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건강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유사점과 차이점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심리적인 원리들 2022. 1. 29. 03:46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유사점과 차이점

 

정신과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되어진다. 첫 번째는 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한 정신건강전문의(과거 신경정신과)들이다. 그들은 모든 정신적인 문제들을 뇌의 원리로 보고 약물로써 치료를 한다. 미국의 경우에 하루에 보통 최하 43이상 최고 53정도의 환자들을 치료를 한다(Stadter, 1986, 대상관계 단기 치료를 보라). 그들은 한 환자와 2분 혹은 3분 정도(최대 5분을 넘어가는 것이 드물다)의 대화를 통해서 그 증세들에 대한 처방약물의 적정량과 부작용들을 체크하고 진료를 한다.

두 번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들, 대학원에서 치료심리학, 임상사회복지학 그리고 5년이상의 정신간호학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정신분석 학교에 입학을 해서 2년 혹은 3년의 과정을 수료한다(최근에 뉴욕 대학원과 컬럼비아 대학원의 정신분석학과의 모집 요강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입학, 컬럼비아 대학은 5년의 과정(수련까지 포함)(2022, 1, 15: 위키피아) 그 후에 개인 정신분석가로부터 개인적인 수련의 과정을 몇 년을 거친 후정신분석가가 되는 전문가들이다. 또한 대학원에서 치료심리학, 상담심리학, 가족치료학, 최면치료학, 인지행동치료학 등의 과정과 수련을 통한 심리치료 전문가들이다. 정신분석가들심리치료사들의 공통점은 마음, 심리적인 원리를 응용해서 치료를 하는 약물이 아닌 대화치료이다. 한시간 동안(50분 혹은 45) 환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증세들의 원인과 결과들을 분석하고 수정해 나가는 치료를 하는 전문가들이다.

정신분석(psychoanalysis)과 심리치료(psychotherapy)라는 용어 그 자체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등장을 한다. 그러나 심리치료가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8년 후에 정신분석이 등장하게 된다, 서로 완전이 다른 계통으로 진화를 진행해 오다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은 구분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정신과 치료와 심리치료 그리고 정신분석에 대해서 소비자들의 혼란스럽고 애매한 점들을 고려해서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에 대한 진화의 과정을 다루면서 그들 사이에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그리고 최근의 발달의 과정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심리치료가 등장한 것은 1889년 8월 6일-12일에 파리에서 열린 1 차 국제 심리학 총회(회장: 가르코트(Charcot))에서 네덜란드의 최면사인 벤 렌트겐(van Rentergher)과 벤 에덴(van Eeden)에 의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2년 전에 암스테르담에서 최면치료를 위한 한 개의 심리치료 센터를 개업을 했었다. 그것을 제 1회 국제심리학 총회와 같은 시기에 개최된 국제 최면학 총회에서 심리치료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발표를 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895년에 히스테리아의 연구로써 등장하게 된다. 고로 심리치료라는 말이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보다 8년 먼저 등장을 했다(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탄생: 역동학적인 정신의학의 진화와 발달: 제 9권 pp. 62를 보라).

심리치료라는 그 낱말은 최면사들에 의해서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로써 등장하게 된다. 렌트겐과 에덴은 최면사였다 그리고 역시 프로이트는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분석을 창조를 했다. 그렇다면 최면의 시대 이전에는 정신병을 어떻게 치료를 했는가?

정신병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에 의해서 신조어로 만들어진 히스테리아(hysteria)(그리스어로 Hyster는 자궁의 뜻)라는 정신병을 치료를 했다. 이것이 중세 1000년의 기독교의 전성기간 동안에 그리스의 정신, 마음, 심리라는 용어들 즉 사이크(psych), 소울(soul)등의 용어들이 기독교의 영혼(spiritual, holy spirit) 이라는 말로 바뀌게 된다. 카톨릭에서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을 악마, 마녀, 귀신, 악령 등에 씌운 사람들로 보고 신부들이 치료를 했다. 이것을 엑소시즘(exorcism) 즉 퇴마의식이라고 부른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지구상의 곳곳에서 정신적인 혼란의 문제들을 다루는 귀신을 쫓아내는 굿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을 샤만(shaman) 즉 무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악마, 마녀, 악령들의 전염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귀신을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식이 유행을 했다.

중세말과 현대 초반(1450-1750)에 유럽에서 10만명의 여성들이 마녀, 귀신, 악마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것을 마녀 사냥(witch hunting)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이후에 정치사회학적인 용어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쓴 억울한 사람들의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과 프랑스의 백 년 전쟁 동안에 프랑스의 법령에는 여성은 왕위의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에드워드 Ⅲ 세에게 시집을 간 이사벨라 공주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서 프랑스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는 바람에 프랑스가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 3대에 걸쳐서 중세의 100년 동안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3차 십자군의 동원에서 영국군을 대표하는 리차드 Ⅱ(사자심왕)과 프랑스 군을 대표하는 필립 Ⅱ세가 서로 갈등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성지 회복에 실패하고 귀국하는 도중에 리차드 Ⅱ세가 납치되어 몸값으로 연간 왕정비용이 3를 요구하는 것 때문에 그 몸값을 대납하기 위해서 귀족들에게 돈을 빌리는 바람에 리차드 왕의 대리로 영국의 왕이 된 (John)왕이 귀족들에게 권한을 양보하는 1215년의 마그나 칼타(Magna Carta) 대헌장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영국의 의회정치의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2022, 1, 8: 위키피아).

이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바로 100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가 영국의 부르군디의 군대에 빈번하게 패배하는 바람에 프랑스군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 때 등장하 소녀가 바로 잔다크(Joan of Arc)이다 그녀는 하느님이 나타나서 나라를 구하라 라는 환상을 본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프랑스 군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흰 갑옷과 망토 그리고 백마를 타고 프랑스 군대의 맨 앞에서 지휘를 해서 혼비백산한 영국군을 처음으로 대파를 했다. 이후에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서 종교 재판 회부되어 하느님을 환상을 보는 마녀로 불태워 죽이는 화형식을 당하게 된다. 이후에 영국군으로부터 프랑스의 영토를 회복한 프랑스가 잔다크를 나라를 구한 성녀(聖女)로 인정을 하게 된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영국의 캠브리지(Cambridge) 대학의 수학자인 뉴턴(Newton; 1642-1750)에 의해서 만유인력으로 물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세상의 만물의 근원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등장과 함께 전기, 자장 등의 과학이 잇달아 등장하게 된다 이어서 18세기에 프랑스에서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학교가 세워지고 중세의 미신과 무지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깨어나게 된다.

이 시점(1774년)에서 신부인 가스너(Gassner)가 오스트리아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중 앞에서 귀신을 좇아내는 굿을 시범으로 보여주는 유행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신부가 자신의 교구에서 퇴마의식을 하지 않고 왜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유행을 일으키는가? 라는 것이 카톨릭 교구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청문회의 전문가 그룹 멤버 중에 의사인 메즈머(Mesmer)가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아들로서 법학과 신학을 전공했다가 그만두고 늦깎이로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가스너가 신부복장을 하고 성경책과 십자가를 들고 귀신에 씌운 여성을 치료를 하는 것을 본 메즈머가 신부복, 성경책, 십자가가 없이 내 손가락 하나로써 똑 같은 현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장담에서 실제로 그가 시범으로 똑 같은 현상을 보여주면서 한 개의 역사적인 이벤트가 등장하게 된다.

메즈머는 귀신이 씌운 것이 아니고 히스테리아(그리스의 정신병의 부활) 라는 정신병으로 그 병을 치료를 하는 치료기법으로 자석치료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메즈머는 자신의 이론으로 전기 자장의 이론과 건강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병든 사람의 몸으로 유체가 전달된다 라는 유체이론을 들고 나와서 책을 썼다.

오스트리아의 왕실에서 장님 소녀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메즈머가 치료를 했으나 실패한 것 때문에 그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가 프랑스로 가서 역시 전국적인 돌풍을 몰고 왔다. 그는 뉴턴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발명을 했다고 자랑을 했다.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 병든 사람의 몸으로 건강한 유체를 전달해서 건강한 사람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을 시범으로 보여주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바람을 일으킨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드디어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과학자로써 프랑스에 미국 대사였던 벤자민 프랭클린(번개가 전기현상임을 연의 꼬리에 구리줄을 달라서 증명한 과학자) 그리고 의사인 킬로틴(사형 도구인 단두대의 고안) 그리고 화학자 라보아제 등으로 구성된 7명의 전문가 그룹에 의해서 검진을 받게 된 결과 건강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유체가 병든 사람 안으로 이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부는 치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라는 백서에 의해서 메즈머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메즈머는 자신의 위대한 발견이 정작 무엇인가? 를 모르고 그리고 그의 치료가 만병통치약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독점하고 제자들의 그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고로 제대로 후계자들이 양성되어 지지 않았다(위대한 발견을 한 것을 스스로 모르고 사망한 사람이 바로 메즈머컬럼버스이다)(Ellenberger, 1970에서 인용).

메즈머의 정신병의 치료는 프랑스의 귀족으로 박애주의자인 푸이세이그(Puysegur)에 의해서 살아나게 된다. 그가 메즈머의 책들을 근거로 스스로 치료법을 개발하게 된다. 그는 포병 연대장으로써 빅토르라는 그의 부하가 군대사열 행사 도중에 기절하게 되면서 그를 치료를 하게 된다. 그는 물리학 실험실을 세우고 철저한 실험 연구를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허밍으로 부르는 노래를 벡토르가 따라 하는 것에서 호기심으로 연구를 했다. 그는 그의 실제 치료들을 학회에 보고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치료기법을 개발하게 된다. 그는 자석의 힘으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힘이라는 것을 밝혀내게 된다. 그는 이름을 인공잠, 인공수면(artificial sleeping) 이라고 붙였다. 푸이세이그 밑에서 약 200여명의 제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실제 치료를 개발해 나갔다. 1843년영국의 외과의사 제임스 블레이드(James Braid)가 그리스 잠의 여신인 히포(Hypnos)의 이름을 따서 인공잠을 최면(hypnosis)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바뀌게 된다.

의과대학 내과 교수가르코트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3번의 거부 후에 4번째로 1882년에 몽유병에 대한 최면의 치료 연구로써 강연을 하게 됨으로써 과학으로 인정을 받아서 그 이후에 그가 사망할(1893) 때까지 10년 동안 가르코트 최면학교가 설립되어지면서 파리가 전 세계의 히스테리아(모든 정신병의 총칭)의 최면치료의 중심지가 된다. 가르코트가 어떻게 최면을 연구하게 되었는가? 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최면을 배운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Ellenberger, 1970).

비슷한 시기에 의과대학 내과교수인 베른헤임(Bernheim)이 낸시라는 지역에 라보(Libeault)라는 괴짜 의사가 일반 환자는 정상적으로 치료 비용을 받고 치료를 하는데 원하는 사람을 무료로 이상한 치료를 한다는 소문 때문에 그를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최면학을 배우게 된다. 그가 최면학 교과서를 쓰게 되면서 낸시 학교(Nancy school)가 등장하게 된다. 가르코트는 최면의 시범치료에서 제자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팔에 무감각을 제시한 후에 깨어나서 바늘을 찔러도 감각이 없는 무감각을 보여준 이후에 다시 최면을 걸어서 무감각을 제거를 지시한 후에 그 감각각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최면이 바로 히스테리아(히스테리아 = 최면)이다 라고 증명을 했다

그러나 베른헤임은 반대를 했다 최면을 제시에 의한 것이고 히스테리아는 정신병이다(히스테리아 =/= 최면). 이 서로 반대되는 논쟁 때문에 가르코트 학파낸시 학파분열되어지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카리스마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제자들의 반론을 허용해주지 않고 독점적으로 10년 동안 전 세계를 흔들었다. 1893년에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에 그의 제자인 의사인 바빈스키(Babinski)에 의해서 히스테리아는 병이고 최면은 제시에 의한 현상임을 밝혀 냄으로써 낸시 학교의 승리였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고안하기 이전에 1885년 10월에 6개월간 가르코트에게 그리고 4년 후에 1889년에 낸시학교를 방문하고 베른헤임의 최면에서 최면에 깨어난 환자에게 몇 개의 실마리를 제공해서 기억을 회복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후에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카우치자유연상을 개발한 것으로 노트되어지고 있다(Ellenberger, 1979).

최면의 초반기에 메즈머는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치료를 해 주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들이 붕괴되면서 브로죠아들(중산층)이 등장하게 되면서 돈을 받고 치료를 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최면을 사용하는 기법에서는 표준화된 것이 없었다.

프로이트에게 최면학을 소개한 브로이어(Breuer)는 안나 오(Anna O)양을 치료하면서 그녀가 발짝을 할 때마다 하루에 몇 번씩 왕진으로 치료를 한 기록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의사가 환자의 집을 방문을 해서 환자들을 치료를 했다. 브로이어가 2년 동안 히스테리아 환자인 안나 오 양을 치료를 한 것이 1895년에 프로이트와 함께 합작으로 히스테리아의 연구가 출판된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브로이어는 계속해서 안나 오 양을 치료를 하다가 그녀가 브로이어의 아기를 임신했다 라는 상상 임신에 깜짝 놀란 브로이어가 안아 오 양을 프로이트에게 맡기고 부부 금혼여행을 떠나게 된다 프로이트가 안나 오 양을 치료를 하면서 그녀의 상상 임신에로틱 전이(erotic transference)로 명명하고 치료를 하게 된다. 에로틱 전이는 치료를 받는 사람이 분석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치료의 장애물인 방어로써 정의를 하면서 에로틱 전이는 정신분석에서 한 개한 장애물로 등장하게 된다(Orbach, 2000: 주㈜: 참고).

프로이트는 안나 오 양이 병든 아버지를 장기간 간호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몸을 마사지로써 간호해주는 과정에서 섹스 욕구의 등장으로 죄의식에 의해서 5개의 손가락이 뱀의 머리로 환각 증세로 등장한 것을 분석으로 밝혀내고 대화를 통해서 안나 오 양을 치유를 했다. 안나 오(Anna O)양의 본명베르다 파펜헤인(Bertha Pappenheim)으로 그녀는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아서 회복되어(Edelman, 2000, 2004: 주㈜: 참고) 세계에서 최초로 고아원을 세우고 사회복지사업을 한 공로로 그녀의 사후에 독일 정부로부터 1930년에 훈장을 받고 그녀의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Ernest Jones, 1953).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카우치에 눕게 하고 1주일에 5로 1회당 50분 혹은 45으로 카우치 뒤에서 노트를 하면서 자유연상의 기법으로 약물이 아닌 대화 치료로써 치료비용을 받고 치료하는 기법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그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9월달에 치료를 시작해서 졸업이 시작되는 5월까지 치료를 하고 그리고 여름방학인 6월 78월의 3개월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3개월간의 휴가 기간에도 그는 치료 비용을 부과를 했다. 그의 전통에 따라서 분석가가 휴가의 기간에도 치료 비용을 부과하는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들을 7차례나 여행을 했다 그는 골동품 수집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수집한 골동품들을 제자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다(Ernest Jones, 1955).

심리치료라는 용어는 정신분석 보다 8년 먼저 등장했으나 그 이후에 진화는 단절되었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최면학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학문으로 치료 기법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20세기 초반기에 정신분석의 열풍이 유럽을 강타해서 너도나도 정신분석 치료를 하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1911년에 야생분석을 해서는 안된다는 논문을 발표한다, 정신분석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치료로써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경고를 하게 된다. (Jung)의 권위를 받아들여서 정신분석학교가 비엔나에서 세워지고 이후에 여러 나라들 안에서 정신분석학교들이 속속이 세워지게 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허만 넘버거(Hern Number)의 권유에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는 전문가들에게 정신분석이 개방되어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에 의해서 흡수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전문가들로서 정신분석학교에 들어가서 정신분석가가 된 유명한 인사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유럽의 정신분석가들의 40%가 의사가 아닌 전문 분야들의 분석가들이었다.

각 분야별로 대표적인 사람들을 소개하면 비엔나 대학에서 물리학과 철학 박사인 데이비드 라파포트(David Rappaport), 비엔나 대학에서 예술학 박사어네스트 크리스(Ernest Kris), 비엔나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인 세이그필드 베른필드(Siegfried Bernfeld), 비엔나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데오도어 레익(Theodor Reik),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에릭 프롬(Eric-Fromm), 미국 뉴욕의 버팔로 대학의 영문학박사크리스토퍼 볼라서(Christophe Bollas), 제네바 대학에서 언어학박사마구아레트 세게하이(Marguerite Sechehaye), 비엔나 대학에 법학박사로 변호사인 한스 샤크(Hanns Sachs),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목회학박사놀로 메이(Rollo May) 등의 명사들이 있다.

그들은 전문분야를 버리고 정신분석가가 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전문성을 정신분석학에 첨가시킴으로써 정신분석이 엄청난 범위로 확대되어갔다.

물리학에 정신분석에 들어오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바람이다 바람은 힘과 방향을 가지고 있다. 마음(자아)는 벡터이다, 힘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에너지이다 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물리학의 열역학이라는 낱말인 thermodynamic이라는 열(thermo)라는 그리스어 대신에 심리 라는 psych가 첨가되어 psychodynamic이 탄생하게 된다 즉 역동심리학이다(동양의 역학(易學)과 다르다).

언어학과 결합하면서 제네바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인 세게하이(Sechehaye)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의 세계적인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슈르(Ferdinand de Saussure)의 조수로 있다가 그의 아들인 정신분석가인 소슈르(Raymond de Saussure)의 소개로 정신분석학자가 된다. 그들이 융(Jung)의 그룹이 떠난 스위스 정신분석학회를 재건하게 된다.

언어학이 정신분석에 첨가되면서 정신분석의 과거의 중요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언어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되어질 수 없다. 현재는 바로 과거의 결과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지금 현재는 과거의 경험의 결과이다, 지금 나는 어제까지의 경험들의 총체적 결과가 아닌가?

언어의 이론이 정신분석에 도입되면서 행동 언어(action language)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컬럼비아대학의 정신분석가인 로이 샤프(Roy Schaffer)는 환자가 대화로 사용하는 그 언어의 억양, 음조, 음색, 그리고 스타일의 분석으로 언어 그 자체가 정신분석의 기법으로 활용되어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게 된다(Shaffer, 2003: 주㈜: 참고).

예술학이 정신분석에 들어오게 되면서 인간의 내면의 어두움의 세계인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14년에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전쟁을 어떤 수단으로써 도 막아야 하는 것에 대한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유럽의 젊은 지식인들이 실망과 절망에서 허무주의가 유행을 했다. 루마니아의 한 군의관 앞에서 그의 질문에 무조건 다 다 다(yes, yes, yes)라고 대답을 하면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는 것에서 유래된 다다이즘Dadaism)이 있다. 허무주의 염세주의의 예술의 등장이다. 그들이 프랑스의 한 까페에 모여서 허무주의를 논의하게 된다 대부분이 탈영병들이었다.

그 구성원 중에 한 사람인 프랑스인 앙드레 브레톤(Andre Breton)은 정신과의사 출신으로 그가 제 1 차 세계대전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한 미친 군인이 포탄이 떨어지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이곳에 떨어져라 저곳에 떨어져라 하고 지시를 하는 것을 보고 그가 그것을 연구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초현실주의(Surrealism)이다. 그가 무의식에 매혹되어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정신분석을 공부를 했다. 그는 정신과의사를 포기하고 30년 동안 초현실주의를 주도하게 된다. 그는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지대를 최면(전의식, 잠재의식)으로 보았다. 그가 자동 글쓰기를 이용해서 시를 썼다. 잠재의식을 생각하는 데로 그대로 옮겨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전의식에 의해서 컨트롤되는 사람이고 초현실주의자는 전의식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을 했다(Ellenberger, 1970).

그림에 대한 무의식의 연구는 예술가들에 의해서 정신분석으로 연구하는 길을 열어 놓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정신분열증 환자로써 그가 폴 고갱(Paul Gauguin)과 함께 생활하다가 고갱이 떠난 이후에 거울을 보고 면도날로 귀를 잘라버리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림으로 남긴 것과 마지막으로 그는 권총으로 자살한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그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인상들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들은 후기인상파로 남아 있다. 그의 내면의 세계를 연구하는 분석가들이 등장을 했다.

또한 피카소의 입체파의 그림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영향을 받는 작품들이다. 특별히 2004년에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앨프리데 젤리네크(Elfriede Jelinek)의 노벨 문학상 작품이 피아노를 치는 여자사랑을 할 수 없고 섹스를 할 수 없는 변태성욕과 맹목적 사랑에 매달려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정신분석의 도움이 없이는 해석할 수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일대학원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뤄지는 현대작가로 기술되고 있다(번역가인 이병애, 1977 문학동네㈜: 참고).

하버드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정신분석가가 된 도널드 스펜서(Donald Spence,1982: 주㈜: 참고)의 역사적진실과 서술적 진실, 영문학 박사로 3개의 코믹소설과 5개의 극작품을 가진 비평가이자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토퍼 볼라서(Christopher Bollas, 1982: 주㈜: 참고)의 대상의 그늘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써 문학평론가인 센 골드(Shengold, 2000: 주㈜: 참고)는 그의 저서 영혼의 살인라는 책에서 세계적인 작가들의 어린시절과 그들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으로 높은 평판을 가지고 있다.

한 때 영국의 속담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라는 금언으로 영국의 유명한 명문대학 진학학교인 이튼(Eton) 학교의 매질이 사랑의 매로써 유행을 했었다.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영국의 상류층 부인들이 그들의 어린이들을 인도인의 보모에게 맡기고 사교파티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보모의 손에서 성장한 어린이들의 학대와 양육의 문제점들이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지적되어지게 된 것이다.

찰스 디킨슨, 뚜르게네프, 체홉, 키프링, 스윈분, 죠지 오웰 등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어린시절과 작품들의 정신분석학적인 논평에서 드러나고 있다. 위의 6명의 작가들은 어린시절에 학대와 방치 때문에 그들의 마소키즘적인 상상들이 따라왔고 영국 공립 학교에서 매질을 교육의 열정으로 판단을 했다. 얻어맞기를 원하는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서 학대자를 동일시하는 제국주의에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Shengold, 1999: 주㈜: 참고).

고통을 바로 즐거움, 감미로움으로 표현하는 마소키즘적인 집착을 지적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죠지 오웰(George Orwell)은 어린시절의 학대의 피해자였다. 소설 1984년은 학대받은 어린시절의 섬세한 묘사로 8살 때 이튼 기숙사 학교에서 12살 때까지 무조건 복종으로 오줌싸개로 본명은 에릭 블레어로 부적당하고 죄의식이 많았다. 영국의 이튼 학교의 매질은 소설 1884년은 1949년 6월에 출판된 작품으로 고통을 즐거움, 감미로움의 마소키즘적인 작품으로써 주인공 윈스턴은 자신을 학대하는 형님을 극진하게 사랑을 하게 된다 학대의 대물림으로 가해자인 오브리언은 원스턴의 목을 졸라서 의식을 잃어 회복의 순간에 오브리언에 세뇌가 된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다시는 우정을 나눌 수가 없다, 살아서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미소, 웃음,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공허해질 것이다 과거의 소멸이다(Shengold, 1989).

러시아의 작가 체홉은 그가 8살 때 집안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다. 매일 같이 얻어맞았다. 신부의 손에 키스를 하고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야 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신은 살아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못하다 왜냐하면 신은 죽은 사람만 다루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자아를 시체처럼 복종적으로 다룬다. 어린이의 자아 주체성을 무시한다 어린이의 모든 것을 간섭한다(Shengold, 1995).

키플링의 어린시절은 나쁜 부모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다. 그의 시와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의 보모의 손에서 성장한 인도의 원주민의 손에서 성장한 경험을 그의 작품 속에서 다루고 있다. 이상적인 부모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냈다. 학대자를 피해자가 동일시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영국 이튼 학교의 매질은 전통으로 유명했다 영국 상류층 젊은이들에게 야심적 성격을 가지도록 만들어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영국의 작가 밀턴이래 영국에서 가장 현학적인 시인 테니슨 이후에 최고의 시인으로 존경을 받았던 키플링은 해군제독인 아버지의 아들로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로 매혹적인 매질을 상상할 때 매를 얻어맞는다. 매질을 당한 후에 조커 술을 마시고 침착하게 근친상간에 집착을 한다.

센골드는 그의 저서 영혼의 살인에서 어린시절에 박탈과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다른 사람을 도와줄 능력을 박탈당한다, 공감 능력이 없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당한다 라고 노트를 하고 있다. 사랑의 부족공감의 부족 그리고 죄의식과 자아 미움으로 자아가 파괴로 흘러간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4년을 쓴 죠지 오웰 그리고 작은 도리틀(Little Dorrit)을 쓴 찰스 디킨슨 그리고 제 6 병동을 쓴 체홉은 그들이 어린시절에 폭군적인 아버지로부터 규칙적으로 구타를 당했던 천재들이었다. 6 병동은 미침에 대한 이야기, 현실 착각의 탐색 그리고 병리학적인 연구와 과학적인 정확성을 평론가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다. 주인공 코브린은 구세주 상상을 한다, 양아버지 안드레이는 하느님과 천사의 상상이 된다. 양부에 의해서 호모섹스로 여성이 된다, 양부를 미워한다. 놀이는 금지되고 아침, 저녁에 교회에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한다 난로가 없은 교회에 참석을 해야 했다 라고 어린시절의 학대를 기술한 것이 지적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학 작가들과 작품들은 작가로서 정신분석가들의 손에서 등장하게 된다. 정신분석이 문학과 통합되어져서 작품과 작가들의 인물들의 논평의 묘사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사회학이 정신분석에 첨가되면서 베른필드(Bernfeld)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논쟁을 들고 나와서 러시아의 철학자인 유리네트(V. Yurinets)와 함께 프로이트-마르크스(Freudo-Marxism)의 철학을 탄생시켰다. 이 철학이 프랑스로 이동을 해서 20세기 후반에 프로이트-마르크스의 철학이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들의 핵심 인물은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인 리꼬에르(Ricœur), 라깡의 정신분석 그리고 심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평론가인 미첼 푸코(Michel Foucault)의 후기구조주의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법학이 정신분석에 들어오면서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과 출신이자 정신분석학자인 길리언(James Gilligan: 1996: 주㈜: 참고)이 교도소에 들어가서 30년 동안 죄수들을 정신분석으로 치료를 하면서 폭력이라는 저서로써 하버드 대학의 정신과 교수가 되었다. 무의식의 역사를 저술한 엘렌버르그(Ellenberger)는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으로 이적을 해서 범죄의 피해자들의 역동정신의학을 연구를 통해서 범죄심리학을 연구를 했다. 이들에 의해서 법의학(Forensic psychiatry)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신분석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가면서 이제는 정신분석으로 다루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신경증 치료에 국한시키면서 미래에는 정신분석의 더욱 더 연구가 정신증의 치료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라는 확실한 예견을 남겨놓았다. 여기에 많은 정신분석가 들이 도전을 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 1925년에 충동심리, 1933년에 이미 성격장애, 파시즘의 대중심리, 섹스혁명이라는 책으로 정신분열증 환자가 치료되어질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가장 과격한 정신분석가였다. 그는 독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치료센터를 열었다 이후에 나치의 박해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회주의에 심취되어 사회주의의 정신분석가의 운동을 하다가 매카시쯤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어 사망한 천재였다.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어네스트 심멜(Ernest Simmel)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 도전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는 카우치에서 자유연상을 할 수 없다 라고 선언하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를 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가서 캔사스의 메닝그 클리닉에서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고 치료를 하다가 L.A.에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고 정신분석 치료를 했다. 그의 치료 기법이 뉴욕의 정신분석가들에게 수용되어 카우치가 아닌 서로 마주보는 치료 기법으로, 자유연상이 아닌 문답식 대화 치료 기법을 진화하게 된다. 이어서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중상류층의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를 했다. 비엔나 대학 인문학부 출신의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이 어린이들의 정신분석 치료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어른들의 치료에는 적당하지만 어린이들 치료에 부적당한 것을 발견하고 어린이 정신분석 즉 소아정신분석을 개발한 것이 바로 대상관계 이론이다. 페비안(Fairbairn)(Grotstein, 1994: 주㈜: 참고)은 고아원 출신들과 비행청소년의 치료를 하다가 그들의 치료를 정통정신분석으로 치료가 어렵다 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아분열치료 기법들 고안하게 된다. 정신과의사출신의 정신분석가인 코호트(Kohut, 1987: 주㈜: 참고)가 심각한 성격장애자, 변태성욕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면서 공감을 통해서 환자의 내면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자아심리학을 개발하게 된다.

정신과의사출신의 정신분석가인 컨버그(Kernberg, 1997: 주㈜: 참고)가 멜라니 크레인과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마가레트 몰러(Margaret Mahler: 1975: 주㈜: 참고)의 분리와 개인화의 이론을 통합해서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치료 기법을 고안해냈1. 정신과의사로서 정신분석가가 된 하리 스틱 셀리번(Harry Stack Sullivan)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사회, 문화적인 요소가 빠진 것을 지적하면서 대인관계 정신분석을 창조해서 미국에서 약물이 없이 정신분열장의 치료의 제 1 세대가 되었다. 위와 같은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과 이론을 고안한 사람들로써 정신분석학파에 소속 되어있다. 그들은 정신분석이라는 말에 정신분석 심리치료 혹은 집중적 심리치료 혹은 역동학적 정신분석 치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제 정신분석가로써 정신분석학의 단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독자적인 새로운 치료 이론을 개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려보자.

정신과 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되었다가 정신분석의 단점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너무 많은 점을 감안해서 새로운 치료 기법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남아공으로 이민을 한 게스탈트 심리치료를 개발 피처 벌(Fritz Perl)이다. 그는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인 감정에 초점을 맞춰서 감정을 행동으로 직접 표현을 하도록 한다. 빈 의자 기법으로 그 위에 대상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분노, 노여움 적대감정을 신문지 혹은 주먹으로 소파를 치거나 울거나 통곡하게 하는 기법을 사용해서 감정의 직접적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 짧은 기간에 치료의 극대화를 시도를 했다. 정신분석에서는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을 하게 되면 폭력을 배우게 된다고 금지하고 있다. 이것을 acting ou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게스탈트 치료는 단 기간이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다고 주장한다. 치료자는 한번씩 감정을 표현할 때 게스탈트의 기법을 사용한다.

예일대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인 아론 백(Aron Beck, 1985: 주㈜: 참고)이 정신분석을 하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에서 반발해서 인지치료를 개발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인지치료를 재개발한 것이다. 인지라는 말(cognitive)라는 말은 그리스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인지치료와 행동치료를 통합해서 인지-행동치료 센트를 세우고 치료를 하게 된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치료 심리학을 공부하고 신 프로이트(Neo-Freudian) 학파의 영향으로 정신분석가가 된 앨버트 앨리스(Albert Ellis)는 감정과 이성을 통합한 새로운 감각 이성 치료(RET)이론과 기법을 개발하게 된다. 그가 1960년대 프린스턴 대학의 특별강연에 초대를 받았을 때 그가 강연 제목이 자위행위를 합시다 라는 제목 때문에 특강이 취소된 일화가 있다. 1960년 초반기에는 미국의 섹스 치료의 대가인 마스트와 존슨(Masters & Johnson)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멕길(McGill) 의과대학 졸업후에 정신과의사로 에릭슨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정신분석가 되었다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수정해서 대인관계의 다자관계 분석으로 교류분석을 창조한 에릭 번(Eric Berne)이 있다. 그는 성인의 자아어린시절의 자아 그리고 부모님의 자아 3개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치료 이론과 기법으로 다자관계 분석 혹은 교류분석(Transactional Analysis)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예일 의과대학 교수로써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써 가족 치료사가 된 데오도어 리즈(Theodore Lidz, 1985: 주㈜: 참고)가 있다. 그는 17명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구성원들과 17명의 건강한 가족구성원들을 7년동안 연구를 해서 발표한 유명한 가족 치료의 논문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정신과의사로 미국에 이민을 와서 펜실베니아 정신건강 치료 센트에서 정신분석가로써 가족치료 이론과 기법을 개발한 이반 보조르메니-나지(Ivan Boszormenyi-Nagy)와 그의 제자로써 가족치료와 결혼 치료 기법을 개발한 가족치료사 제임즈 프라모(James Framo,1985: 주㈜: 참고 )가 있다.

역시 가족 치료사로써 전략치료이론과 기법을 개발한 제이 헬리(Jay Haley, 1991: 주㈜: 참고)가 있다. 그는 미국의 정신과의사로서 최면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밀턴 에릭슨(Milton Erickson)의 최면치료 기법을 연구해서(Eric Erikson)과 다른 사람) 그의 치료기법에 대해서 4권의 저서를 쓴 메릴랜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서 최면 기법으로 가족치료 이론을 고안한 사림이다. 그는 그 환자의 종합적인 분석을 완료한 이후에 전략을 짜서 환자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서 빠져나오면 변화를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전략적 치료 이론과 기법을 고안한 장본인이다,

그 환자가 자신이 변화된 것을 느끼고 알게 되면 다시는 그 함정 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는 밀턴 에릭슨의 최면치료 기법을 가족치료에 응용한 것이다(필자는 대학원에서 가족 치료를 전공하면서 전략치료 기법을 전문적으로 공부를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한 정신과의사인 미누친(Mimuchin: 주㈜: 참고)이 미국에 이민으로 헬리(Haley)에게 가족치료를 전수를 해서 펜실바이나 의과대학에서 구조적 가족치료의 이론과 기법을 창안을 했다.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학을 공부를 했다가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의 치료 방법을 고안한 윌리엄 그레져(William Glasser)가 있다. 그는 치료심리학과 정신의학의 학위를 가지고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다가 과거에 대한 강조에 반대해서 현실 치료(Reality Therapy)를 고안한 사람이다. 그는 탈정신과 운동으로 정신병은 사회적인 적응의 문제로써 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약물을 사용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을 지고 현실에 적응에 초점을 맞춘 사람이다(2022, 1, 9: 위키피아).

상담 심리학칼 로저스(Carl Rogers)가 시카고 대학에서 1945년에 카운슬링 센터를 새우고 학교 학생들의 문제들에 의과대학의 졸업을 하지 않고서도 학생들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으로 상담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를 창조를 했다. 그는 정신분석가인 오토 랭크(Otto Rank)의 지도를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상담심리학은 대학에서 상담 심리학 박사들을 배출하게 되고 주로 초, 중, 고, 대학에서 카운슬러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기법은 가족상담(family counseling) 혹은 부부상담(couple counseling) 등으로 확대되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로저스는 특별히 오디오 녹음과 비디오 테이프를 이용해서 상담의 기법을 개발한 개척자이다. 그는 그의 치료 기법을 모아서 인간중심 심리치료(person center therapy), 인본주의 심리치료 라는 독특한 치료이론과 기법을 창안을 했다.

행동치료는 정신분석과 완전히 다른 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심리학이 과학으로 등장한 것은 1879년이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분트(Wundt)가 모든 학문은 수학, 물리학, 화학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돌풍으로 독일의 물리학회를 창설한 헤몰츠의 조수로 있다가 라이프지그(Leipzig)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하면서 실험실에서 감각과 지각을 수학적으로 측정을 한 것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음을 수학적으로 측정하고 심리학 교과서를 쓰고 실험을 했던 것에서 심리과학이 등장한다.

행동치료는 정신분석과 완전히 다른 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심리학이 과학으로 등장한 것은 1879년이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분트(Wundt)가 모든 학문은 수학, 물리학, 화학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돌풍으로 독일의 물리학회를 창설한 헤몰츠의 조수로 있다가 라이프지그(Leipzig)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하면서 실험실에서 감각과 지각을 수학적으로 측정을 한 것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음을 수학적으로 측정하고 심리학 교과서를 쓰고 실험을 했던 것에서 심리과학이 등장한다.

한편으로 미국의 실험심리학은 1904년에 러시아의 생리학자인 파브로브(Ivan Pavlov)의 조건학습이 실험실로 들어오면서 분트의 감각과 지각 그리고 조건학습이 첨가되면서 자극- 반응 심리학(S-R심리학)이 등장하게 된다(수학을 통해서 관찰하고 측정하고 데이터화로 심리학이 과학이 된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개는 고개를 주면 위에서 침이 나온다. 즉 본능적으로 개는 고기를 보면 침이 나온다. 음식과 침은 뇌에서 이미 본능적으로 신경 회로가 연결되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개의 위에 구멍을 내서 입에서 나오는 침과 위에서 나오는 소화액을 측정한다 기초인 데이트를 수집한 후에 빛 혹은 벨 소리를 들려준 0.5초 후에 고기를 제공을 반복했을 때 빛, 벨 소리에 침을 흘리는 것으로 빛(벨소리)과 침의 새로운 연결로 뇌의 신경회로가 연결된 것이다(기초적인 침의 양과 반응이후에 생산된 침의 양은 새로운 학습의 증거가 된다).

이것은 학습뇌에서 기존의 신경 회로에서 새로운 신경회로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우리가 배운다는 것 즉 학습은 뇌 안에서 새로운 신경회로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 논문을 파브로프가 1904년 국제 의학 총회에서 발표를 함으로써 노벨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험실의 심리과학이 심리치료로 등장하는 데는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시카고 대학 심리학 박사인 존 왓트슨(John B. Watson)이 1913년행동주의자가 본 심리학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드디어 1920년에그는 파브로브의 조건학습을 이용해서 어린이 공포증의 발생 원인과 결과 그리고 탈 조건학습으로 어린이의 공포증의 치료의 실험결과를 발표를 했다. 이것이 바로 꼬마 엘버트(Little Albert)라는 실험 논문이었다.

9개월된 아기인 엘버트에게 에게 흰 쥐를 보여주었다. 어린이는 쥐를 가지고 놀았다. 이후에 쥐를 보여줄 때마다 꽝 소리를 냈다. 여러 번 반복하 후에 엘버트는 쥐에 공포증을 보였다. 이번에는 흰색의 토끼, 털가죽 등의 물건들에 공포증을 보였다(자극의 일반화가 형성). 공포증은 바로 놀램을 배운 것이다.

왓트슨의 공포증 실험에 흥미를 가진 심리학자인 마리 코브 존(Mary Cover Jones)이 왓트슨의 실험을 공포증 제거실험을 제의하면서 두 사람이 3살된 피터(Peter)라는 꼬마 소년이 흰 토끼 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탈조건화 실험을 했다. 그에게 과자를 주면서 멀리서 흰 토기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놀래지만 점차적으로 과자를 주면서 점점 가까이 가도록 해서 토끼를 만지게 하고 결국을 토끼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이것을 꼬마 피터(Little Peter)의 탈 조건화 실험으로 좋아하는 음식을 두면서 두려움의 위계를 만들어서 조금씩 다가가도록 해서 공포증을 제거를 한 것이다. 그녀는 이 논문을 1924년에 두려움에 대한 실험실 연구: P군의 사례를 발표하면서 치료 사례로 공식적으로 제출을 했다. 이것을 점진적, 조직적 감각 박탈이라고 부른다(systemic desensitization). 그녀는 버클리 대학으로 발달심리학 교수가 된다.

그녀의 실험 연구는 잠잠해졌다 드디어 1960년대에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 된 남아공의 군의관인 조셉 울프(Joseph Wolpe)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군인들의 심리적 상처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을 치료하면서 정신분석의 무의식적인 탐색이 비효과적이다 라는 것을 간파하고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찾게 되면서 실험심리학에 흥미로 마리 커브 존의 탈 조건 학습의 실험을 재발견하고 감각박탈에 관심을 가지고 짧은 시간에 치료효과를 확인한 것이었다. 그는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행동치료 기법으로 버지니아 대학에서 교수로써 다양한 행동주의 심리치료 기법들을 고안해서 1969년에 행동치료의 실제라는 저서를 출판하게 된다.

그는 쌍방적인 억제 방법을 고안을 했다 불안은 자신감이 없을 때 올라간다 고로 만약에 자신감과 긴장 이완은 불안에 서로 반대가 된다. 자기 주장훈련을 하면서 긴장하고 불안이 상승할 때 긴장 이완화 근육이완을 병행하면 서로 반대가 되기 때문에 불안과 긴장이 중화되어 감소되어진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긴장이완의 방법 그리고 자신감의 회복으로 자기주장 훈련이 유행을 타게 되었다. 행동 치료학은 공포증 치료에 효과적이다 라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그런데 리틀 엘버트리틀 피터의 실험은 이미 1905년에 프로이트의 리틀 한스(Little Hans)의 논문에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정신분석가들은 주장을 한다(Mann,1997: 주㈜: 참고). 5살 꼬마 남자 어린이가 말 공포증으로 외출을 싫어하고 엄마에게 매달리게 된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제자로써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있던 꼬마의 아버지가 프로이트의 조언으로 거세불안(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경쟁심, 분노), 어머니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머니에게 매달리게 된 것을 이용해서 성공적으로 치료한 것을 프로이트가 논문으로 출판해줌으로써 꼬마 한스이 논문으로 최초의 공포증 치료의 논문이 된다.

이 논문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꼬마 소년의 세 사람관계의 상호관계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이것이 가족 치료의 시발점이 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Slipp, 1984: 주㈜: 참고)

위에서 소개한 다양한 치료 이론과 기법들은 정신분석의 단점을 수정해서 새로운 치료기법과 이론을 고안한 치료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치료이론과 기법정신분석과 구분하지 위해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고로 정신분석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장되어 묻혀 있는 심리치료라는 전문용어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심리치료라는 용어는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보다 8년 일찍 등장을 했지만 그대로 사장이 되어 죽은 전문용어정신분석과 구분되어 차별화를 시도하는 치료사들에 의해서 심리치료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치료와 상담심리를 공부할 때 교과서로 등장하는 심리상담과 심리치료 하는 교과서에는 심리치료 안에서 세분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Jung)의 분석심리학, 에들러의 개인심리학, 가족치료학, 행동치료학, 인지 행동치료학, 게스탈트 치료학, 다자관계 분석치료(교류분석), 감성이성행동 치료(REBT), 최면치료, 사이코드라마 치료 등의 23개의 치료들이 소개되어진다.

여기에다 미국에서 등록된 정신분석학교가 약 50개정도이고 그리고 영국에는 약 100개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영국의 정신분석 학교의 대표적인 대학이 타비스톡(Tavistock Institute)정신분석학교이다.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모집할 때 반드시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전공하는 학생들을 모집한다. 더 붙여서 미국의 종합대학에 설치된 정신분석 대학원뉴욕대학원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정신분석 학생들을 모집할 때 반드시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전공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집한다는 요강을 발표한다. 미국의 대도시에서 미니 전문대학원으로 운영되는 정신분석 학교들이 학생들을 모집할 때 요강으로 정신분석심리치료를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으로 모집을 한다.

고로 이제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구분은 어떤 특정 이론의 효과를 평가를 할 때 순수한 치료기법으로 한정된 것 이외에 일반 치료사들이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치료사들은 위에서 소개한 23가지의 치료 기법들의 장점들을 흡수하고 자신의 치료 기법으로 개발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치료자(필자)는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의 소개에서 이론적인 면들 뿐만 아니라 실제 치료에서 어떻게 치료에 응용하고 분석하고 치료의 성공으로 이끌어가는가? 보여주기 위해서 한 개의 토픽 말미에는 반드시 치료의 실제에서 성공한 사례 혹은 실패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래의 사례는 치료자가 40년전에 미국에서 인턴십(halfway house에서 2년 동안 근무)을 받고 있을 때 한 한국인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를 1년 동안에 치료를 한 사례이다.

 

정보원이 나를 미행하고 감시를 합니다

대상: 미국에서 영주권을 가진 30대 중반의 J씨

증세: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정신분열증(조현병) 치료를 받은 바 있음

진단: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진단됨

연결: 치료자가 미국에서 인턴을 받고 있던 정신치료 센터에 입원을 해 있었던 30대 중반의 한국인 남자.

치료 기간: 1주일에 3회씩 1회에 2시간씩 1년 동안 심리분석 치료를 받았음

치료 결과: 증세가 상당히 호전되어 한국에 있는 부인과 자녀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나 치료자가 귀국하는 바람에 치료를 중단했음

 

치료의 과정

J씨는 미국에 이민을 와서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정신분열증(조현졍)으로 생산직 근로자로 있다가 직장을 잃고 정신병원을 전전하고 있었다. 가족은 부인과 5세된 아들이 있는데 부인은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없다고 했다. J씨는 치료자가 근무하는 정신치료 센터에 입원한 한국인으로써 치료자의 돌봄을 받으면서 치료자와 1주일에 3회씩 1회에 2시간씩 약 1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J씨는 분석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막내로 자랐으며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겨우 나와서 중학교는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고 했다. 더구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J씨는 갈곳이 없어서 이붓 아버지 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놀고 있던 차에 그 당시에 큰 누나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서 누나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몇 년이 지난후에 누나가 이민 가족을 초청하는 미국 이민 케이스로 미국에 건너오게 되었고 영주권을 얻어서 미국에 살 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J씨가 20대 후반이 되던 어느 해에 누나가 한국에 나와서 동생의 배우자를 물색하던 중에 명문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있던 여교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가정을 꾸미고 아들을 낳아서 아들이 3세 정도 되었을 때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다고 했다.

치료자의 분석에서 J씨는 친밀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부인과는 중매로 한국에 나와서 몇 번 만나고 결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결혼 때부터 부인과는 친밀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부인은 결혼을 할 때 남편 되는 사람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영주권자인 남자라고 하는 J씨의 누이의 말에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결혼을 했었다 라고 J씨가 부인의 불평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 치료자가 알 게 되었다. J씨는 부인과 결혼 후에 3년 동안에 어떻게 친밀감을 형성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즉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집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면서 집에 오면 부인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해소하지 못하고 자기 방어로써 부인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인과 잠자리를 멀리하고 부인을 의심하면서 부인을 구박하다가 의처증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정작 이혼을 먼저 주장한 사람은 J씨였다는 것이 이것을 입증해준다.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 수 없다면서 이혼을 주장했고 아들을 낳아서 3살이 되는 해에 부인은 할 수 없이 가족도 친구도 없는 미국 땅에서 외톨이로 버티다가 결국은 이혼에 도장을 찍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는 것을 J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게 되었다.

J씨는 자녀가 태어나자 자녀와 친밀관계 문제 때문에 문제가 더욱 가중된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녀의 출산 후에 부인과 자녀를 멀리 했고 자녀에게 어떻게 대해야할찌를 몰랐다고 실토하는 J씨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이후에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동료들이 자신을 해코지 하려고 한다망상적 믿음 그리고 FBI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말을 하다가 직장의 보스에게 알려지게 되고 직장의 보스가 J씨를 심리치료 전문가에게 심리검사를 해 본 결과 정신분열증으로 판명이 되면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권고했고 J씨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직장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정신병원에서 6개월 정도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입원해 있다가 마음이 안정되자 퇴원을 했고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김포 공항에 착륙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고 했다.

비행기 옆자리에 타고 있던 어떤 신사를 CIA 요원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고 있다고 비행기 스튜어디스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스튜어디스가 J씨를 비행기 안에서 보호해주게 되었으나 공황에 나오면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여권을 전부 찢어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다가 결국 파출소에 찾아가서 자신이 미행을 당하고 있으니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고 했다.

경찰이 J씨가 정신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정신병원에 인계했고 J씨는 정신병원에서 미국에 있는 누나와 연락을 하게 되었고 누나가 한국에 와서 병원에서 1달 가량 지낸 후에 퇴원을 시켜서 다시 여권을 만들어서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미국에 입국해서 치료자가 근무하는 정신치료 센터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론적 근거

J씨는 치료자의 분석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가 친밀관계의 결함에서 생긴 문제임을 인정하였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집에서 해소되어 지지 않고 부인과의 친밀감 부족에서 오히려 긴장감이 더욱 쌓이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과 어떻게 관계를 하고 어떻게 아들을 돌보아줄지를 몰라서 가중되어 오다가 붕괴된 것이었다. 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껄끄러움을 방어로써 부인에게 자신의 문제를 투사해서 부인을 가까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을 의심해서 결국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음을 시인하게 되었다.

J씨는 그 증거로써 부인과 대화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집에 오면 서로 몇 마디 하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있었다고 했다.

부인이 남편 J씨에게 접근을 시도할 때마다 J씨는 불안이 가중되어 어쩔줄 몰랐다고 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관계 역시 친밀감에 문제가 있는 J씨에게는 힘들었. 결혼 전에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집에 와서 전자 오락 게임으로 풀었는데 지금은 집에 와서 스트레스 풀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쌓이게 되면서 동료들에게 그 스트레스가 흘러가게 되었고 동료들의 불평이 심해지자 동료들이 자신을 인종 차별한다고 자신의 문제를 투사한 것이 밝혀졌다.

J씨는 이러한 자신의 내면 문제가 결국은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음을 뒤 늦게 알 게 되었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다시 재 결합을 할 수 없겠느냐? 고 편지를 보냈지만 부인은 다시는 남편과 재결합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J씨가 자신이 잘못했으며 지금은 치료를 받고 있어서 회복할 수 있으니 지금은 5살이 된 자녀와 부인이 다시 미국으로 와서 재 결합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한국에 나가서 같이 살면 안 되겠느냐고 애원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음을 알 게 되었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J씨의 제의를 부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J씨의 비행기가 김포 공항에 다가가게 되자 비행기 안에서 편집증을 유발하게 된 것은 공항에 착륙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도발한 것이었다. 즉 스튜디어스의 도움을 받으면서 착륙하게 되었고 스튜디어스의 도움으로 공항과 세관을 통과하게 되어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의 발행 여권을 찢어 버려서 쓰리기 통에 집어넣어 버리고 자신이 CIA 비밀 요원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은 한국 땅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해서 파출소의 도움을 얻어서 잠자리를 해결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임을 치료자의 분석에서 시인을 했다.

그 당시 J씨는 서울에는 아무 인친척도 없었고 호텔이나 여관에 투숙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이후에 치료자의 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한국에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치료를 1년 동안 받다가 다시 한국에 귀국한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치료자가 한국의 대학교 근처에 가면 값이 싼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J씨가 갑자기 귀국을 선포한 것이었다. 치료자는 완강하게 지금은 귀국한 시기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만류했으나 J씨는 이제는 한국에 가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처와 아들을 만나서 한국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치료자가 부인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찾아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치료자의 말을 듣지 않고 귀국해서 대학 인근에 싼 하숙집에서 1달을 뻐티면서 부인과 면담을 했으나 차갑게 거절당하고 또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니 미국보다 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한국에서 사는 것도 자신이 없어져 낙담해서 다시 귀국하게 된 것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J씨는 이전처럼 한국에서 붕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마시 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갈 자신감을 상실했고 영어도 부족하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중병으로 살아갈 희망이 없어지자 한국에 가면 이혼한 부인과 아들이 있으니 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한국에 귀국해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치료 결과

J씨는 자신의 생각하는 사고 방식이 분열되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분열증이라는 글자 그대로 환자의 경험이 분열 되어있어서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수 없다는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J씨가 미국에서 정신분열증으로 일자리를 얻기 어렵고 이미 자신의 신상 명세서에 정신병원 입원 기록이 나와 있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장애자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J씨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나와서 정신분열증이라는 증거나 흔적이 없는 한국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하나만 믿고 아무런 준비가 없이 막무가내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가 결국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게 된 것임을 치료자의 분석으로 알 게 되었다.

두 번째 귀국에서도 치료자가 지금 한국에 가서 살 수 없으니 치료를 받아서 문제가 해결된 후에 한국에 가든지 미국에 살든지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에서 불구하고 대학교 근처에 가면 값싼 하숙집을 구할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하면 살 수 있겠다는 한가지 생각 즉 분열되어 통합되지 않는 경험 때문에 그 한가지 생각으로 행동에 옮겼기 때문에 실패한 것임을 뒤 늦게 치료자의 도움으로 깨달었으나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J씨는 다시 미국에 귀국하여 치료자의 병원에 입원을 해 있다가 치료자가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는 바람에 돌보아줄 수 없게 되었고 J씨이 심리치료는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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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으니 치료자정신분석 심리치료 홈페이지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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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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