 작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비엔나로 가는 비행기가 단절되자 개인 비행기로 비엔나에 도착한 어네스트 존은 프로이트와 친밀관계를 가지고 정신분석에 흥미가 있었던 프랑스 미국 대사인 불릿(Bullitt)에게 부탁을 해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프로이트의 구출을 호소했고 그가 워싱턴의 미국 주제 독일 대사에게 부탁을 해서 마침내 프로이트가 나치로부터 프로이트의 직계 가족만 출국하도록 허용되었다. 동시에 어네스트 존이 영국으로 달려가서 영국의 내무장관에게 프로이트의 입국허가와 취업 이민 허가를 받아내서 프로이트 가족들을 무사히 출국시키게 되었다(상세한 구출 작전은 프로이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 17 편을 보라).

나치의 출국허가를 마침내 받아냈으나 나치는 프로이트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출판 인쇄 비용 명목으로 $4,824의 거액의 돈을 지불할 것을 요구를 했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리아 보나파르트가 이 돈을 지불하고 프로이트가 영국에 도착해서 이 돈을 환불을 했지만 그녀는 이 돈을 영국에서 논문집 출판사 설립에 기부를 했다.

세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평생동안 위험 부담으로 상당량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반출할 수가 없었다. 보나파르트가 그리스 대사를 찾아가서 그리스 왕의 특사로 급송하도록 도와주어서 프로이트가 상당한 량의 금액을 무사히 영국으로 반출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에서 추방으로 기차를 타고 파리를 지나갈 때 프랑스주제 미국 대사인 불릿과 마리아 보나파르트의 환영을 받았다. 프로이트 가족은 파리 근교의 보나파르트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12시간의 휴식을 가진 후에 도바 해협을 건너가는 기선을 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나파르트는 1939년에 프로이트의 구강암 수술이 재발해서 사망이 임박해지자 그녀는 거의 영국에서 살다시피 거주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병환을 지켜보았다. 9월 23일에 몰핀 3분의 1을 주사로 프로이트는 고통 없이 영면을 할 때 존과 함께 임종을 시켜본 장본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보나파르트가 프로이트에게 선물기원전 4세기 남부 이태리의 항아리는 지금도 프로이트와 그의 부인의 화장된 유골이 보관되어져 있다(Ernest Jones, 1953, 1955, 1958: 주㈜: 참고). 이후에 프로이트의 3명의 여동생은 탈출하지 못하고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실에서 사망을 하게 된다.

두 번째가 러시아의 여행작가, 비평가, 소설가, 정신분석가, 수필가, 종교학자, 심리학자인 루 살로메 이다(Lou Andreas-Salome). 그녀는 독일의 철학자 프레데릭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니체의 친구인 의사, 철학자인 파울 레(Paul Ree)가 결혼을 하자고 목을 메었지만 서로 오누이 사이의 글을 쓰는 동호회의 자격으로 지내자고 한 것을 받아들이고 친구사이가 된다.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으로 프랑스의 시인 마리아 릴게(Maria Rilke) 그리고 프로이트 등의 거물들과 친교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릴케는 그녀보다 16세의 연하로 그녀를 그의 뮤즈(사랑의 수호신)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릴게한데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도록 소개를 했다 릴게에게 어머니처럼 따뜻한 사랑을 제공했다. 그녀는 이후에 동양 고전어 언어학자인 프레르틱 칼 안드레아스(Friedrich Carl Andreas)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프로이트와 평생도록 서신의 교환하면서 친구 관계를 지속을 했다.

프로이트 사망 2년 전에 살로메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가 스스로 사망 부고를 썼다. 프로이트는 너무 엄격한 섹스 문제를 제외하면 완벽한 여성이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녀는 사망직전에 나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그녀의 집이 수색을 당했다(2022, 3, 5: 위키피아). 프로이트의 친구이고 정신분석학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프로이트가 유일하게 세명의 여성에게 반지를 선물을 했다. 마리아 보나파르트루 살로메 그리고 어네스트 존의 부인이었다(프로이트는 5명의 분석가들– 어네스트 존, 칼 아브라함, 샌도르 프렌치, 오토 랭크 그리고 막스 에팅곤에게 반지를 선물을 했다. 존은 이것을 프로이트를 엄호하기 위한 비밀 결사대라고 불렀다)(Ernest Jones, 1953)(주㈜: 우리나라의 번역본으로 루 살모메의 사랑과 생애: 부재로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1997. 2 5, 피터(H.F. 패터스 작, 김희정 옮김: 관음출판사)가 있다: 2022, 3, 5: 다음 백과 소개).

세 번째가 프로이트의 처제미나 베르나이(Minna Berneys)이다. 미나는 프로이트의 부인 먀사 베르나이(Martha Berneys)의 여동생이다. 마샤와 연인관계가 되면서 5년 동안 열애를 했다. 미나는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와 가깝게 되었고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그의 친한 친구인 스콘베르그(Ignaz Schonberg)를 소개시켜 주었고 두 사람은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콘베르그는 폐결핵으로 프로이트가 요양을 권유해지만 무리하게 영국에서 사업차 방문을 했다가 실패하면서 폐결핵으로 사망직전에 미나와 약혼을 취소시켜 주었다. 이후에 미나는 평생 동신으로 지냈다. 그녀는 약혼자의 사망 이후에 프로이트의 집에 머물면서 조카들을 돌보아주었다. 프로이트의 2명의 아들과 4명의 딸들을 두었다.

6명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먀사는 살림살이와 자녀 양육으로 정신분석에는 관심이 없었다. 프로이트의 대명사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방 문턱을 넘어서는 그 순간에 사라진다 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가족생활과 전문 분야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미나는 언니와 달리 총명했고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개인 비서 겸 그리고 언니의 조카들을 양육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프로이트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프로이트의 부인 먀사는 몸이 좋지 않았고 자주 빈혈에 시달렸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세계적인 명사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해외 여행을 좋아했다 특별히 그는 그리스시대(오디프스 이론의 근원지)와 로마시대의 고적과 문화에 대한 답사 때문에 이태리를 7번이나 여행한 것으로 노트 되어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골동품들을 수집(취미로써)를 해서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한 개씩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부인은 건강 때문에 여행을 싫어해서 프로이트는 혼자서 여행을 하거나 혹은 처제인 미나를 대동하고 여행을 했다.

프로이트는 여행 중에 쉬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의 많은 이론들이 여행 중에 구상한 것으로 그 스스로가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취미이고 여행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나 역시 여행을 좋아했고 건강 때문에 요양지를 자주 찾았다 그녀는 프로이트와 함께 여행을 하거나 혹은 따로 여행을 하다가 같은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서 프로이트의 글들과 논문들을 교정해주고 도와주었다.

여기에서 일부 독자들은 같이 여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섹스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 않겠는가? 라는 의구심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미나는 한 가족 구성원으로 평생을 같이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고 발기를 하면 그 아버지는 변태성욕자가 틀림없다.

치료자는 중학교 2학년인 A 양이 IMF 이후에 실직한 아버지를 위로 하면서 아버지의 어깨와 팔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아버지의 발기된 성기에 깜짝 놀래서 이후에 그것의 상처 때문에 치료자에게 1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사례가 있다. A양과 아버지가 근친상간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사춘기의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변태성욕이 틀림없다고 확신을 한다.

아들은 엄마와 누나를 보고 섹스 요구를 느끼고 개발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딸은 아버지를 통해서 섹스 욕구를 개발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거세 불안)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이성 쪽으로 딸은 엄마 때문에 아빠를 포기하고 사춘기에 이성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것이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가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거나 엄마가 사춘기 아들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후에 미나는 녹내장으로 수술을 받았고 노년에 요양소에 거주하다가 나치가 프로이트 가족을 추방하면서 같이 오스트리아에서 영국으로 함께 따라가게 된다. 미나와 프로이트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을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다 알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네 번째 여성이 바로 하버드 법과대학 이사회의 이사장으로 있었던 맥(Mack)판사의 딸인 루스 브룬스위크(Ruth Brunswick)였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 졸업 후에 오스트리아와 건너와서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브룬스위크의 첫 번째 이벤트는 특별히 프로이트가 구강암에 결려서 32회의 수술을 받으면서 입안에 철판을 깔고 식사를 해야 하는 고통을 평생동안 달고 살았다. 이 보철이 맞지 않아서 평생동안 고통에 시달리는 프로이트를 위해서 미국 하버드 치과 대학 교수였던 세계적인 보철 전문가인 카자니안(Kazanisan)이 베를린 세계 치과 학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맥 판사에게 애걸해서 카자니안이 비엔나로 와서 프로이트의 보철을 만들어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그가 20일 동안 비엔나에 거주하는 비용과 보철 이용으로 6,000 $의 비용을 그녀가 부담을 했다. 그러나 그 보철은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후에 프로이트가 6,000 달러를 보내주었지만 그녀는 그 돈을 그 당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프로이트의 개인 출판사(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정신분석 연구들을 위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기부를 했다.

두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러시아의 귀족의 아들로서 강박증으로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은 23세의 청년이 그의 주치의사를 대동하고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러 왔다. 그가 바로 프로이트가 강박증 치료 사례로써 유명한 연구인 늑대인간(Wolfman, 1918)의 장본인이다. 그는 4살 때 늑대 공포증으로 10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6살 때 신성 모독(입에서 신에 대한 욕설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17살 때 임질 증세들로 자아가 붕괴되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옷을 입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는 일상생활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첫번째 치료 회기에서 프로이트에게 항문 섹스를 요구하는가 하면 그의 머리에 똥을 싸 달라고 요구하는 이상한 돌아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프로이트에게 4년 동안 분석 치료를 받았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1914, 7월에 프로이트가 여름 휴가로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통고에서 깜짝 놀라서 회복이 되어 건강하게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이후에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으로 재산들을 몰수당하고 알몸으로 부인과 함께 비엔나로 도망을 온 것을 프로이트가 6개월 동안 생활 비용과 재발한 두 번째 치료를 무료로 해주어서 그의 정신 건강은 회복이 되었다.

이후에 잘 지내다가 프로이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재발해서 다시 분석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 이번에는 프로이트가 아닌 프로이트의 제자인 브룬스위크가 2번이나 약 3년 이상 그를 치료를 했다. 그 이후에 그는 회복을 했다. 브룬스위크가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 를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섯 번째 여성이 바로 영국의 첫 여성 정신분석가가 된 죠안 리비애(Joan Riviere)이다. 그녀는 어네스트 존의 소개로 1920년에 처음 프로이트를 만난 후에 프로이트에 매료되어서 1922년까지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대부분의 분석가들의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분석가가 된 몇몇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녀는 이후에 영국에서 어네스트 존과 함께 런던에 정신분석학교와 영국 정신분석학회의 창립에 공헌을 했고 이후에 메라니 크레인을 영국으로 초대를 해서 대상관계 정신분석을 창조하는데 공헌을 했다. 그녀는 이후에 명망 있는 분석가들을 수련으로 훈련시킨 장본인이다. 애착이론의 존 볼비(John Bowlby), 세계적인 대 분석가인 도날드 위니코트(Donald Winnicott), 정신분열증 치료의 대가인 허버트 로젠필드(Hebert Rosenfeld) 그리고 슈잔 이삭(Susan Isaacs), 한나 세갈(Hanna Segal)등을 수련과 훈련 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에 뛰어나서 프로이트의 독일어 정신분석을 영어로 번역을 하는데 참가했다.

프로이트의 죽음 이후에 어네스트 존이 리비에가 프로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 첫 인상을 적은 글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에 1920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 총회에서 프로이트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예외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써 인상을 주었다. 그의 모습은 한 의사의 전형적인 것은 아니었다. 혹은 그것은 특별히 유태인 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잿빛 수염과 그리고 꾸부정한 어깨를 가진 긴 창백한 얼굴이 한 지식인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학식 있는 교수의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필수적인 특징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꾸부정한 그리고 넓은 그리고 강한 인물로 오히려 완고한 인상 그리고 확정적인 턱이 존엄과 감추어진 힘의 한 개의 커다란 비축된 불굴의 끈질김 이었다. 그는 어떤 점에서 초연해 보였다. --------생략----- 그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앞쪽으로 내민 그의 머리였다. 그리고 그의 날카롭게 쳐다보는 눈들의 비판적인 탐색적인 응시적인 눈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히려 두렵게 고무되는 모습이 한 개의 매혹적인 유머의 번쩍임에 의해서 빛이 났다. 항상 잠재적이고 계속적으로 그의 전체 인격체가 그가 말을 할 때 반사되어 나왔다.

나는 이미 그의 깜짝 놀라는 문학적인 지식을 그의 글로부터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기억, 특별히 섹스피어, 그리고 그의 다른 입맛들, 그의 그리스, 로마의 골동품들의 그의 사랑, 그리고 초반기 문화들과 예술 등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내가 처음 그의 영어의 놀랄만한 구사력을 알게 되었다.

이들 인상들은 1922년에 내가 그와 함께 연구를 했을 때 확정이 되었다. 그의 심리학처럼, 그의 성격은 진실로 그 자체가 개인들과 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그 교정은 결코 차갑지도, 혹은 건방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표면상에 무관심은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깜짝 놀랄만한 흥미와 주의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소상하게 포착하는 한 사람의 생생한 열정적인 마음을 만났다. 그의 커다란 에너지의 그 흐름의 필수성이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머리말, 서두를 싫어했는가? 나의 첫 그와 분석적인 시간은 - 룰들과는 반대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마음을 열었다. “글쎄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이미 어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략---- “나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서 한 개의 요약을 주세요. ----생략--------------

그의 침투적인, 주의관심의 눈들은 한 어린이의 죄 없는 명료한 모습과 그 단순성 한 개는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 작은 것은 없다는 것---생략----거기에는 역시 그들 안에서 한 개의 성숙한 인내심과 조심이 ---생략 ----반쯤 응시적인 그리고 반쯤 꿰뚫는 응시는 무거운 눈썹 밑에서 그 표면의 밑을 보기 위한 한 개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평범한 지각의 영역을 넘어 갔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환자를 위한 한 개의 주의 깊은 주도 면밀함 -----생략-----다시 말해서 거의 차가운 회의주의는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로 잘못 읽어질 수 있다.

거기에는 그 안에서 한 개의 끝없는 흔적에 대한 사냥꾼의 체크하고 수정을 하는 지속적인 부동의 감시자와 같은 한 개의 연결이었다. ----생략 ----불굴의 용기와 끈질김은 흔들리지 않는 정직함과 합쳐져서 관찰의 그의 재능들을 지지해 주는 그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용맹한 상상과 깨달음은 그의 커다란 성취로 연결되었다. ----생략----우리가 그의 커다란 업적에 빚을 지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에게 그를 사랑받게 하는 그의 성격은 많은 인간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들의 모방할 수 없는 건조한 유머는 일반적인 교제 안에서 대부분의 상황들 안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한 능력과 한 개의 매력 있는 유쾌함이 되었다. 비록 그가 참을성이 있고 그리고 철학적이지만, 그는 인내심이 없음과 참을성이 없음의 양쪽 다가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유머는 종종 위트가 넘쳤다. 그리고 가시가 있는 신랄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성낼 수 있고 노여워할 수 있고 그리고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일 안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으로 강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사적인 생활을 한 평범한 사람으로써 그의 사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종류의 삶을 믿고 있었다. ----생략 ----종교는 삶을 흙 혹은 백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복잡성과 타협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주체는 과학적인 심리학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토픽들에 한 개의 열띤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흙이나 혹은 적이냐? 혹은 파시스트나 혹은 사회주의자이냐? 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즐거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닙니다. 사람은 신선한 색깔이어야 합니다 ---생략---

​그는 특별히 문학적인 세계 안에서 수많은 저명한 동시대의 헐뜯는 은둔자는 아니었다. 이들 사이에는 눈에 띄게 로만 롤랜드(Romain Rolland), 토마스 만(Thomas Mann), 아놀드(Arnold) 그리고 스테판 제위그(Stefan Zweig). 그러나 어떤 진실된 탐구적인 방문객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하고 그리고 친절한 수용으로 만났다. 그 인터뷰의 결과가 어떠했든지 간에 ---생략---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고립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엇 보다 프로이트는 완전히 괴롭힘이 없었다. 그는 실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본성 안에서 속임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의 이정표가 핵심적인 정직함 이었다. ----생략---두려움이 없음을 표현한다. 진실의 그 수용과 그것의 사랑은 그를 특징지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 안에서 영감으로 남아 있었다.

여섯 번째가 도로시 불링함(Dorothy Burlingham)이다. 그녀는 고급 보석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티파니 회사(Tiffany & Co.)의 창설자인 찰스 티파니(Charles Tiffany)의 손녀로 외과 의사와 결혼했으나 그가 조울증으로 결혼생활이 어렵다는 것으로 밝혀 짐으로써 이혼을 했다. 이후에 4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 그녀의 한 아들이 심인성 피부 질환(습진=아토피)으로 밝혀 짐으로써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기 위해서 1925년에 4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비엔나로 이사를 와서 안나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았다. 아들의 피부질환 뿐만 아니라 3명의 자녀들의 신경증들이 치료되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1938년에 나치로부터 프로이트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 구출 작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8년에 런던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안나 프로이트와 의형제를 맺고 이후 40년간 안나 프로이트와 함께 소아 정신분석을 개척을 했다. 프로이트 사후에 1940년에 프로이트 가족이 되어 함께 살면서 제 2 차 세계 대전 동안에 런던에 안나 프로이트와 공동으로 햄프스테드(Hampstead) 전쟁고아 보육원을 창설해서 이후에 햄프스테드 치료소(Hampstead Clinic)로 변경되었다.

이후에 이 치료소는 “안나 프로이트 치료 센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안나 프로이트 센터는 이후에 안나 국립 어린이와 가족 치료 센터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2009, 10월 현재 72명의 직원과 50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진 어린이 정신건강 연구센터가 되었다(2018, 6, 23: 위키피아).

불링함은 이후에 소아 정신분석가와 교육가로서 유아와 어린이 분석치료에 평생토록 헌신을 했다. 정신분석의 비판가들은 불링함과 독신으로 평생을 살아간 안나 프로이트가 혹시 동성애가 아닌가?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그러한 관계가 아니고 의형제로써 평생을 같이 보낸 친구이자 동업자로 밝혔다.

엘렌버그의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에서 어네스트 존과 안나 프로이트가 서로 좋아했던 연인 사이로써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그 당시에 안나가 16살의 소녀라는 이유로 프로이트가 존에게 여성으로 보지 말고 사춘기의 여동생으로 보라는 말에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안나 프로이트는 독신으로 살았고 소아 정신분석의 개척자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앞의 블로그에서 밝힌 바 있다.

불링함은 이후에 프로이트의 가족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가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 그녀의 유해는 프로이트 가족 묘지에 안장되어져 있다고 어네스트 존은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에서 노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본 것처럼 프로이트는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깨끗하고 정직하고 여성들을 존경하고 존중한 전형적인 남성다운 남성미가 넘치는 남자였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는 미래의 부인과 연애를 4 8개월 동안 했고 9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썼으니 사랑을 주고받는 욕구들이 충분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의 고착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에 목을 매지 않았다고 본다. 사랑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사랑에 한이 맺힌 사람들로써 치료자 역시 그러한 남녀들을 많이 치료를 해 보았다.

결혼 이후에 원만한 부부 생활로써 프로이트는 사랑과 섹스에 맺힌 한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에 만 매진할 수 있었고 심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다. 프로이트가 청년 시절에 신경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어떤 신경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고통을 받았던 그 신경증은 그의 자아분석 기간인 1890-1900년까지 그 자신의 꿈 분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프로이트 자신이 밝히고 있다. 고로 프로이트를 만났던 여성들은 한결같이 그가 섹스 이론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섹스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고 부인에게 평생동안 일부일처로 헌신한 대표적인 남자로써 기록되어져 있다.

두 번째 여성들로써 정신분석을 개혁한 일등 공신들이다. 남자 분석가들은 인원수로는 월등하게 많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기반으로 해서 신경증 치료에 기초를 둔 정신분석학을 성격장애와 정신분열증, 조울증, 그리고 편집증의 정신증 환자들의 치료 쪽으로 물꼬를 턴 사람들이 바로 여성 분석가들이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정신분석은 신경증 치료 이론으로 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여성분석가 바로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이다. 그녀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엔나 대학 인문학부 3학년 때 결혼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녀의 남편은 엔지니어로 해외로 많은 여행이 있었기 때문에 부부 문제가 많았다. 그녀는 장녀와 2명의 아들을 두었다. 한나 세갈(Hanna Segal)의 멜라니 크레인의 전기를 보라, 1989: 주㈜: 참고).

우울증으로 헝가리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샌드로 프렌치(Sandor Ferenczi)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프로이트의 꿈해석에 매혹되어 정신분석에 흥미와 공부를 시작했다. 프렌치 밑에서 10년 동안 치료와 수련을 받았다. 프렌치는 프로이트가 유혹이론(실제 상처이론)를 포기하고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상상 이론으로 옮아갔을 때 유혹이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라고 실제 상처와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을 함께 추진을 했다.

프렌치의 실제 상처 이론이 크레인에게 영향을 미쳐서 엄마와 아기의 유아기의 실제 상처이론(양육의 실패)과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상상 이론(부모와 자녀의 삼각관계) 즉 어린이의 마음 속에서 아빠와 엄마의 사랑에 대한 다양한 상상들의 접목으로 크레인 이론이 탄생하게 된다.

크레인은 1917년에 국제 정신분석 학회에서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1920년에 독일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칼 아브라함(Karl Abraham)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연구하고 있던 소아정신분석을 소개를 했을 때 아브라함이 극찬을 했다. 그녀는 1921년에 이혼으로 자녀들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가서 베를린 정신분석학회에 가입을 하고 그녀의 소아정신분석을 발표를 했다.

아브라함 밑에서 수련과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가 3년 동안 소아정신분석을 개발하면서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1925년에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어네스트 존과 조안 리비에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26년에 그녀는 영국에 영구 귀화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치료와 이론은 중상류의 성인들을 위한 치료로써 자유연상과 꿈 분석이었다. 이 기법이 어린이들에게 적용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꿈 대신에 놀이치료 기법으로 어린이들과 놀이를 하면서 주의깊은 관찰과 기록으로 어린이의 내면의 상상의 세계를 분석해 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성인 신경증 환자의 치료를 그 환자가 카우치에 누워서 자유연상으로 자신의 내면의 감각, 지각, 상상, 생각, 인지, 사고 등을 자유롭게 연결해서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져 있는 상처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크레인은 놀이치료를 통해서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의 상상적인 내용의 무의식적인 면들을 해석을 하는 방법을 사용을 했다. 다시 말해서 분석가와 어린이 환자 사이에 상호작용의 놀이를 통해서 두 사람사이에 상호작용이 주체가 된다.

이것은 바로 유아가 엄마의 젖꼭지에서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이 머리 속에 경험으로 입력이 되어서 너와나의 하나됨의 관계로써 바로 두 사람관계가 된다. 프로이트의 환자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자유연상으로 대회를 해서 그 대화와 꿈들을 분석하는 한 사람 심리학이 아기와 엄마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너와나의 하나됨의 두 사람 관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그 아기의 마음으로 진화하는가? 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상관계 이론과 치료이다. 이 새로운 발견은 그 당시 분석가에게 획기적인 변화로 수용되어지게 된다.

어린이의 삶은 엄마의 젖꼭지에서 시작된다. 아기의 최초의 직면은 엄마의 젖꼭지가 된다. 프로이트는 욕구만족의 흥망성쇠가 핵심이다. 본능적인 욕구의 만족이 아기의 긴장을 방출하고 욕구 만족이 즐거움을 제공해서 긴장이 방출되고 성장이 촉진된다 라고 노트를 했다. 크레인은 엄마와 상호작용의 좋음과 나쁜 즉 좋은 엄마로 인식되는가? 나쁜 엄마로 인식되는가? 의 차이가 그 아기의 ego 형성에 그리고 자아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고로 대상관계의 흥망성쇠가 핵심이다. 프로이트는 ego가 1세-3세에 등장하지만 크레인은 ego는 출생 직후에 엄마 쪽으로 향하는 잠재적인 기능을 타고 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엄마와 아기의 관계의 상호작용들이 경험으로 뇌에 입력이 되고 이런 생각들을 경험들의 진화의 과정 즉 ego의 진화의 과정의 유형인 편집성-자아분열 유형우울한 유형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다.

좀더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 어린이들은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서 너와나의 하나됨에서 엄마의 마음이 아기의 마음이 되고 아기의 마음이 엄마의 마음이 된다.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서 젖꼭지를 빨면서 손으로 엄마를 탐색을 한다. 손으로 엄마의 젖꼭지를 만지고 엄마의 얼굴을 만지고 엄마의 코를 만지고 엄마의 입을 만지면서 엄마의 모습이 부분 지각에서 전체 지각으로 통합되어진다. 3개월의 시점에서 인간의 얼굴과 무생물의 얼굴이 구분이 된다.

한편 영국의 에든버러의 외진 곳에서 정신과의사로서 정신분석가가 된 페비안(W.R.D. Fairbairn)이 고아원 출신들과 비행청소년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면서 그들의 자아가 심각하게 분열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욕구불만족의 고착에너지를 무제한으로 빨아들이면서 암덩어리처럼 사랑에 고착은 모든 것이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행동으로 집중이 된다 배움에 고착은 배움에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어 지기 때문에 다른 욕구들은 희생이 된다 이러한 불균형이 성격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프로이트의 욕구이론이다.

그러나 페비안은 어린시절에 ego는 부분지각에서 통합으로 연결되어지는데 어린시절의 엄마 품에서 사랑의 박탈이 부분적인 지각의 통합을 방해를 해서 자아가 분열되어 통합되어 지지 못한 것이 자아분열, 정신분열증의 원인으로 보았다. 즉 욕구의 흥망성쇠가 아니고 ego의 결함으로 자신감이 낮고 충동과 좌절에 참을성이 없고, 대화의 기능이 콘크리트해서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ego의 결함, 분열과 쪼갬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라고 주장을 하게 된다.

페비안의 이런 논문들이 바로 크레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고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이론을 통합해서 편집증(크레인이론)-자아분열(페비안 이론)으로 편집증-자아분열 유형(ego의 발달의 위치, 지점)이 탄생하게 된다.

아기가 뒤집고 기고 서고 걸음마를 하면서 주변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걸상에 걸려서 넘어지면 아기들을 울면서 엄마에게 일러바치면서 걸상이 자신을 해코지한다 라고 호소한다, 엄마가 그 걸상을 야단 치면서 아기를 달래 준다. 아기들은 외부의 존재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을 해서 울면서 엄마에게 호소를 하게 될 때 엄마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무생물들을 처벌하고 이기를 보호하게 된다. 아기들은 머리 속에서 경험의 기억들이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 아닌 너의 잘못으로 자아를 보호하게 되는 방어를 사용해서 이 단계를 편집성-자아분열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아기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삶의 초반기에 모든 것을 내 잘못이 아닌 너의 잘못으로 투사를 하게 된다. 이 단계를 잘 통합해서 통과하게 되면 그 다음 ego의 유형은 계속해서 발달을 감내하게 된다 여기에서 상처를 받게 되면 편집증으로 모든 것을 내 잘못이 아닌 너의 잘못이 되는 편집증이 되고 그리고 자아가 분열된 자아분열 성격 혹은 더욱 더 심한 경우에는 걸어 다니는 정신분열이 되는 것이다.

이후에 아기는 엄마의 얼굴의 이미지가 통합으로 7개월-9개월읫 시점에서 엄마와 낯선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점에서 엄마와 분리가 시작된다. 옆에서 엄마가 부재하거나 엄마의 주의관심의 결함과 과도한 밀착으로 분리가 브레이크가 걸리면 아기는 분리불안 즉 낯선 사람에 불안으로 분리의 두려움과 공포로 자아가 위축된다 이것을 우울한 유형이라고 불렀다.

엄마와 분리를 경험하면서 마음 속에 좋은 엄마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심어지게 되면 어린이는 엄마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 대신에 나쁜 이미지가 새겨지게 되면 아기는 엄마의 그림자가 되어 엄마에게 매달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자아 감각이 약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통합의 실패는 심각한 우울증, 불안증, 공포증, 공황장애 등의 신경증 환자가 된다.

크레인의 이론이 프로이트의 5 단계 이론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비엔나 학파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방어이론으로 어린이의 내면의 상상의 세계를 관찰과 놀이를 통해서 실제 유아들의 치료에서 얻는 관찰과 경험으로 정면 대응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비엔나 학파들크레인 학파가 충돌하게 되면서 영국의 정신분석학회는 프로이트와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의 프로이트의 딸 안나의 지지파와 멜라니 크레인을 지지하는 영국의 새로운 학파 사이 그리고 그들의 둘 중에 어느 쪽에도 혹하지 않는 독립학파로 3개로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크레인 학파는 독립된 연구 논문집과 독립된 학회로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을 신경증 이론과 치료에만 국환 시켰다. 그러나 크레인의 연구는 편집증과 그리고 자아분열 환자를 치료하고 연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크레인의 학파의 3명의 분석가들 즉 한나 세갈, 윌프레드 비용 그리고 허버트 로젠필드정신분열증 연구로 뛰어들게 된다. 그들에 의해서 정신증 환자와 심각 성격장애자들 즉 걸어다니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자아분열 환자들의 실제 치료에 뛰어들게 된다.

또 한 사람의 여성 분석가가 바로 독일의 제나 대학,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에서 소아학을 전공한 마가레트 몰러(Margaret Mahler)이다 그녀는 헬렌 도이치(Helen Deutsch) 밑에서 7년 동안 수련과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유태인 박해로 미국으로 망명해서 뉴욕 정신분석학교에서 교수로 유아정신증의 연구와 치료를 하다가 1950년에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MHI)의 지원을 받아서 어린이 마스트 센터를 세우고 4명의 신생아 어린이들을 3년 동안 실험실에서 엄마와 아기가 함께 생활하도록 만들어서 관찰함으로써 프로이트 이론을 실험을 했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을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5단계 이론 대신에 그녀의 이론을 분리-개인화 이론으로 탄생시켰다. 1976년에 몰러는 그녀의 연구 결과를 인간 유아의 심리적 탄생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출판하게 된다(Mahler, 1976: 주㈜: 참고).

크레인의 놀이치료에서 유아들의 실제 놀이의 관찰과 몰러(Mahler)는 실험실에서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의 관찰로써 아기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ego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기술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5단계의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ego의 분리-개인화 그리고 머리 속에서 엄마의 이미지의 영속성이 확고하게 형성(ego의 영속성)되는 3세 이후는 엄마가 옆에 없어도 머리 속에 확고하게 새겨진 엄마의 이미지로 ego가 힘을 얻게 되어 주변 세계를 탐색해 나갈 수 있다.

크레인과 몰러의 유사점은 두 사람이 ego가 어떻게 진화하는가? 라는 것은 결국은 엄마와 아기이 상호작용으로 양육환경이 결정적인 단초가 된다 고로 본능의 욕구보다 어린시절의 삶의 환경이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상관계 이론과 미국의 몰러의 실험실 연구인 분리-개인과 연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바탕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분야 즉 성격장애와 정신증 치료의 연구로 새로운 길을 열게 된다. 영국과 미국의 정신분석학은 크레인과 몰러의 이론으로 모든 환자들의 심리적인 장애들의 치료로 확대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크레인과 몰러의 공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비교해서 그 비중이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큰 공로로 인정받게 되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여성 분석가라는 점이다.

이 두사람의 여성분석가의 발자국에 많은 이 새로운 정시분석학적인 신조어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들 신조어들을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 바로 여성정신분석가라는 것을 계속해서 소개를 할 것이다.

첫 번째가 여성 분석가는 헬렌 도이치(Helen Deutsch)이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회에 가장 먼저 가입한 여성분석가이다. 그녀는 비엔나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로써 프로이트에게 우울증 치료를 받았고 그리고 칼 아브라함에게 치료를 받았던 제 1 세대 정신분석가이다. 그녀는 나치의 위협을 직감하고 미국 이민으로 보스턴 정신분석교에서 교수와 분석가로 치료를 하면서 유명한 신조어로 마치 성격(As if personality)라는 말을 남겼다.

정신과 환자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숨기고 마치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을 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녀의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5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죠크(2019, 10.2 개봉: 호아킨 피닉스 주연 - 2020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서 죠크가 심리상담사에게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비정상을 정상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명언이 바로 도이치의 “마치의 성격”을 환자의 입을 통해서 표현한 말이 되었다.

두 번째가 여성 분석가는 폴라 헤이먼(Paula Heimann)이다. 그녀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에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비엔나대학 심리학 박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데오도어 레익(Theodor Reik) 한데서 수련과 분석치료를 받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나치의 박해로 영국으로 망명해서 멜라니 크레인의 비서로 14년 동안 함께 연구와 치료를 하다가 그녀의 1949년에 이론화한 반전이(countertransference) 문제가 크레인과 갈등으로 그녀와 결별하고 1950년에 반전이의 중요성을 논문으로 처음으로 발표한 분석가가 되었다.

헤이먼은 크레인학파와 안나 프로이트 학파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독립학파 그룹으로 의리를 지켰다. 반전이 라는 용어는 프로이트가 신조어로 만든 정신분석학적인 전문 용어로써 프로이트는 반전이가 위험하니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헤이먼이 반전이가 치료에서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더 좋은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새로운 이론으로 등장시킨 장본인이다. 그녀의 반전이 이론은 이후에 많은 분석가들이 실험 치료에서 성격장애와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서 필수불가결한 치료 기법으로 등장하게 된다.

세 번째는 여성 분석가는 크리스티나 몰간(Christiana Morgan)이다. 그녀는 예술가, 작가로서 (Jung) 한데서 내향성/외향성 그리고 직관과 감정요소의 4개의 성격과 통합에 대한 연구를 후에 정시분석가가 되어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그녀가 1920년대에 뉴욕의 내향성/외향성 그룹의 멤버로 있을 때 1923년에 뉴욕의 록펠러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헨리 머리(Henry Murry)를 만나게 된다. 그는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포기하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생화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록펠러 대학에서 생화학 교수로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 곧 관계가 된다. 그러나 머리는 결혼 7년째로 부인과 이혼을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못했다. 몰간이 머리에게 융(Jung)을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스위스로 날아가서 융한데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무의식과 창의성의 개발을 연구하게 된다. 머리는 하버드 대학의 심리치료 센터 소장으로 심리학을 강의하면서 보스턴에 정신분석학교의 창립에 공헌한다. 이후에 16년 동안 두 사람이 협력해서 인간의 성격과 동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몰간이 어린시절에 우울증으로 그녀가 경험한 어린시절의 그림들을 스스로 제작한 과거의 경험을 담은 그림들을 모아서 그 그림을 환자에게 보여주고 내면의 느낌들과 상상들을 투사를 통해서 심리의 진단을 하는 검자시를 개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제 통각 검사지인 TAT 검사지 이다. 그들은 머리와 몰간 주제 통각검사지로 아름으로 출판되면서 하버드 대학의 출판물 사장 두 번째로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몰간은 학술적인 연구에 그녀의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해서 헨리 머리의 TAT 검자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2022, 3, 6: 위키피아).

TAT 검사지는 심리측정과 검사과목을 공부할 때 잉크방울 검사지로 유명한 료살 테스트와 함께 2대 검사지로 유명하다. 료살은 스위스의 쥬리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르고졸리(Burgholzli) 대학정신병원에서 유진 불루어(Eugen Bleuler) 밑에서 수련을 받은 후에 정신과의사가 된 바로 허만 로샤크(Hermann Rorschach)이다. 그는 정신분석가가 되어 스위스 정신분석학회 부회장으로 있었다. 그가 37세의 나이로 복막염으로 요절했을 때 프로이트가 천재의 안타까움을 표현을 한 인물이다. 그가 개발한 잉크방울을 모자이크 검사지TAT 검사지와 함께 환자들의 내면의 상상과 생각을 투사하는 심리측정 검가지이다(2022, 3, 6: 위키피아).

네 번째 여성 분석가는 엘리자베스 제트젤(Elizabeth Zetzel)이다. 그녀는 변호사의 딸로 태어나서 런던 의과대학에서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어네스트 존(Ernest Jones)한데서 수련과 분석 치료를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영국의 여성정신분석가인 조안 리비에, 수잔 이삭, 실비아 페인(Sylivia Payne), 폴라 헤이먼 등과 함께 영국정시분석학회 회원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1949년에 미국으로 귀환해서 보스턴 정신분석학교의 교수와 분석가로 환자들을 치료를 했다.

그녀는 치료 동맹(Therapeutic Alliance) 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과거의 최면학에서 메즈머(Mesmer)가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병든 사람에게 레포(rapport)라는 구리 막대기로 유체를 전달하는 이름에서 유래된 환자와 최면사 사이에 심리적인 유대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순수한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분석가와 환자 사이에 심리적 유대의 신뢰관계 라는 전문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녀가 만든 치료 동맹은 할리우드의 분석가인 그린슨(Greenson)이 신조어로 만든 작업 동맹(Working alliance)과 함께 정신분석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다.

다섯 번째 여성분석가는 메틸다 스펠링(Melitta Sperling)이다. 그녀는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뉴욕 의과대학정신과 교수로 그리고 뉴욕정신분석학교 교수로써 소아정신분석으로 어린이들을 치료를 하면서 엄마와 아기 관계에 바탕을 둔 어린 유아들의 치료를 엄마의 치료를 통해서 어린이의 치료를 하는 엄마와 아기의 치료기법을 고안심리신체의학(psychosomatic medicine) 즉 심인성질환 의학(medical psychology)을 창조한 장본인이다.

그녀가 개발한 심리신체의학은 뉴욕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들이 8명-9명의 구성원들이 그녀와 함께 연구그룹(group study)으로 만들어진 심리신체의학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제 30 분과로써 설립이 되었다. 심리신체의학 즉 심인성질환은 신경증과 다른 다르다. 신경증은 MRI, CAT 등의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심리적인 고통 때문에 병원을 찾게 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신경증 치료이다. 그러나 심인성 질환은 종합검사에서 신체적인 증세들이 나타난다. 본태성 고혈압은 혈압의 올라간다. 과민성 대장염은 설사로써 신체적인 증세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증세들의 특징은 신체적인 증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들 심인성질환들은 본태성 고혈압, 위와장의 궤양(십이지장 궤양, 궤양성 소장염, 궤양성 대장염), 기관지 천식, 아토피(습진), 긴장성 두통, 거식증, 루마치스 관절염, 비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질병들은 약물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약물을 사용할 때 그 순간에는 약간 효과가 있지만 약간의 스트레스에 재발하는 고질병으로 인식되어진 질병들이다 이들 질병들의 원인은 심리적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심리적인 원인을 제거하면 근본적으로 질병이 회복된다.

여섯 번째 여성분석가는 프란시스 투스틴 Frances Tustin) 이다. 런던 대학의 심리학 박사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폐증 어린이의 이론과 치료로써 세계적인 대가가 된 분석가이다. 그녀의 자폐증 이론은 그녀의 저서 어린시절에 자폐증. 신경증 환자 안에서 자폐증이 있다. 그녀는 영국의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유명한 대학인 타비스톡(Tavistock) 대학과 타비스독 치료병원의 교수로써 자폐증 어린이의 치료에 공헌한 여성 분석가이다.

투스틴은 자폐증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면서 심리적 자폐증 환자는 출생 전에 5감각의 통합 실패로써 5감각이 들죽날죽으로 분열된 사람이 자폐증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서 영화 레인맨(더스틴 호프만 주연)에서 주인공은 계산에 천재적이다. 영화 말아톤(조승우 주연)은 마라톤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자폐아들은 안아주기, 눈길주기, 쓰다듬어 주기를 가장 싫어해서 안아주면 뻣뻣하게 되고 거부한다. 자아가 없는 블랙홀(투스틴의 용어)이다.

자폐아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딱딱한 물건으로 자아를 대신하려고 한다 고로 그 물건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다.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루종일 끄떡거린다 그러한 행동의 유형들은 몸의 내용물들이 해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자아의 대용물로 보았다. 투스틴은 그러한 아동들에게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업어주는 감각적 통합을 제공해서 성공적으로 자폐증 치료를 한 사례들을 보고를 했다(Tustin, 1975, 자폐증 어린이와 정신증을 보라: 주㈜: 참고) 유사하게 미국 안에서 자폐증 치료의 대가인 조지 워싱턴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그린스펜(Greenspan, 1999: 주㈜: 참고)이 자폐증 어린이들의 안아주기 신체접촉 쓰다듬어 주기 눈길주기 등의 감각적 통합으로 70%의 자폐아 성공을 보고한 저서들이 있다.

일곱 번째가 에디스 제이곱슨(Edith Jacobson)이다. 그녀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소아정신의학을 전공하고 베를린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오토 페니첼(Otto Fenichel) 한데서 수련과 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유태인으로 나치의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서 3년 동안 구속 되어있을 동안에 감옥의 죄수들과 간수의 심리분석 논문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녀가 감옥을 탈출해서 미국으로 인민을 왔다 .

그녀는 뉴욕 정신분석학교 교수로써 분석치료를 하면서 영국의 크레인학파의 대상관계 이론과 프로이트의 욕구 이론을 접목시켜서 크레인의 대상관계 이론을 소상하게 치료의 실제에서 세부적인 이론으로 개발한 개척자가 되었다. 특별히 그녀는 우울증과 초자아의 세부적인 치료 연구와 사례를 통해서 대상관계욕구 이론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우울증을 내분비 우울증 혹은 의존적 우울증이 혹은 병원증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신생아들이 엄마에 절대적인 의존을 기술하고 있다.

신생아는 엄마의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출생 직후에 엄마를 상실한 유아들 특별히 감옥에서 출산한 유아들을 엄마의 품을 떠나서 따로 보모가 양육을 하는 시설로 옮겨졌다. 이들 유아들은 사망비율이 높았고 각종 질병에 감염비율이 높았다(Spitz, 1953).

그녀는 절대적 의존은 ego가 개발되어 지지 않는 상태에서 엄마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ego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을 해야 한다 고로 엄마는 전지전능하게 된다. 그런데 어린시절에 엄마의 박탈은 ego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지전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ego 방어들이 전지전능하고 마술적인 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된다.

제이곱슨은 초자아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3세-5세의 오디팔 기간에 ego는 선과 악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다. 고로 ego의 기능은 엄마의 사랑과 미움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엄마의 사랑이 박탈당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질투심과 분노와 보복의 감정들이 엄마에 대한 분노로 보복으로 가출, 비행행동, 난잡한 성행위 등으로 비행행동을 하는 것은 양육자인 엄마, 아빠에 대한 보복으로 충동적이 되거나 자혜적이 된다.

이러한 행동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고로 보복 행동에 대한 자아 처벌이 따라오게 된다. 초자아는 미래의 희망인 이상화와 처벌이 통합되어져서 유연해지게 되는데 미래의 절망과 무기력함은 초자아를 처벌적인 학대적인 초자아만 남게 되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 학대적이 된다. 고로 이러한 초자아가 형성된 청소년들은 부모에 대한 분노 공격으로 가출, 무단결석, 음주마약, 폭력과 충동 행동들, 난잡한 섹스 관계의 비행행동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더욱더 자아 처벌로, 담뱃불로 지지기, 면도날로 손목 긋기, 자혜와 자학으로 악순환이 계속된다.

여기에 수치심과 죄의식이 함께 하게 된다. 수치심은 주관적인 느낌이고 죄의식은 객관적인 느낌이다. 0세에서 1세는 수치심이 없다 벌거벗고 다니거나 오줌과 똥을 마음대로 싸도 부모는 즐겁게 받아준다. 2세-3세가 넘어가면서 부모님과 형제들이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것을 보면 얼굴을 찌푸린다 고로 어린이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고 부끄러워한다. 3세가 되면 벌거벗은 몸을 보면 부모가 야단을 친다 고로 아기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3세 이후에 되면 초자아의 발달로 선과 악의 구분이 명료해지면서 나쁜 행동의 부모이 처벌과 야단은 죄의식이 수반하고 여기에 수치심이 함께 첨가된다.

수치심은 자아의 존재의 상실로 느껴진다.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고로 항상 숨으려고 한다,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반면에 죄의식은 속죄를 할 수 있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은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자아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심각한 경우에는 자아가 없어지는 자아 소멸이 따라온다. 부모의 인격적인 처벌과 학대는 수치심을 자극해서 여기에다 잘못했다 라는 자아 처벌이 심각하게 첨가되어진다.

제이곱슨의 이러한 프로이트의 욕구 이론인 원초자아와 초자아 이론과 크레인의 엄마와 아기 관계의 상호작용의 관계 경험의 징검다리 역할의 제이곱슨의 통합적인 이론과 치료의 사례들은 미국의 정신분석가들에게 크레인의 이론과 욕구 이론의 통합으로 새로운 치료의 길을 열어준 공로로 제이곱슨은 제자들과 후배들의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의 제자들에 의해서 그녀의 80세 생일에 “대상과 자아”라는 저서가 출판되어졌다(Tuttiman et al., 1982: 주㈜: 참고).

일곱 번째 여성분석가는 프리다 프롬-레이크만(Fried Fromm-Reichmann)이다. 그녀는 독일 코닝겐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정신과의사로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인 에릭 프롬(Eric Fromm)이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그녀 한데서 수련 분석으로 치료를 받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된다. 에릭 프롬이 폐결핵으로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나치의 치하에 있는 프리다를 초청하게 된다. 두 사람은 결혼 16년 만에 이혼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두사람은 재혼을 하지 않았다. 프리다는 남편의 성을 따서 그녀의 성에 붙임으로써 프리다 프롬-레이크만의 이름을 평생동안 사용을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를 약물없이 치료한 미국의 제 1 세대 정신분석(그 시점에서는 약물이 등장하지 않았다)가 그룹(대인관계 정신분석학)의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생물학적인 욕구 이론의 정신분석에 사회 문화적인 요소를 첨가한 대인관계 정신분석학을 창조한 셀리번(Sullivan)과 포롬과 함께 신-프로이트 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들과 함께 프리다 역시 신-프로이트 학파의 한 사람으로써 1943년에 유욕에서 설립된 -프로이트학파들정신분석학교윌리엄 알슨 하이트 연구소(William Alanson White Institute)의 창설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120 그루의 밤나무로 둘러싸인 밤나무골 병원(Chestnuts Lodge)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를 성공적으로 발표를 했다. 정신분열증이 정신분석학으로 치료되어질 수 있다 라는 것을 증명을 했다. 정신분열증 환자로써 그녀에게 치료를 받아서 회복된 후에 콜로라도 대학에 인류학 교수가 되었던 조안 그린베르그(Joanne Greenberg)는 그녀이 자서전적인 소설 “나는 너에게 장미의 정원을 선물하지 않았다” 라는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그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가 바로 프리다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대학에 재직하지 않으면서도 포드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인류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과 가족 치료사인 제이 헬리(Jay Haley), 정신과 의사인(Don Jackson)과 정신분석가인 존 위클랜드(John Weakland)가 창설한 정신건강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커뮤니케이션의 결함인 이중 구속(double bind), 이중 속박 이론을 밝혀낸 연구소에서 유일하게 대학교수가 아닌 사람으로 초빙된 사람이 프리다였다. 그녀는 평생동안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 공헌을 했다. 그녀의 사망 후에 2021년에 로크빌 시()에서 그녀의 밤나무골 병원의 모델이 재설립되어 국립 역사기념 공원으로 보호되어지고 있다(2022, 3, 6: 위키피아).

여덟 번째의 여성 정신분석가는 마카레트 리틀(Margaret Little)이다. 그녀는 정신분열증으로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명의 명망있는 정신분석가의 치료를 받았으나 실패를 했다 세 번째 정신분석가가 바로 위니코트(Winnicott)였다. 그는 그녀의 집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방문을 해서 지극정성으로 10년 이상 방문을 해서 그녀가 회복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폴라 헤이먼이 1950년에 반전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녀가 위니코트와 치료의 과정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과 느낌들을 바탕으로 1951년에 반전이 논문을 제출해서 반전이가 치료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를 그녀의 경험으로 발표를 했다. 그녀는 멜라니 크레인의 대상관계를 지지하고 대상관계 분석가기 되었다. 그녀는 위니코트가 안나 프로이트 학파도 아니고 크레인 학파도 아닌 독립학파가 된 스승을 따라서 영국의 독립학파에 소속되어 대상관계 이론을 확대시켰다.

아홉 번째 여성 분석가가 카렌 호르니(Karl Horney)이다. 상선의 선장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전처의 4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녀의 엄마와 아버지는 늘 불화가 잦았다. 4명의 이복 형제들은 접촉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오빠를 편애했고 아버지 역시 오빠를 편애를 했다 그녀는 여기에서 권위적인 아버지와 전통적인 어머니를 싫어했다고 스스로 노트를 했다. 그녀는 9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을 했다. 그녀는 머리가 명석했다 고로 공부를 해서 지식적으로 오빠를 능가하기로 결심을 했다.

어머니는 이혼을 한 것이 아니고 딸들을 데리고 독립을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1900년부터 여성들의 의대입학을 허용해준 덕분에 1909년에 고팅겐 의대에서 그리고 베를린 의대로 전학을 가서 졸업을 했다. 그녀는 졸업 직전에 같은 학교의 동료였던 경영학과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친구의 소개로 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녀가 칼 아브라함과 한스 샤크에게 수련과 치료를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들은 3명의 딸을 두었다. 남편은 사업 실패로 부부 갈등으로 그리고 남편이 수막염에 걸려서 가정이 파괴되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는 베를린 정신분석학교를 세우는데 동참을 하고 정신분석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남편의 점점 최악으로 진행되는 것에 이혼으로 그리고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뉴욕 정신분석학교에서 교수로 그리고 분석가로 활동하다가 셀리번과 에릭 프롬을 만나서 신-프로이트 학파의 한 사람으로 대인관계 정신분석에 일원이 되었다.

프로이트의 거세불안남근 질투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권위주의에 비판으로 페미니스트 심리학을 개발하게 된다. 그녀는 이후에 뉴욕정신분석학교를 떠나서 뉴욕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써 페미니즘 정신분석의 개척자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정신분석 심리치료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2022, 3, 6: 위키피아). 호르니는 새로운 정신분석 학교를 그녀의 페미니즘의 이론과 독립적인 치료 이론을 세우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 것은 남자 분석가들이 감히 도전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개발하게 된다. 그녀의 발자국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다음에 소개되어질 페미니스트 여성정신분석가들 이다.

여기에서 잠간 방향을 돌려서 프로이트의 섹스심리학으로 방향을 돌려보자. 프로이트는 심리학섹스학을 통합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생리학과 해부학의 용어들을 심리학적인 용어로써 설명한 것이 정신분석이다 라는 것은 이미 여러 번 밝혔다. 그러나 왜 하필 섹스학을 접목시켰는가? 하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섹스학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가 1884년에 레지던트 4학년 때 3명의 우수한 레지던트에게 6개월 해외 유학의 특전을 받게 되었고 프로이트는 프랑스의 히스테리아(모든 정신병의 총체적 이름)를 최면학으로 치료를 하는 가르코트(Charcot)의 살페트리아 학교를 방문하면서 가르코트가 매주 화요일에 세계의 명사들 앞에서 그 병원에 입원한 여성 히스트리아 환자를 최면을 걸어서 치료를 하는 시범을 보게 되었다.

최면을 걸어서 어린시절의 기억을 회상할 때 히스테리아 환자는 어린시절에 근친상간, 강간 그리고 신체적 학대와 감정적 학대의 피해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르코트는 프로이트에게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근친상간, 강간 그리고 신체적 감정적 학대가 원인으로 밝혀졌으니 그것을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라고 암시를 주었다 라는 것이 어네스트 존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프로이트의 전기) 속에 등장을 한다.

프로이트는 1884년부터 10년동안 이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1895년에 히스테리아 연구라는 제목으로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되었다 라는 것은 수없이 노트를 했다. 여기에서 왜 프로이트가 섹스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는가? 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섹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를 꿰뚫고 있었다. 이제 섹스의 역사의 흐름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자.

그리스 시대에는 섹스가 자유로웠다. 동성애는 합법적이었다. 중년의 남자들과 소년들의 동성애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대신에 소돔이(항문성교)는 금지되었다. 청소년들은 학업이 끝나면 교사의 보호아래 집으로 안전하게 이동을 했다. 로마시대에 섹스는 음란, 퇴패로 과도하게 섹스 문란으로 흘러간다.

그 증거로써 A.D. 79년에 나폴리 근처의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써 폼페이라는 작은 도시가 생매장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화산재가 4m-6m로 뒤덮여서 도시 전체가 매몰된 것이었다. 1592년에 한 건축가(Domenico Fontana)에 의해서 수로를 파든 중에 발견된 것이었다. 이후에 계속해서 발굴이 진행되어지면서 계속해서 폼페이의 도시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의 일상의 음식과 실내 장식 그리고 일상의 생활이 2000년 동인에 사장되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에로틱한 부분만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 로마의 섹스 문화와 관습은 섹스의 신들과 다산의 신으로 거대한 페니스들이 등장을 한 것이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많은 유물들이 보관되어져 있었다. 프랑스의 왕이 그의 부인과 딸을 데리고 이곳을 방문해서 그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서 너무나 활당하고 겸연쩍어 해서 박물관의 부장품들을 비밀 캐비닛에 보관하게 되었다. 성숙한 어른, 도덕관이 존경할 만한 사람들에게만 골라서 거의 100년동안 밀봉과 개봉을 반복하다가 1950년에 마지막 발굴로 그리고 1980년에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미성년자는 개봉불가이다(2022, 3, 13: 위키피아).

로마의 섹스 문란과 음락과 타락은 반대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중세의 1000년의 기독교 시대의 엄격한 섹스의 규정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에서 시작되었다(Money, 1993), 그는 삼위일체설로써 기독교의 교리를 만든 신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섹스에 대한 규정을 만들게 된다.

섹스는 출산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부부 사이라고 해도 섹스의 짧게 그리고 빈도수가 적을수록 좋다 그리고 부활절 40일 동안은 섹스 금지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는 섹스 금지 그리고 일요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금지 그리고 금요일 철야는 금지 그리고 수요일금지로 규정이 만들어졌다. 카톨릭의 이런 규정은 엄격했다. 1000년 동안 이러한 본능의 억제는 다양한 변태성욕을 생산하게 된다(Money의 사랑의 지도를 보라,1993: 주㈜: 참고).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으로 삶의 본능은 리비도(에로스) 그리고 죽음의 본능은 공격, 파괴본능으로 구분을 했다. 존 홉킨스 의과대학 소아과교수인 만이(Money, 1993)는 그의 저서 사랑의 지도에서 태어날 때 인간은 사랑의 지도가 없다. 언어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처럼 영장류들은 섹스행동을 주변상황 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그는 정신분석으로 연구를 하지 않고 진화론으로 연구를 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치료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에 존 홉킨스 대학 소아정신과의 교수로써 섹스생리학 그리고 심리치료와 호르몬 치료 센터를 개설한 섹스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UCLA위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혹은 섹스실험학자인 마스트와 존슨(Master and Johnson)의 연구 논문 참고로 하지 안고 독자적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섹스의 변태성욕과 그들이 호르몬 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한 학자였다. 그는 40여개의 변태성욕의 원인들을 기술하고 있다.

중세의 신부와 수녀들은 섹스가 금지되었다. 사람은 죽어서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을 천국으로 간다, 영혼이 고상해야 하고 순수해야 한다 고로 성자의 사랑과 그리고 욕망, 음욕의 더러운 사랑으로 이분법이, 흑과백 되었다. 변태성욕이 발견되면 영혼이 악마의 침법으로 귀신에 씌웠기 때문에 화형식에 처했다.

고해성사로 자위행위를 한 사람은 밤에 음란 귀신이 들었기 때문에 음탕한 귀신과 섹스를 한 죄로 불태워 죽였다. 중세의 1000년 동안 정신병을 귀신, 악마, 악령으로 불태워 죽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변태성욕자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것은 만(Money)의 저서 사랑의 지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다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평가한다(dark age). 필자는 미국에서 교양과목으로 고대와 중세 역사 그리고 중세 문학의 과목을 이수를 했기 때문에 기초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섹스 혁명의 불꽃이 당겨지게 된다. 그 단초가 바로 르네상스인 문예부흥이다.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양분된다. 서로마는 외부의 침범. 흉노족과 바이킹 족. 몽골 등의 침범으로 멸망(A.D.286-476)하고 동로마 제국은 1000년 동안 이름을 비잔틴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존속(1453년)하게 된다. 서로마는 줄리우스 시저(Julius Caesar)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 황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 이후에 64회의 장군들의 쿠데타가 있었다(대학에서 중세사 과목에서 공부한 기억의 회상) 그래서 유형어로 루비콘 강을 건넜다 라는 말이 유형을 했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터키에 의해서 정복당했을 때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인들이 대거 서적들과 문학 작품들을 가지고 이태리로 피신을 갔다 여기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문에 부흥 즉 르네상스의 시작이 된다.

필자가 중세 문학 과목을 이수하면서 르네상스(Renaissance)의 이태리의 3대 문학작가로 단체의 신곡, 복카치오의 데카메론 그리고 페트랄카를 공부하면서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은 사람이 죽어서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섹스의 구분이 없고 몸에 부드러운 비단 옷을 걸치고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런데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완전이 섹스의 이야기였다. 흑사병으로 7명의 여성들과 3명의 남성들이 흑사병이 끝날 때까지 외딴 곳에 머물러서 한 사람이 10객 100개의 이야기를 교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전개되어진다. 필자가 교과서로 배운 책은 100의 이야기들 중에서 21개가 실려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완전히 오늘날도 얼굴이 붉어지는 섹스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의 스타일은 이후에 영국의 현대문학의 시조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칸타베리의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작품 구조에서 반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순례 행진을 가는 순례자들이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 바로 제프리 초서의 칸타베리의 이야기이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 전 세계로 확산되어진다. 기독교의 엄격한 섹스 윤리관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면서 그것의 반발로 시작된 것이다. 르네상세의 예술가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프로이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분석이 논문은 초반기 영구에서 전문가들에게만 허용하게 했다. 두 사람은 동성애자로 프로이트가 기술을 했다. 이들의 예술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르네상스의 예술작품들의 특징이 나체이다. 여성의 그림으로 목욕하는 비너스, 잠자는 비너스(1510), 남자들의 조각품들 역시 나체로 등장한다. 다비드 동상은 남자의 완전한 노출의 알몸이 아닌가?

이러한 문예부흥이 여파가 기독교 안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095년에 교황 우반 1세에 의해서 십자군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제 1차는 예수의 출생지인 예루살렘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다시 이교도가 점령하는 바람에 제 8차까지 신자군의 원정을 실패로 끝이 나게 된다. 여기에서 교황창이 너무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면죄부가 등장하게 된다. 면제부를 돈으로 구입하면 지금까지 모던 죄가 사면된다 라는 교리였다.

이것에 대한 교황청의 부패와 섹스에 대 한 억압으로 인간 반응으로 바로 로마 카톨릭에 반대로 등장한 개신교 운동이다 마틴 투터(Martin Luther)(1483-1546)가 1517년에 성서의 어디에도 섹스를 금지한 것이 없다. 그는 수녀와 결혼을 하고 루트 교회를 설립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존 갈빈(John Galvin)(1509-1564)이 미망인과 결혼하고 칼빈교회를 창립하게 된다 이후에 장로교의 전신이 된다. 신부와 수녀들의 섹스 억압은 중세의 문학에서 보면 종교적인 부패와 신부와 수녀들이 섹스를 통해서 사생아들을 교회 밑에 매장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그러한 반부패의 반동으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개신교가 목사들의 결혼을 허용했지만 섹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이다 그들이 부부 사이에 섹스도 엄격하게 통제를 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한 시골의 목동이 동들을 안고 자위행위를 했다 라는 것 때문에 그 동물과 소년이 화평에 처해졌다(Money, 1993). 그리고 미국의 초반기 문학 작품 속에서 나타니엘 호도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는 목사와 정을 통한 여성을 간통(adultery)라는 붉은 글자를 새긴 옷을 입힌 작품이다. 그 목사는 혼자서 괴로워하다 결국은 목사직을 내려놓고 고해성사를 하는 이야기이다.

 

만(Money)는 진화론적으로 섹스의 변태성욕을 6가지로 구분을 했다. 성혼과 속죄의 변태성욕으로써 예수의 상처들을 보고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발과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로부터 섹스의 흥분을 하는 절단 변태성욕, 약탈과 착취의 변태성욕은 옛날의 침입자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여자들의 납치해서 섹스의 도구로 첩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의 기록애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병자혼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이를 당에 대고 머리를 찍어서 항복을 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 나라의 60만명의 노예들(대부분이 여성들)이 인실로 잡혀갔다. 세자인 소현세자 내외분과 많은 여성들이 전리품으로 청나라에 붙잡혀 가서 섹스 노예로 전락했다.

소현세자는 그 당신에 청나라의 권력자인 도르곤과 친해서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인질로 잡혀간 우리나라 여성들을 구출해서 9년후애 25천명을 데리고 오게 되었다(다음 위키백과). 그 때 귀국한 여성들을 목욕 제기하고 제가를 하도록 허용을 했다. 이런 사람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물었다. 고향이 돌아온 여성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오늘 날 섹스가 난잡한 여자인 화냥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여기에서 새디즘의 변태성욕이 등장하게 된다 섹스를 정복으로 약탈로써 상대방을 제압해서 섹스가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섹스 변태성욕자이다.

희생과 속죄의 유형에는 마소키즘이다 있다. 섹스의 오르가슴의 욕구만족 뒤에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학대하는 것이다. 자신을 물어 뜯고 때리고 목을 조르고 학대하도록 요구할 때 섹스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상업과 부패의 분류에서는 매춘부와 돈으로 섹스를 사고 파는 사람들이다. 절도와 속임수는 페티시즘이 특징이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여성들의 속옷과 팬티 등을 훔치는 것을 통해서 자위행위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마의 섹스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엄마를 상징하는 속옷과 신발과 구두 등을 훔치는데 반드시 왼쪽 신발을 훔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섹스에 대한 불길은 산불처럼 번져갔다 근친상간과 강간과 폭력과 학대로 인한 여성들의 학대정신이상의 여성들을 악령, 악마, 마녀로 규정하고 유럽에서 10만명이 화형에 처해진 것은 여러 번 다뤘다. 여기에 한가지 자위행위를 한 변태성욕들과 함께 화형식에 처해진 것이다. 다시 프로이트의 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프로이트가 레지던트 시절에 비엔나에서는 이지 섹스에 대한 담론이 전개되어지고 있었다.

1903년에 출판된 오토 웨이닝그(Otto Weininger)가 섹스와 인격이라는 472페이지에 부록이 133페이지가 출판되었다. 그는 해부학, 생리학, 심리학을 통한 데이터로써 분석을 했다.

이 책은 섹스에 대한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은 양성 섹스이고 여성적인 남자와 남성적인 여자로 구분을 했다. 몸은 에로틱 지역들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 매춘과 절대적 어머니로 구분을 했다. 어머니와 유아는 유방에서 수유와 즐거움을 찾는다.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고전어로부터 섹스피어, 단테 등에서 인용을 했다. 그러나 그는 23세에 자살할 한 천재적인 사람이었다(Ellenberger, 1970: 주㈜ 참고).

두 번째가 비엔나 의과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크라르트 어빙(Kraft-Ebbing)의 걸작품인 섹스의 정신병리학에서 12개의 변태성욕들의 이름을 붙이고 정리를 한 그의 저서는 지금도 1980년의 미국의 DSM-Ⅲ에서 등장해서 지금까지 수정이 없이 변태성욕의 특징과 용어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Ellenberger, 1970).

프로이트는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섹스의 역사의 장단점을 꿰고 있었다. 한 미국인 엄마가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는 그러한 내용을 보여준다. 1935년에 미국인 한 남성 동성애자 어머니가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낸 답장에서 프로이트는 어머니가 동성애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빙 돌려서 우회적으로 말을 한 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은, 비판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동성애는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동성애자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성도덕 윤리, 사회적 혐오 때문에 할 수 없이 치료받으러 오기 때문에 결국 치료실패로 동성애로 복귀한다 동성애는 나이, 치료의 동기가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비관적이다 섹스 기능에서 고착 때문에 어떤 사례는 성공을 한다 그러나 실패가 많다. 치료를 원하면 이곳 비엔나까지 와야 한다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50년 후에 1970년데 민권운동에 편성해서 동성애를 변태성욕에서 제외하도록 압력을 넣게 된다. 1987년 DSM-Ⅲ-R 수정본에서 동성애는 변태성욕에서 재외 되었다.

필자가 미국에서 학부에서 공부를 할 때 미국의 역사와 미국의 정치학은 반드시 모든 미국이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이수를 하도록 했다.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다. 약 30명으 학생들 중에서 필자가 1등으로 한 과목을 이수하면서 미국인 학생들이 필자를 보고 외국 학생이 미국 학생들 보다 미국의 역사를 더 잘 안다 라고 칭찬과 함께 부러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과목에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 미국의 도덕 재무장 운동이 기억이 난다. 그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하면서 특별히 섹스에 대해서 엄격하게 검열이 시작된다. 만(Money, 1993)의 저서인 사랑의 지도에서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엔소니 캄스톡(Anthony Comstock)은 반섹스주의의 입법화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는 악의 억압을 위해서 회원회를 형성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의회 안에서 로비를 했다.

1873년에 검열의 그의 극단들은 법이 되었다(불경스러움과 포르노그래피에 위원회, 1971, vol. 2). 그는 그 스스로가 우체국에 특수 요원으로 임명이 되었다 연방법의 시행의 책임을 맡았다. 1915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그는 그의 지위를 이용해서 미국의 편지들을 검열을 했다 그는 불경스러움 혹은 포르노그래피 로서 검열을 했다. 모든 피임정보 그리고 상품들은 고로 분류가 되었다. 그는 그의 우편 검열단들을 사용해서 미국의 우편 안에서 자료들을 압수를 했다 뿐만 아니라 회사들의 구내를 직접적으로 습격을 해서 그 무대를 압수를 하는데 그의 단원들을 사용했다.

그는 우편물이나 미국 내의 자료들을 압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조업자들의 구내를 직접 습격하는 데 그의 우편 팀을 이용했다. 그는 예술 교실(미술전공의 대학생들이 나체 누드 실습) 안에서 여성 누드를 그리고 소매 상점들 안에서 불경스러운 문학 양쪽을 공격 안에서 똑 같이 열정이었다. 그는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 불경스러움으로써 혹은 리비도적인 생각 그리고 음욕 불순함을 제시하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러셀 트랄(Russell Trall)의 섹스의 생리학과 같은 메디컬 교과서들(1881)도 포함이 되어졌다.

불경스러움에 대해서 그가 글을 썼다, “우리의 젊은이들과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이런 저주의 사업의 그 효과는 펜으로 구술할 수 없다, 그것이 음욕, 욕정을 양육한다 음욕은 그 몸을 더럽게 한다, 상상을 더럽힌다, 마음을 부패시킨다 의지를 죽인다, 기억을 파괴한다, 야심을 속이다 심장을 굳어지게 한다 그리고 영혼을 저주한다.

그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그것이 인간다운 미덕으로부터 영혼을 빼앗아간다 그리고 젊은이의 마음 속에서 각인을 남긴다, 삶을 통해서 남자 혹은 여자를 저주하는 비전들에 각인시킨다. 한 개의 파노라마처럼 상상은 그것이 점점 더 깊이 피해자들을 파고 들어가서 그가 싫어하는 것을 실천하게 한다. 이런 교통이 우리 사회 안에서 난봉꾼을 만들고 그리고 타락을 가져온다 –가족은 오염되어진다, 그 집은 부패되어진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는 그러한 악한 유전에 의해서 세대는 점점 더 저주를 받게 된다 악으로 뿌린 씨앗을 수학하게 된다(Comstock, 1880).

 

건강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존 하베 겔로그(John Harvfey Kellog)이다. 그는 의사로써 운동과 음식과 절제로서 건강 지킴이가 되었다. 그는 자위행위를 하게 되면 몸에 엑기스가 빠져나가서 수명이 짧아진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육식을 피하게 했다. 필자가 미국에서 생활을 할 때 아침 식사는 켈로그의 시리얼, 콘 플레이크로 우유를 부어서 바나나를 잘라 넣은 아침 간이 식사를 했다. 그 겔로그의 그림이 귀가 큰 토끼 모양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인가가 되고 있다

사람이 바로 겔로그 의사이다 그는 의사였지만 호르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고 만(Money, 1993)이 노트를 하고 있다. 자위행위가 몸에 해로우니 하지 말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미국인인 일상에 파고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밑바닥에는 거세된 내시들이 섹스 욕구가 없고 왜소하다는 외형적인 면을 보고 이론화한 것이다 그런데 거세된 사춘기 이전의 남성은 고환호르몬 때문이지 자위행위 때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화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유인원들의 야생 동물 관찰들은 섹스는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우듯이 어린시절에 동료들과 섹스 놀이를 하면서 배우게 된다. 그들에게 섹스 놀이를 하지 못하게 했을 때 그들이 배우자와 짝을 지울 수 없다. 또 한가지는 남태평야의 외딴 곳에서 한 부족들은 사춘기의 남녀들이 섹스를 배우도록 남이 않고 경험이 만은 여성이 섹스를 해서 욕구 만족을 가지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잘 섹스를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도록 했다. 결혼 후에는 섹스의 외도가 금지되었다. 그러한 부족의 경우에는 변태성욕이 없었다 라는 학자의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또 한가지는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아의 삼비아족과 함께 1974-1976년 그리고 1977-1979년까지UCLA에서 정신분석 훈련을 받고 나서 1981, 1983, 1985년간 3년간 그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UCLA의 정신분석가인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와 함께 합류를 해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분석한 저서인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출판을 했다 .

그 책 속에서 특이한 점은 삼비아족의 어린이들은7-10세가 되면 남자 어린이집으로 여성은 여성의 집으로 집단생활을 한다. 그들이 나이 많은 선배로부터 남성의 성기를 빨라서 정액을 마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그들이 나이를 먹아가면서 후배들에게 다시 그들의 정액을 마시도록 했다.

어린시절에 엄마의 젖을 마시는 것처럼 남성의 정액은 우유를 대신해서 여성들이 결혼 후에 남자의 정액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사춘기에 남자의 성기를 빨고 정액을 마시는 전통은 지금까지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성기를 빨고 정액을 마신다면 동성애가 많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동성애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세의 1000년 동안 섹스의 금기와 억압과 처벌이 얼마나 많은 변태성욕들을 생산을 했는가? 라는 것은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미국이 1960대의 마스트와 존슨이 섹시 실험실에서 1만여회의 섹스 실험을 통해서 1966년부터 섹스 치료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헬란 카플런이 뉴욕에서 7년 후에 코넬 의과대학 섹스치료 센트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1970년데 섹스 치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치료자의 블로그를 보라) 프로이트가 섹스 치료를 시작한지 60년이 지나서 섹스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제 섹스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제 정신분석가들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프로이트는 앞에서 언급한 섹스의 핵심 문제를 꿰뚫고 있었다. 그의 이론에 왜 섹스심리학인가? 가 이애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환자들이 가지고 온 문제들을 분석해서 그것을 상처의 근원을 밝혀내고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서 상처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고 그들의 본업이었다. 그런데 여성 분석가들이 환자들의 근친상간 강간과 폭력과 학대를 들으면서 분개해서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같은 여성으로써 어린시절에 섹스의 상처를 말을 하지 못하고 숨어서 인격과 성격이 파괴되고 숨어서 사회생활을 피하고 외톨이가 되어 정신이상자가 된 환자의 과거의 상 처를 직면하게 되면서 여성으로써 이것을 묵과할 수 없다.

우리가 나서서 사회의 개선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일치르 보이는 여성분석가 들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미국여성연맹 회장으로 여성운동이 대명사 된 베티 프레디언(Betty Friedan), 그녀는 버클리 대학 심리학 박사로써 에릭슨 밑에서 수련 분석을 받은 정신분석가였다. 그녀는 근친상간, 강간을 치료를 하나가 여성의 인권에 분노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다이아나 러셀(Diana Russell)이다 그녀는 남아메리카 케입타운 대학에서 심리학 학자, 런던 대학에서 정치 경제학 석사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로써 근친상간과 강간을 치료를 했다. 1980년 때 미국의 건강한 여성 800명의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5명 중에 하 사람이 강간을 4명중의 한 사람이 성추행을 당했다 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미국 전체 사회를 경악시킨 장본인이다(Meiselman, 1990: 주㈜: 참고).

또 한사람은 아버지가 예일 대학 심리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 어머니가 뉴욕 시립대학 고전학 교수인 주디스 허만(Judith Herman)으로 그녀는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를 졸업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가 쓴 “심리적상처와 회복”의 저서는 명작으로 꼽힌다.

또 한 사람은 도로시 디너스테인(Dorothy Dinnerstein)으로 그녀는 뉴욕의 브루클린 대학에서 심리학 학사, 펜실베니아에서 스워스무어(Swarthmore)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 뉴욕의 뉴 스쿨(New School 0f Social Science)에서 심리학 박사로써 뉴저지 락트대학(뉴 저지 주립대학)에서 십리학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하면서 “인어와 마나톤”(몸은 인간인데 머리가 소의 머리의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라는 저서를 1976년에 출판을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양육을 하면서 딸들에게는 현모양처로 아들에게는 강한 사회적 활동가로 양육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양육의 과정에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의 시본 더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저서 2의 탄생이 있었다. 그녀 역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성이 되는 것이다 즉 여성의 본질은 여성이 되도록 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환경에 의해서 여성으로 양육되어지는 것이다.

디너스테인은 양육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해야 한다. 아들이 강해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압이 아들들에게 반발을 불러 일으켜서 결혼 후에 엄마와 같은 부인을 탄압해서 학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태리의 법학자로 고고학자가 되어 유물들의 발굴을 통해서 원시사화의 인간의 모계가족설을 가상해낸 바코펜(Bachofen)이 있다.

그는 남자들이 여성들을 학대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모계사회로 귀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을 했다. 그에 의해서 등장한 가상의 세계가 바로 남아메리카의 아마존에 있는 여성의 왕국인 아마조네스의 탄생이다(김종만 나(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p. 623의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바코펜(Bachofen)을 보라.

디너스테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미세한 결함들을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어린시절부터 세뇌되어진 남성의 생각을 개조시켜야 한다(소의 머리를 한 남자의 그리스 신화의 비유는 소 대가리로 비하). 이 책이 페미니스트의 고전이 되었다. 위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뉴욕에서 여성을 위한 전국 조직인 미국 여성 연맹을 조직(NOW)하고 회장에 프레디언이 선봉에 섰다. 그들이 여성 자각 운동을 전개를 했다. 뉴욕에서 첫 집회에서 5만명이 참가를 했다. 대 성공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정신분석의 단골 메뉴들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여성은 자녀양육과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 남성은 사회활동과 제정적인 책임을 자는 것을 정상적으로 가족을 기술한 프로이트의 가부장적인 여성관의 핵심인 거세불안과 남근 질투에 반대를 했다. 그러나 섹스 착취와 학대로 정신적인 불구가 되는 것으로부터 해방을 주장을 했다.

여성들이야! 자신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글귀가 바로 그리스의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아라”였다.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의존하지 말라, 내 문제는 내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아 성장이 된다. 잠에서 깨어나서 내 자신의 현실을 보라.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 가정이 창살 없는 감옥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어야 한다. 남편에게 의존해서 자녀들이 성장하고 난 이후에 남편의 학대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무능력해서 평생의존해서 살고 잇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라,

여기에 또 한가지는 정신분석의 단골인 acting out의 금기이다. 말로써 표현하라, 폭력과 폭언, 묵언, 눈길주기 피하기, 삐쳐서 말을 하지 않는 것, 두문불출하지 말고 모든 것은 말로써 표현을 하는 것이다, 부부사이, 자식사이에도 말을 하지 못하면 모른다. 내 목소리를 해야 한다, 내 마음속에 억압된 분노와 노여움을 말로써 표현하다 여기에서 미폭력과 무저항이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뉴욕에서 여성 폭로 운동이 시작되었다. 제 1 회 미투(Me Too)운동이었다. 사라(Sara)라는 여성은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용사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딸을 강간 한 근친상간을 폭로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너도나도 근친상간, 강간을 폭로 운동을 했다. 여기에서 미국 여성 연맹이 주체가 되어 뉴욕 주에서 강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처벌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에 10년 만에 50개 주를 통과했다. 강간은 강제로 섹스를 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섹스이지만 피해자는 폭력이다. 섹스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근친상간과 강간을 치료를 해오던 분석가들이 아무리 깨달음과 이해를 통해서 설득을 해도 순결을 잃었다 나는 더러운 여자이다 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틀을 벗겨낸 것이다.

이들이 이룬 성과는 다이아나 러셀의 노력에 의해서 브랏셀에 국제 여성전법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여기에서 더욱 더 나아가서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1943년에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사인한 유일한 국가 지원의 정신건강연구소) 안에서 성폭력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전에는 가족폭력이라는 용어조차 학계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들어서 매맞는 여성 증후군 그리고 매맞는 어린이 증후군이라는 용어들이 등장하게 된다. 적국에 쉘터(Shelter) 즉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폭력에서 벗어나서 쇨 수 있는 쉼터가 설립되었다.

여기에서 일부 여성들이 과격한 페미니스트로 등장하게 된다 대표젹인 사람이 슐마스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다 그녀는 캐나다 출신으로 남자 친구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진 후에 뉴욕으로 탈출해서 여성해방주의자가 되었다. 그녀의 저서 “변증법적 섹스”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제사로 1933년에 섹스 혁명을 쓴 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천재적인 분석가로 미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사망)와 마르크스이론으로 무장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녀는 여성 해방을 위한 점진적인 개혁은 의미가 없다.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장례식을 고했다.

또 한 사람의 과격한 페미니스트는 제레미 그리어(Germaine Greer)로써 그녀의 저서인 거세된 여성, “내시 여성”(The Female Eunuch)이 있다. 이 책은 1970년에 출판되어 2년 동안 베스트셀러로 절판이 되었다 이후에 11개국어 번역되어 페미니스트의 고전이 되었다(2022, 3, 19: 위피피아).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들로 활동을 하면서 정신분석 안에서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사이에 평등한 권리로 연결시킨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낸시 초돌로우(Nancy Chodorow)이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제시카 벤자민(Jessica Benjamin) 뮤리엘 다이멘(Muriel Dimen), 버지니아 골드너(Virginia Goldner) 그리고 아드리에네 하리스(Adrienne Harris)(이 여성들 모두가 NYU 박사 후 프로그램의 관계의 괘도와 연결되어져 있는 뉴욕대학원 정신분석학교 출신들이다(Aron, 1996).

그들은 남녀평등주의와 후기 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950년에 시작된 반전이, 역전이 운동에 편승을 해서 과거의 프로이트의 신경증 이론은 신경증 환자에게는 적합하지만 정신증과 심한 성격장애에는 적당하지 않다

고로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를 하는 기법으로 그리고 분석가가 분석을 받는 사람을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분석을 받는 사람 역시 분석가를 분석한다. 분석가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동시에 환자가 분석가를 치료할 수 있다. 이것은 니체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시에 심연 역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정신분석가들이 인용한 것이다.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할 때 분석가는 환자가 모르는 것을 깨닫게 하고 가르쳐주고 알게 함으로써 증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고전적 프로이트의 이론은 환자를 모르는 사람으로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보는 것과 반대로 환자는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분석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눈치 고치에 귀신이다 라고 말을 한다.

그 분석가의 약점을 쥐고 분석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과거의 이러한 진전이 없는 치료의 제자리걸음을 부정적 전이로써 개념화했던 것에 반대로 분석가는 만능이 아니다, 분석가는 전지전능한 사림이 아니라 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말라고 수많은 분석가들이 경고를 한다. 프로이트는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 분석가의 감정이 개입하지 못하게 감정의 절제, 분석가의 사적인 비밀엄수 중립과 절제를 강조했다.

정신증과 심한 성격장애자들은 이러한 분석가의 허점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환가가 분석가의 약점을 쥐고 흔들분석가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화가 난 것을 참고 감추는 부자연스러움은 바로 분석가 자신은 정작 환자에게 감정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표현하려고 하면서 분석가 자신은 속에서 끊고 있는 분노를 참고 속이는 모순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반전이이다.

이것을 뚫고 나가지 못하면 정신과과 성격장애 치료는 성공할 수 없다는 수많은 분석가들의 경험에서 환자를 분석가와 대응한 인격체화가 날 때 화가 난다는 말을 행동이 아니고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분석가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의 확인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고 편안함의 기본이 아닌가? 이러한 새로운 치료의 흐름이 바로 분석가와 환자가 함께 만드는 상호주관 그리고 상호적 치유이다.

환자와 분석가는 서로 동등한 대등관계 안에서 서로가 주고받고 물고 물려 있는 것이다 고로 새로운 3의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이 안에서 서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심각한 성격장애 치료의 개석자들의 치료의 기법들이 이들을 등장하게 한 동력이 되었다.

여기에 후기현대, 포스트모던 흐름이 한 몫을 하게 된다(Aron, 1996: 주㈜: 참고). 프랑스의 심리학자, 정신분석가, 철학자, 사회학자로 미침의 광기(1961) 그리고 정신병과 성격(1954)을 쓴 마이켈 푸코(Michael Foucault) 그리고 정신과의사이자 철학자인 장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있다. 데리다는 보스턴 정신분석학교 교수인 정시분석가인 마구아레트 아쿠투리아(Marquerite Aucouturier)와 결혼을 해서 정신분석, 철학, 특별히 구성주의의 파괴 해체이론에 철학자로 포스트 모던의 대표자가 되었다(2022, 3, 19: 위키피아).

포스트 모던작가들은 이원론을 흑백사고 타파를 주장한다 그리고 구성주의의 해체로서 탈구성수의로 콩트가 주장한 사회학이 실험실에서 증명해야 과학으로 인정한다는 이분법에 반대를 했다. 조그만 시냇물들이 모여서 큰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데 작은 지류들은 무시되어질 수 없다. 변증법적으로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되는 것이다. 고로 작은 것의 소중함으로 마이크로 미세학을 주장을 한다.

주㈜: 네어버 영어 사전에서 포스트 모던니즘의 특징을 인용한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회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의 용어로, 소서사(Petit Narrative)의 반대 개념이다. '거대서사'란 원래 역사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이해되도록 설명해주는 커다란 '이야기 틀'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역사란 각기 다른 형태의 생산이 부단히 반복되는 것이며,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귀결되는 계급투쟁이 되는데, 역사에 대한 바로 그러한 설명을 거대서사(Master Narrative)라고 한다.

리오타르는 바로 그 거대서사의 개념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거대서사란 마치 타자를 허위와 이단으로 배제해온 절대적 진리처럼, 온갖 작은 서사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무시하는 19세기의 유물이며 전체주의적 횡포라고 비난하며 거대서사 사대의 종언을 선언한다. 지금은 중심부의 거대서사보다는 주변부로 밀려난 작은 서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탈중심 후 이분법적 서열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인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리오타르의 거대서사 이론은 곧 매스터 텍스트(Master Text)와 연결된다. 포스트모던 문학에서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원본인 매스터 텍스트보다는 수많은 복사본들의 가치를 인정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삼중번역이라고 한 이유나, 토머스 핀천이 『제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에서 원본 찾기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거대서사'는 궁극적으로 모더니즘 시대의 '절대적 진리'와 상통하는 개념으로서, 많은 소서사들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거대한 대의명분(Grand Cause)'을 앞세워 개인적 상황이나 사적 공간을 소홀히 했던 한국의 1980년대 이념과도 상통한다. 리오타르는 거대서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러한 소서사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포스트모던 시대는 다양한 소서사들의 목소리들을 경청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김성곤).

 

페미니스트들이 쓴 저서들은 전부 프로이트의 섹스학에 기초를 둔 저서들이다. 보봐르의 2의 섹스(The Second Sex, 1949), 디너스테인은 인어와 마나톤(Mermaid and Minitour, 1970) 그리고 파이어스톤의 변증법적인 섹스(The Dialectic of Sex, 1970), 그리고 그리어의 여성 내시(The Female Eunuch, 1970)는 프로이트가 여성의 정신병의 핵심이 근친상간, 강간에 학대와 폭력의 결과하는 그의 연구의 파생이 50년 후에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세상을 바꿔 놓은 것이 아닌가?

미국에서 섹스에 대한 혁명으로 불리는 시점에 1970이다. 프로이트가 뿌린 씨앗은 이제 그 열매를 맺게 된 것이 페미니스트의 공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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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역사: 역동학적 정신의학의 발달과 진화

아론(Aron, 1996). 마음의 만남

만(Money, 1993). 사랑의 지도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Ⅰ(1953), (1955), (1957).

허만(Herman, 1997). 상처와 회복

스톨러(Stoller). 쪼갬: 여성의 남성상(1973), 변태성욕: 미움이 에로틱하게 변함(1975), 섹스의 흥분:에로틱 심리역동학(1979), 고통과 열정:S&M의 세계(1991).

스톨러와 허드트(Herdt & Stoller, 1990) 친밀한 커뮤니케이션

(Mann, 1997). 심리치료: 에로틱한 관계

오르바크(Orbach, 2000). 섹스의 불가능

마노다(Maroda). 반전이의 힘(1991), 유혹, 항복, 그리고 변화(1999)

코호트(Kohut). 어떻게 분석이 치료를 하는가(1984), 자아의 분석(1971)

투트맨(Tuttman et al., 1981). 대상과 자아

알렉산더(Alexander). 심인성질환(1949). 심리신체의학의 연구(1945)

윌슨과 민츠(Wilson & Mints). 심인성질환 증세들

그래머와 그린베르그(Grammer & Greenberg, 2007). 페터슨의 알레르기 질병

소카로이드(Socarides, 1989). 동성애: 정신분석 치료와 연구

몰러(Mahler, 1975). 인간 유아의 마음의 탄생

메틸다 스펠링(Melitha Sperling). 어린이 안에서 상처 심리 장애들(1978), 어린이들 안에서 핵심 신경증들과 행동 장애들(1974)

페니첼(Fenichel, 1976). 신경증의 정신분석 이론

투스틴(Tustin). 자폐증 어린이와 정신증(1975), 신경증에서 자폐증적 장애물(1986)

윌슨과 민츠(Wilson & Mintz, 1989). 심인성질환 증세들

헬리(Haley). 시련의 치료(1984), 문제해결치료(1991), 전략적 가족치료(1991), 밀턴 에릭슨 1(1985), 2(1985), 3(1985). 집 떠나는 자녀들(1993), 특이한 치 료(1994).

세갈(Segal).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 1989), 꿈과 상상과 예술(1991), 치료적 정신분석(2004)

메이(May). 불안의 의미(1996), 자아를 찾아서(1953), 실존 치료(1995)

위크랜드(Weakland, 1982). 변화와 전술

에릭슨(Erikson), 어린이와 사회(1967), 주체성의 위기(1968)마스터와 존슨(Master & Johnson). 인간의 섹스 행동(1980), 인간 섹스의 기능부진(1970)

카플란(Kaplan). 새로운 섹스 치료(1974), 섹스 욕구장애의 치료(1979), 섹스 혐오, 섹스 공포증과 공황장애(1987), 섹스 치료의 삽화 매뉴얼(1975)

질베르그(Zilbergeld, 1978). 남성의 섹스 치료

바르바크(Barbach, 1984). 서로서로 친밀감: 여성의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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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으니 치료자 정신분석 심리치료 홈페이지 전문서적 안내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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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주): 참고

 

치료자의 전화 번호: 010-4512-1275

김종만, e-메일: jongmankim@hanmail.net.

홈페이지: http://www.psychclinic.pe.kr/

정신분석 심리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