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의 진실과 거짓 Ⅱ
메즈머가 동물 자장 이론으로써 그 당시에 귀신에 씌인 악마, 악령의 빙의 현상을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히스테리아라는 이름을 복원하고 치료법으로 자석 치료를 고안한 이야기는 전편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제 Ⅱ 편에서는 메즈머의 뒤를 이어서 어떻게 자석 치료가 최면 치료로 진화해 가는가?를 추적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메즈머는 자신의 치료가 새로운 발견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리고 그것을 만병통치약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패를 했다는 것을 지적을 했다. 그의 이론의 핵심인 유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청문회의 백서 때문에 그는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름 없는 사람으로 불행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론은 그의 제자인 명문 귀족 가문의 3명의 형제들에 의해서 이어져서 자석의 힘 때문이 아니고 잠의 형태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푸이세이그 형제는 프랑스의 명문가의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군사학에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박애적인 사업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귀족들은 농노와 노예들이 일을 하고 집안을 돌보아주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다. 막내는 포병 장교로써 군대에서 자석 치료를 계속했다. 둘 째 동생은 해군 장교로 자석 치료를 했다. 첫 번째 형님인 푸이세이그(Puysegur)는 물리학 실험실을 가지고 전기 실험들을 했다. 그의 고향인 부잔시(Buzancy)에서 치료소를 개설을 했다.
그가 포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의 부하인 빅토르(Victor)라는 군인이 호흡기 질병으로 군대 연병장에서 사열 도중에 쓰러졌다. 그를 치료하면서 그가 이상한 종류의 잠에 빠져서 잠을 자는 상태에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을 했다. 푸이세이그가 흠밍으로 노래를 하는 것을 빅토르가 따라 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랬다. 그가 잠자는 현상에서 깨어나서는 기억을 하지 못했다. 푸이세이그가 하는 노래의 입술 모양을 보고 그것을 읽어서 노래를 따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잠자는 현상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인공감으로 이름을 붙였다. 빅토르가 인공잠 속에서 누나와 갈등을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빅토르를 데리고 파리에 과학 학회에 가서 직접 빅토로와의 인공 잠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빅토르는 자신을 목적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불평하는 것을 듣고 나서 퓨이세이그는 인공잠에서 나눈 대화들을 그 주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치료에서 정직하게 소통을 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그는 1805년에 치료소를 세우고 무료로 치료를 시작했다. 그의 소문을 듣고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과 군인들이었다. 그는 그의 집 앞에 크다란 느릅나무와 그 옆에 있는 우물가에 모여든 환자들을 위해 집단 치료를 시작했다. 나무에 밧줄을 걸고 환자들이 자신의 상처 부위를 연결해서 발짝을 일으키게 했다. 300명의 환자들이 1달 만에 62명이 치유가 된 것을 발표를 했다.
메즈머에 의해서 시작된 자석 치료는 이름을 바꾸어서 인공잠이라는 이름으로 메즈머의 치료가 재점화 된 것이었다. 푸이세이그는 인공감의 치료에서 200명 이상의 제자들을 양성을 했다. 그들에게 치료 경험의 보고서 작성을 의무화 하고 그리고 그것을 사회단체에 제출하도록 했다. 슈퍼비전을 받아서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그리고 치유되어진 연간 보고서를 출판을 했다. 여기에서 메즈머 제자들과 푸이세이그 제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정통파(자석 치료) 대(vs) 비정통파(인공잠)의 갈등이 생겨났다. 메즈머 지원 단체인 하모니라는 이름의 사회 단체가 자석 이론가들의 훈련과 아울러 자선 단체를 만들어서 서로 대립을 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들의 멸망을 가져왔다. 푸이세이그는 2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석방되어 시장으로 당선되어 계속해서 그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몽유병과 정신 이상자들을 치료하는 쪽으로 확대 시켰다. 1812년에 폴투갈의 신부인 아베 파리아(Abbe Faria)가 파리에서 자장 이론은 자석의 힘이 아니고 그 주체가 핵심임을 밝혔다. 그는 그 주체를 의자에 앉히고 잠을 자라라고 명령을 함으로써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마술로 오인되어 조롱을 받고 퇴장을 했다.
프랑스의 해군 장교인 노이제(Noizet)가 파리아의 시범을 관찰하고 연구를 해서 이후에 낸시 학교의 라보(LieBeault)에게 전수가 되었다. 1810년에 들레즈(Deleuze)가 교과서를 쓰고 신비화를 벗겨냈다. 이것을 인공 몽유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의사이자 엔지니어인 베르틀란드(Bertrand)가 이것에 대한 과학적인 탐색을 시작을 했다. 1843년에 영국 만체스터의 외과 의사인 브레이드(Braid)에 의해서 인공감, 인공 몽유병 등의 이름은 최면으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최면의 hypnosis는 그리스의 잠의 여신 히포노(Hypno)의 이름을 따서 최면催眠)(암시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잠자는 상태-다음 백과 인용)이라는 이름의 신조어로 통일이 되었다(Ellenberger, 1970: 주㈜: 참고).
최면으로 본격적인 히스테리아 환자들에 대한 치료 연구가 책으로 출판되어지면서 최면의 신비가 하나씩 벗겨지게 된다. 독일 안에서 번창을 했던 특별한 주체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카타리나 에머리치(Katharina Emmerich) 그리고 프레드릭 하우페(Friedericke Hauffe) 만큼 유명하게 된 사람은 없었다. 카타리나 에머리치(Katharina Emmerich(1774-1824)는 웨스트필리아 (Westphalia)의 둘멘(Dulmen) 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이고 과거에 수녀였다. 그녀는 예수의 성혼(예수의 상처 받은 십자가의 흔적)으로 스스로 성녀라고 불렀다. 클레망 베르타노(Clemens Berntano)라는 사람이 그의 과거의 삶을 결별을 하고 그 스스로 그 성녀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둘멘(Dulmen)에 정착을 했다. 1819년부터 1824년에 그녀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강직증(긴장성 균열장애-정신분열증), 강경증적 상황(cataleptic states) 안에서 카타리나(Katharina)는 그리스도의 성혼(예수의 십자가의 상처의 흔적)을 스스로 체험하고 예수의 고통을 경험을 했다. 매일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성찬식의 해의 순환에 의해서 규칙적인 순서로 서로서로를 따라 오는 꿈들을 매일 밤 그녀가 꾸었다. 더구나 그 꿈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보여주었다. 베르타노(Bertano)는 매일 아침 카타리나(Katharina)를 방문을 했고 그녀가 그에게 그들을 기술할 때 그녀의 꿈들과 본 것들 것 글로 받아 적었다. 이 자료를 가지고서 그는 두 권의 책들을 만들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의 윤색된 작품은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계시들이 실제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믿게 만들었다(Ellenberger, 1970).
또 다른 주체인 프레드릭 하우페(Friedericke Haufe)(1801-1829)는 한 사람의 성자가 아니고 여자 예언가였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치료 사례 논문으로 출판한 사람이 바로 역동적 정신의학의 첫 번째 등장 인물인 자스틴 케르네(Justine Kerner)이다. 그는 시인이자 의사로써 선구자들의 자석 치료 이론을 과학적으로 탐색하고 연구를 하기 시작한 최초의 명망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신비함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그의 집 주변에 정신이상자 수용소가 있었다. 12살 때 자석 치료사에 의해서 그의 신경증을 치료를 받았다. 1819년에 시립 병원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시인으로써 다양한 이름난 시인들, 철학자들, 작가들 그리고 모든 계급들의 명사들을 포함을 해서 격의 없이 만남을 가지는 대화주의자였다. 그는 왕과 왕자들도 참가해서 대화를 나누도록 클럽을 조직했다. 메즈머를 추적해서 그의 만년의 삶을 연구하고 기록한 사람이었다.
그의 치료는 웨인즈베르그(Weinsberg)의 여성 예언자라는 이름을 가진 프레드릭 하우테(Friedricke Haute)의 성혼(예수의 상처 받은 십자가 상처의 흔적이 자신의 몸에서 등장)의 치료 사례를 “프레보스트의 여성 예언자”라는 책으로 출판을 했다. 그 여성 예언자는 농장 주인의 딸로써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경 책과 찬송가로써 성장을 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환상을 보았다. 19살 때 부모가 원하지 않는 강제 결혼에서 병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존경하는 목사가 사망했을 때 그의 영혼을 장례식에서 보았다. 죽은 설교자와 함께 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신체적인 질병이 심각했다. 발짝, 경직, 출혈, 열병 등이 빈발했다. 의사들의 치료와 약물 치료가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의사인 케르네를 찾아왔다. 케르네 집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 약물 치료는 실패를 했다. 자석 치료에 의존해서 조금씩 개선이 되어갔다. 자석잠에 취할 수 있었다. 케르네는 그녀를 철저하게 탐색하고 기록을 했다. 그는 과학자들과 신학자들과 함께 그녀의 증세들과 그녀의 행동들을 논의하고 토론을 했다. 그리고 조직적인 실험을 했다. 그녀의 예언들을 철저하게 탐색을 했다. 그녀는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음악적인 근엄한 목소리와 순수한 독일어의 말들을 분석을 했다.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는 능력의 증거들 예를 들어서 개인적인 문제들과 일반적인 문제들로 분류를 해서 조직적으로 연구를 해 나갔다. 그는 야곱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당시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은 밴 슈버트(Von Schubert), 철학자 데이비드 스트라우스(David Strauss) 등이 케르네를 방문하고 논의에 참가를 했다. 그녀의 사망 후에 케르네는 “프레보스트의 여성 예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을 했다. 이 책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출판을 했다. 그의 분석에서 그녀의 행동이 조직적으로 분석되어졌다. 그의 저서는 역동적 정신의학의 첫 치료 사례 연구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무의식의 신비로운 기능들의 수행과 기록들로써 그리고 치료적 관찰과 실험의 주체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철학에서 분리시켜 객관적으로 실험하고 그리고 관찰 위주로 기록해 나간 점이 이전의 치료들과는 구분이 되었다. 케르네는 이후에 종이 위에서 잉크 방울을 떨어뜨려서 종이를 접어서 나타나는 그 모양을 정교화하고 시를 썼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발상은 이후에 허만 노샬(Herman Rorschach)의 로샬 테스트(잉크 반점 검사)의 원조가 되었다(Ellenberger, 1970).
1840년 이후에 자석잠에 대한 흥미는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퀨비(Quimby)는 자석잠의 치유의 실체를 제시라고 밝혔다 그리고 마음의 치료로 권장을 했다. 1841년에 영국의 만체스터의 외과 의사인 브레이드(Braid)가 유체 이론을 거부하고 뇌 생리학적으로 그리고 파리아(Faria)의 기법을 수용해서 드디어 1843년에 유체 이론 혹은 자석잠, 인공잠을 최면(hypnosis)(催眠) 이라는 신조어를 발표를 했고 이후에 최면으로 대체되어지게 되었다. 이어서 영국의 외과 의사인 존 엘리오스톤(John Elliostson)이 인도에서 환자들에게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최면으로 수술에 성공을 보고를 했다. 1840-1850년의 10년 동안에 등장한 동물자장 이론에 대한 논문집이 9개로 자석잠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메즈머가 사망 후 35년이 되는 그의 출생일인 1850년 5월 23에 메즈머 학회가 결정이 되고 그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축제, 음악회, 연회, 연설들이 실시되어지게 되었다(Ellenberger, 1970).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유행했다가 유럽으로 펴지게 된 심령술과 영혼주의의 등장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치료자(필자)가 역동적 정신의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과거의 의술인들의 치유의 과정들을 살펴보고 소개를 하는 이유는 역동적 정신의학이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간다는 면도 있고 그리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인간의 마음의 신비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유행하고 있는 사건과 이야기들이 이미 서양에서는 150년 전에 통과 의례로써 경험을 하고 밝혀진 것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840-1850년 사이에 심령술사의 이야기들과 영혼주의가 미국에서 유행을 했다가 이것이 유럽으로 이동이 되면서 한 때 유행을 했었다. 신대륙인 미국은 교육의 수준은 높았다. 대신에 상류층은 부재했다. 종교적인 분파들이 많았다. 설교들과, 집회들이 증가 했다. 엔드류 잭슨 데이비드(Andreu Jackson David)는 이러한 심령술에 대한 저서를 출판을 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조그만 소도시들의 정보가 상상력의 불씨에 의해서 번져가는 산불처럼 전염이 심했다고 노트를 하고 있다. 광신적으로 사소한 사건들이 증폭 되면서 심령술과 영혼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영혼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가 황홀함과 결부되어 영혼주의의 확대를 가져온 것이라고 분석을 했다.
예를 들어서 1847년에 뉴욕의 한 남자가 그의 집에서 신비스런 소리들에 고통을 받아서 그가 존 폭스(John Foc)라는 농부의 가족에게 그의 집을 맡기고 떠났다. 그 농부는 부인과 12세, 15세의 두 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농부는 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테이블 들이 공중에 떠 돌아다니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고 소문이 나돌았다. 부인과 그의 딸들이 가는 곳마다 노크 소리를 달고 다녔다. 죽은 영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1850, 2월에 뉴욕의 한 신문에서 이 사건들이 보도가 되었다. 심령술사들의 집회, 소책자 그리고 논문들과 집회들이 소개가 되었다. 1852년에 심령술의 움직임이 대서양을 건너서 영국과 프랑스에 침투를 했다. 1860년에는 심령들, 영혼들이 눈에 보인다고 사진을 찍었다, 무당들과 매체들 그리고 손들의 모양들의 사진이 찍혔다고 보도들이 난무했다. 앉아 있는 피아노가 공중에 떠 올랐다, 아무도 없는데 아카디온과 하프가 연주되고 있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유행을 했다. 이 시점에서 찰스 리체(Chales Richet)에 의해서 유사 심리학(para-psychology)이 등장을 하게 되었다(Ellenberger, 1970).
이러한 심령술과 영혼주의는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관찰과 실험적인 분석으로 연결되어졌다. 심리학자들과 정신병학자들이 이들의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심리과학의 연구로 연결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역동적 정신의학의 역사가들은 노트를 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수행자들의 감추어진 생각들의 의해서 지시, 감독되어진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인간의 마음의 무의식적인 마음의 모델로 진화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네바의 플로우니(Flourney)는 위의 이러한 현상들을 기록하고 관찰을 해서 천리안, 영혼주의, 심령술, 전생, 환생 등의 대표적인 여성 예언자인 헬렌 스미스(Helen Smith) 양을 4년 동안 연구해서 그들의 이러한 현상들은 잠재기억, 은제기억으로 과학적인 설명으로 분석한 연구 사례를 저서로 출판을 해서 5개 국어로 전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그의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소개).
유럽에서 최면술사의 등장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 무대에서 특별 공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기를 이용해서 공연과 결부되어 도시 곳곳으로 돌아 다니면서 최면을 공연을 하게 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한센(Hansan), 벨기 스위스, 프랑스, 이태리에서 도나토(Donato) 등이 그들이었다. 이러한 최면의 공연을 관람을 하고 최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로 저서를 출판하는 신경학자들과 정신과의사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최면에 대한 과학적인 상세한 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신경학자 하에덴헤인(Heidenhain,1889)이 한센(Hansen)의 공연들과 수행들에 의해서 인상을 받아서 1880년에 최면학에 한 개의 책을 출판을 했다. 생리학자인 찰스 라켓(Charles Richet, 1875)는 이 새로운 분야 안에서 과감하게 실험을 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 결과들은 과학 논문집에 출판을 했다. 오스트리아 안에서 모리츠 베네틱(Moritz Benedikt)이 그것을 여러 번 시도를 했다. 이러한 대중의 주의 관심이 최면에 집중되어 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당시에 그 신문들에 토픽이 되었다(Ellenberger, 1970).
대표적인 사람이 이태리의 투린(Turin) 대학에서 명망 있는 정신과 교수였던 에리카 모르셀리(Enrica Morselli, 1886)가 도나토에 의해서 공연된 최면 무대에 참석을 했다. 스스로 최면에 걸려보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에 그는 최면에 대한 책을 출판을 했다. 그리고 최면은 사기꾼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연구할 대상이라고 격찬을 했다. 영국 안에서 최면에 흥미는 유사 심리학의 문제와 연결되었다. 1882년에 메이어(Myers)가 심리연구 학회의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써 주의 깊게 최면학을 연구를 했다(Ellenberger, 1970).
최면에 대한 연구가 세부적으로 과학적인 성격을 띄게 되면서 히스테리아의 치료에서 최면사들의 치료 이론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프랑스의 파울 브리켓(Paul Briquet)으로 1859년에 그의 저서 히스테리아 치료 안에서 치유의 특징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는 자비 병원에서 히스테리아 환자들 430명의 치료와 관찰로써 히스테리아의 원인을 폭력적인 감정, 연장된 슬픔, 가족 갈등 그리고 좌절된 슬픔, 과도하게 예민함이 원인으로 밝혀냈다. 어린 시절에 환자들의 학대적인 배경의 원인들의 증거들을 보고를 했다. 그의 저서는 역동적 정신의학에서 같은 해인 1859년에 다윈의 진화론의 발표와 버금가는 것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히스테리아 환자의 특징들이 신체적인 증세들 즉 마비, 기억 상실, 무감각 등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를 해서 신체화 장애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영향력이 프랑스의 히스테리아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의 세계적인 최면학의 대가인 진 마틴 가르코트(Jean Martin Charcot)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Meares, 2000, 2005, 2012: 주㈜: 참고).
1882, 2, 13, 가르코트는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전에 3번이나 거부를 당했던 것을 극복하고 4 번째 “히스테리아 안에서 최면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다양한 신경증 증세들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읽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과학계에서 최면학을 과학으로써 수용한다는 인정서였다. 이후에 그의 영향력이 그가 돌연사(死)한 1893년까지 10 동안 유럽에 최면학의 돌풍을 몰고 왔다. 그는 그가 근무를 하고 있던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이 세계적인 최면학의 실험실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가르코트 학교 혹은 살페트리에 학교 라는 최면학교가 설립이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최면 치료가 환자들에게 치료기법으로 사용되어졌다. 1885년에 29세의 열혈청년 프로이트가 6개월의 해외 연수 장학금을 지원 받아서 레지던트 4학년 때 가르코트를 방문한 것은 이미 수 차례 언급이 되었다.
가르코트는 늦깎이 신경학자로써 1870년부터 1893년까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경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왕의 주치의였다. 그는 마차를 만드는데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지던트 때 낡은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그 당시 살페트리에 병원은 4000명-5000명의 의료 돌봄 기관으로 병명이 알려지지 않는 신경증 환자들, 거지들, 매춘부들 그리고 부랑아들의 수용소이자 보호소였다. 36세로 살페트리에 병원의 주임 의사로 발령을 받은 1842부터 8년 동안 그 병원을 세계적인 히트테리아의 실험 연구 장소로 만들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신경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히스테리아 환자(심리적인 원인)와 간질병 환자(생리적인 원인)를 구분을 했다. 그는 생리조직의 마비와 히스테리아의 심리적인 마비를 구분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히스테리칼 벙어리와 장님과 귀머거리, 그리고 관절염 등을 연구하고 발표를 했다. 살페트리에 병원의 수녀들을 정식 간호사들로 대체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내과 의사로써 그리고 해부생리학과 노인학에 대가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근육위축증을 가르코트 병으로 그리고 관절염을 가르코트 관절염으로 그리고 뇌의 수질 위축증 등의 그의 공로가 그의 이름을 따서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Ellenberger, 1970).
프랑스의 세계적인 작가인 알퐁스 도오테의 아들인 레온 도오테(Leon Daudat, 1915)는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작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가르코트의 절친한 친구로써 가르코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5개 국어를 마음대로 구사하는 천재적인 의사이자 음악가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동물 애호가로 사냥을 금지시켰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으로 모순에 참을 수 없는 독재자였다. 모순을 지적하면 노발대발해서 제자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예술가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함께 연주와 작업을 했다. 그는 사설 도서관과 박물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을 해서 풍족한 생활을 했다. 교수이자, 예술가이고 그리고 과학자였다. 실페트리에 병원은 45개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병원 자체가 거리들과 광장들과 정원들을 가지고 있었던 17세기의 황실의 거처였다. 프랑스의 정신병원의 개혁가인 파이넬(Pinel)이 정신병원의 개혁들을 성취한 장소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장소였다.
가르코트가 실험실, 검사실, 교육실, 치료실 그리고 연구실로 개조를 하고 과학의 성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眼)과학과 이비인후과가 설치가 되었다. 해부학, 병리학실과 통원 치료실 그리고 박물관과 시청각실이 개설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세계적인 신경학자인 뚤레(Toulette)(틱장애와 유사한 뚤레 장애)와 바빈스키(Babinski)(발바닥을 간질이면 어른들은 발가락이 위로 향하는데 유아들은 발가락이 아래로 향하는 것을 바빈스키 반사라고 부른다)가 있다. 그 시점에서 프랑스의 신경학자들은 모두가 그의 제자들로 채워졌다. 파리의 의학 교수직은 그에 의해서 임명되어졌다. 프랑스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2대 과학자로 파스테르와 가르코트를 들고 있다. 그는 개인박물관을 소유하고 섹스피어와 단테의 애호가였다. 화요일에는 세계적인 명사들 앞에서 최면 치료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그를 방문한 세계적인 명사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을 들었던 참가자들 중에는 프로이트, 윌리암 제임즈(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그리고 가르코트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피에르 장(Pierre Janet)(프로이트에 버금가는 20세기의 심리치료의 대가)이 있었다(Ellenberger, 1970).
그의 강의들은 학생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지고 책으로 출판되어졌다. 그는 1893, 8, 16일에 호텔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파리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예정된 강의를 통한 19권의 저서의 출판은 9권으로 종식이 되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의사가 된 아들은 아버지의 사설 도서관을 살페트리에 병원에 기증하고 그의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선원이 되었다. 가르코트의 사망으로 그의 명성은 10년 후에 잊혀졌다. 그의 수제자인 바빈스키는 가르코트가 최면과 히스테리아는 동격이라는 학설을 깨고 최면은 제시에 의해서 시작되고 설득으로 끝난다는 말로써 최면이 제시와 설득으로 그리고 카타르시스가 핵심이라고 발표를 했다. 그는 최면은 제시로 시작되고 설득으로 끝난다는 주장으로 최면은 죽었다고 경종을 울렸다. 후세에 가르코트는 마음의 심연을 과학적으로 탐색한 사람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가르코트와 함께 프랑스에서 쌍벽을 이루는 최면 학교인 낸시(Nancy School)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한 도시의 개업 의사가 돈을 모아서 자신의 고향인 낸시에서 조그만 실험실을 차리고 환자들에게 치료 비용을 내고 일반 의술적인 치료를 받을 것인지 혹은 무료로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선택을 하게 해서 무료로 이상한 치료를 하고 있는 괴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르코트와 유사한 시점에서 의과대학 내과 교수인 베른해임(Berhelm)이 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후에 베른헤임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최면에 대한 이론을 대학 교과서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가르코트 학교와 쌍벽으로 낸시학교가 창설하게 된다.
그 괴짜 의사가 바로 오그스트 암브로이 라보(Auguste Ambrose LieBeault)이다. 그는 한 농부의 12번째 아들로 시골의 의사가 되었다. 비밀리에 작은 별장을 세우고 최면 치료를 연구하고 탐색을 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최면 치료를 선언했다. 의학도로써 그는 동물자장 이론의 옛날 책을 발견하고 환자들을 위해서 성공적으로 최면 치료를 했다. 고객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서 무료로 자석 치료 혹은 유료로 일반 치료를 받도록 했다. 이후에 환자들이 급증하면서 자석 치료의 개업 의사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Ellenberger, 1970).
그는 낸시에 있는 집에 은퇴를 해서 저서 출판과 자석 치료와 유체 이론의 신봉자가 된 것이었다. 그의 치료는 관절염, 위궤양, 황달 그리고 호흡기 질병과 폐결핵 치료에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책으로 출판을 했다. 동료 의사들은 그를 돌팔이로 취급하고 무료 치료를 하는 그를 보고 바보 의사라고 비웃었다. 그는 노이제(Noizet), 베르틀란드(Bertrand)의 아이디어들을 흡수를 했다. 이후에 의과대학 내과 교수인 베른헤임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변론의학자 보우니스(Beaunis)와 변호사인 레이지오스(Leigeous)의 도움(이들은 최면 상태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이론을 구축해서 최면과 범죄를 반대하는 가르코트와 대결)을 얻어서 4사람이 가르코트 학교에 버금가는 낸시 학교를 창설하게 되었다.
라보는 낸시 학교의 영혼의 아버지가 되었다. 베른헤임은 그의 헌신적인 제자가 되었다. 베른헤임이 낸시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하루에 25명-40명의 환자들을 치료를 했다. 공개적으로 치료를 할 때 눈을 쳐다 보라 잠이 올 것이다 라고 증세 완화를 제시를 했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도시의 빈민가, 영세민, 농부들이었다. 그는 이미 1879년에 의과 대학 내과 교수로 임명되어 장티푸스, 심장, 폐의 명의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1882년에 은퇴 후에 라보의 최면학을 연구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최면학이 늙은 군인들, 공장 노동자들이 잘 걸린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주로 수동적 복종적인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잘 걸리고 부유층, 학식이 높은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최면 효과가 빈곤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최면을 의학계에 소개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Ellenberger, 1970).
1886년에 최면학 교과서를 출판을 했다. 이것이 가르코트와 갈등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히스테리아와 최면이 같은 유형으로 건강한 사람을 최면으로 마비 시킬 수 있고 그리고 마비 환자들을 최면으로 건강하게 회복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내 세웠다. 반면에 베른헤임은 히스테리아는 정신병이고 그리고 최면은 정신병이 아니고 제시와 설득에 의해서 부응한 효과로써 아이디어들을 행동화 한 것이라고 주장을 함으로써 두 학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최면은 루마치스, 위, 장, 소화 기관에 효과가 있고 특별히 신경생리적 장애에 효과가 있다는 것들은 두 학파가 공통되었다. 베른헤임은 최면 효과는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똑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최면을 걸지 않고서도 깨어있는 상태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은 1889년에 프로이트가 가르코트 학교 방문 이후 4년 만에 다시 두 번째로 낸시학교를 방문해서 베른헤임이 최면을 걸어서 치료한 환자에게 약간의 힌트를 주면서 기억해보라고 했을 때 최면 상태에서 한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것을 지켜 본 프로이트가 최면학을 포기하고 자유연상의 기법을 창안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가르코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 학교의 영향력은 급감하고 대신에 낸시 학교의 영향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제 1 회 국제 심리학 총회는 1889년에 파리에서 열렸을 때 회장이 바로 가르코트였다. 제 1 차 국제 심리학 총회는 심리학과 생리학의 혼합으로 된 학회였기 때문에 사실은 순수한 심리학 총회로써 보지 않고 있다. 가르코트의 사망 연도인 1896년에 열린 제 3 회 국제 심리학 총회는 문헨에서 열렸고 그 때 회장은 낸시 학교의 출신으로 회원들이 거의 낸시 학교의 출신들이었다. 이후에 낸시 학교를 찾는 유명 인사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베른헤임의 방법을 고용한 독일의 엘버트 몰(Albert Moll), 오스트리아의 섹스학의 권위자로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미친 크라프트 어빙(Kraft-Ebing), 미국의 모르톤 프린스(Morton Prince), 러시아의 벡테르브(Beckterev) 그리고 영국의 밀라노 브라멜(Mirno Bramnel) 등이다.
특별히 네절란드의 프레드릭 벤 에덴(Frederik van Eeden)은 의사이자 시인으로써 명망이 높았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라보 연구소를 설립을 하고 최면 치료소를 개업을 했다. 이후에 그는 최면의 무용론이 등장하면서 심리치료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계에서 처음 심리치료 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심리치료소를 설립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스위스의 부르고졸리의 대학정신병원의 의료국장인 오그스트 포엘(August Forel)이었다. 그는 1887년에 베른헤임을 방문하고 최면의 마스트가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신체적 질병에 최면 치료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이후에 베른헤임을 최면 치료 대신에 심리치료를 고안하게 된 최초의 심리치료사가 되었다(Ellenberger, 1970).
1900년으로 진입하면서 20세기의 시작의 종이 울렸다. 1900년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프로이트는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데오도어 플라우니(Theodor Flournoy)의 화성에서 인도까지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 책은 헬렌 스미스라는 여성을 4년 동안 추적 연구를 해서 그녀가 가진 천리안, 환시, 환생의 능력 그리고 전생의 단계들을 분석으로 밝혀냈다. 그녀는 전생에서 15세기 인도의 사만다니 여왕이었고 그리고 베르사유의 마리 앙뜨와넷 여왕(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된 루이 16세의 왕비)이었다고 주장을 했다. 그녀는 화성에서 살았고 그리고 화성 언어를 유창하고 사용한다고 주장을 했다. 플라우니는 4년 동안 그녀를 밀착으로 그녀의 3단계 잠재의식을 분석으로 밝혀냈다. 그는 그녀의 심층의 이미지가 창의적이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다양한 세부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은제기억(과거의 기억이 사라지고 그 경험이 지금 현재에 등장해서 본인은 처음으로 경험한 것으로 인식되어진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녀의 잠재적인 로맨스는 그녀의 어린 시절의 잊어버린 유아기 시절의 기억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동화책에서 읽은 잊어버린 기억들이 은제기억으로 재생된 것을 밝혔다. 그녀의 소망 충족은 통치적인 소망들, 우울하고 싶은 꿈들, 조언하고 싶은 소망들 그리고 과장된 소망들의 표현임을 밝혔다. 화성어는 그녀가 산키스트 언어를 하는 한 친구의 농담으로부터 놀이에서 얻는 것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녀의 몽유병적인 말들은 원시적인 유아기증의 기원이었고 그리고 소설을 읽은 것이 퇴행으로 유아기 특징들의 등장임을 밝혀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벤 에덴(von Eeden)은 네절란드에 있는 그가 영국의 톰슨 부인이 그의 모습을 보고 대화를 한다는 그녀의 천리안의 주장과 몽유병 등을 연구를 해서 무당의 영매적(영혼의 중개자) 환상은 꿈을 꾸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발표를 했다. 인간은 자신을 훈련해서 그의 의지대로 그의 꿈들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을 발표를 했다. 플라우니의 저서는 5개 국어 즉 프랑스어, 영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판이 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즈는 그의 저서를 읽고 그의 잠재적인 마음의 탐색을 극찬을 했다. 무의식 속에서 젊은 여성의 여러 개의 성격이 창조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을 칭찬을 했다. 1900, 8, 20-25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제 4 회 국제 심리학 총회에서 위의 심리학적인 이벤트들 즉 프로이트의 꿈 해석과 플라우니는 화성에서 인도까지에 대한 논의들이 공론화 되어져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 당시에 프랑스의 유력지 피가로 신문은 특집으로 제 6 차 국제 심리학 총회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마음의 논의가 이렇게 다양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철학교수들도 있었다. 문학가들도 있었다. 성직자들도 있었다. 케토릭 신도들도 있었다. 도미니카 인들도, 생리학자들도 마술사들도 있었다. 힌두교도들도 범죄학자들도 러시아의 왕자도, 수의사고 그리고 몇몇 여성들도 있었다”(Ellenberger, 1970).
20세기에 들어 오면서 최면에 대한 신비와 수수께끼는 거의 밝혀졌다. 메즈머의 자석 치료 이전에는 역동적 정신의학이 없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의식이 전부였다. 메즈너는 위기를 도발시켜서 진단적 가치로써 치유를 위한 무기로 사용을 했다(긴장의 방출의 원리). 환자와 치료사 사이에 레포, 라포의 형성이 자석 치료의 핵심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퓨이세이그의 인공감과 인공 몽유병으로 이어져 최면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영혼주의, 심령학은 마음의 접근에 새로운 기법으로 자동글쓰기, 몽상의 탐색과 최면의 황홀함으로 피에르 장(Pierre Janet)의 심리학적인 분석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이어졌다(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심리분석의 원조라고 논쟁을 했다)(Ernest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보라, 1953, 1955, 1958: 주㈜: 참고).
첫 역동적인 정신의학은 자석 치료사의 등장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이 최면 치료사로 이어지면서 무의식적인 심리적인 에너지 탐색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질병의 심리학적인 원인과 업적들은 가르코트, 베른헤임과 케르네의 업적으로 대표되어진다. 유체이론이 마음의 에너지 이론으로 대체되고 의식 밑에는 세부적인 성격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격은 군집의 형태로서 이미 19세기 후반기에 성격의 조각남, 쪼개짐, 해리 등의 이론들이 20세기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퇴마의식이 동물 자장 이론으로 연결되고 상상력과 이미지가 감정의 질병으로 잠, 시각, 망상들, 고착된 아이디어들이 정신적인 고통의 치유로 사용되어지게 된 것이다. 최면학은 무의식의 마음에 접근의 길을 열어주었다. 최면 이후에 기억 상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최면 회기 동안에 잃어버린 것은 깨어있는 상황에서도 회생이 가능하다 라는 베른헤임의 발견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연결되었다. 최면의 특징은 주체를 편안하게 만든다, 이것이 긴장이완으로 상호제시 효과로 이어져서 20세기의 심리치료의 다양한 이론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최면상태에 대한 수 많은 학자들의 실험과 관찰들은 최면의 긴장 이완 상태에서는 예민함의 증가와 지각의 감각이 증가됨을 밝혀냈다. 방치 되어 포기된 지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특징들은 히스테리아 장님, 히스테리아 귀머거리, 히스테리아 벙어리, 환각, 마비, 경련 등의 치료에 연결되어질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각의 한계점 밑에 있는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럽에서 최초의 스위스 부르고졸리 대학정신병원의 원장인 유진 블루러(Eugen Bleuler)(정신분열증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사람)는 스스로 최면에 걸려서 자신의 지각의 상황을 노트를 했다. 최면에 걸리면서 머리에서 다리까지 긴장 이완, 편안함, 따뜻함이 스며들었고 생각들이 분명해지고 깨끗해짐을 느꼈다. 마음대로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면사가 팔을 움직이라는 말에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최면사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고 느꼈다. 최면 후에 최면사의 제시들은 기억을 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6시 15분에 깨어날 것을 제시를 했다. 최면의 과정이 의식적인 마음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마음과 관계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최면 상태에서 지각의 날카로운 예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자가 스스로 최면 상태에서 자신의 고통을 진단하고 예측하고 구원과 처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로 라포, 레포는 사람들을 지각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지각의 날카로움을 고양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호제시 효과로써 나이 퇴행으로 어린 시절의 퇴행을 할 수 있고 그 발달 시점에서 걸맞은 달라진 목소리가 난다는 것을 절감을 했다(Ellenberger, 1970).
위와 같은 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최면의 신비적인 베일이 벗겨지면서 20세기 초반에 최면은 죽었다라는 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양한 심리치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프로이트가 심리치료라는 말 대신에 정신분석 혹은 심리분석이라는 말을 들고 나오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최면은 주로 무료로 시술이 되었다. 최면사가 그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치료를 했다. 프로이트가 치료실에서 환자들을 규칙적으로 1주일에 5회(월-금요일)로 40분 혹은 50분으로 규칙적인 분석 치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프로이트는 서구의 학기의 제도들이 5월말에 졸업을 하고 9월 신학기가 시작되는 기간에 6월, 7월, 8월의 3개월을 휴가로써 여행을 떠났다. 프로이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적들의 여행을 즐겼다. 그는 생전에 로마를 7번이나 여행을 했다(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이론과 나르시즘 이론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거의 3개월 동안의 휴가 동안에 환자들에게 치료 비용을 부가를 했다. 그는 분석가가 여행 중이라고 해도 치료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치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화 했다. 이후에 미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정신분석이 펴져 나가면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라서 치료자가 휴가 중에도 환자에게 치료 비용을 부과하는 문제는 프로이트의 전통을 따라서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어지고 있다(Ernest Jones, 1953, 1955, 1958).
프로이트는 최면의 효과가 카타르시스이고 최면은 과거의 잊어버린 기억들을 회복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반쪽 치료이고 온전한 치료 기법이 아님을 알고 1895년에 이미 4명의 환자를 치료 하면서 2명은 최면 치료로써 그리고 2명은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최면과 유사하게 카우치에 눕게 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이마를 누르면서 기억이 잘 날 것이라고 제시를 하고 나서 편안하게 자유롭게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게 했다. 분석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가는 방법이 바로 자유연상의 방법이 된 것이다. 1895년에 출판된 브로이어(Breuer)와 공동 출판한 그의 저서 히스테리아데 대한 연구들이 정신분석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글에서 밝혔다.
심리치료의 진실과 거짓 제 Ⅲ 부에서는 심리치료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과 오해와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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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엘렌버그(Ellenberger, 1970)의 무의식의 발견: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발달(900페이지의 엄청난 양의 저서)
: 미아레(Meares)의 저서 놀이의 은유(2005), 보드라인 장애의 해리(2012), 친밀감과 고립(2000)의 3권의 저서
: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제 Ⅰ 권(1953), 제 Ⅱ 권(1955), 제 Ⅲ 권(1958)의 3권의 저서
위의 저서들은 치료자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소장하고 있느니 치료자의 홈페이지에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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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치료 사례는 5년 전에 공황 장애로써 5년간 두문불출했던 37세의 미혼여성 E양이 치료자에게 6개월의 분석 치료를 받고 나서 치료가 더 필요하다는 제의에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치료를 종결했다.
5년 후에 2018, 12, 30일 저녁 8시 경에 치료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에서 그녀는 “선생님 5년 전에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았던 xx 입니다, 기억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니 치료자는 그녀의 이름이 휴대폰에 저장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치료자는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저장되어져 있다) 그녀의 목소리와 이름을 기억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그 당시에 치료의 과정에서 그녀의 문제와 증세들의 이야기를 해 보면 기억이 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골프장에 캐디로써 일을 하다가 공황 장애의 등장으로 5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 불안해서 어머니를 방으로 쫓아내고 혼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시점에서 그녀의 치료 기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지금 현재의 사황은 치료자와 6개월의 48시간의 치료를 끝내고 나서 그 후에 공황장애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지금은 결혼을 했고 그리고 약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녀의 남동생(영화 촬영 보조로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5년 전에 그녀를 치료하면서 기억해서 남동생의 안부를 물어 보았을 때 그는 지금 케이블 TV의 촬영 감독이 되어 영화 촬영의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이 그의 친구가 정신적인 문제로 심리치료를 받으라고 소개를 해주고 싶은데 그 당시에 집에 틀어 박혀 있던 누나가 심리치료를 받고 회복되는 것을 보고 그 때 치료자인 필자에게 치료를 받도록 권유를 하고 싶다는 요청에 의해서 치료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직도 심리치료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녀는 전화 통화에서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그 당시에 그녀가 심리치료를 받아서 회복된 것은 기적이라고 그녀의 어머니가 종종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그녀의 근황을 소개를 해주었다.
아래의 치료 회기의 소개는 5년 전에 첫 컨설팅에서 37세의 미혼녀였던 E양의 심리분석을 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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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에 누워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과 분석가
대상: 공황 장애 때문에 외출, 지하철, 버스를 타지 못하고 2년 동안 집안에 갇혀 버린 37세의 E양
증세: 호흡이 끊어질 것 같아서 공황장애 약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때 마다 복용 중, 과거 회상이 공황 공격을 불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과거의 상처 기억을 두려워함
접촉: 인터넷으로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접한 후에 치료를 받겠다고 휴대폰으로 연락
진단명: 공황 장애, 아토피 습진, 갑상선 기능 저하증, 변비, 약한 소화성 궤양 - 5개의 증세
치료 기간: 1주일에 3회씩 1회기당 2시간씩 치료를 받고 있음
치료 결과: 아래의 치료 과정은 제 1회 치료 회기 2시간을 마치고 E양의 치료 과정을 요약한 것임.
치료의 과정
E양은 첫 치료 회기 약속 시간을 오후 1시로 약속을 해 놓고서 실제로 도착을 한 것은 4시 35분이었다. 그녀는 오후 1시 이전에 늦을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치료자에게 발송을 했다. 치료자는 그녀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그녀가 스스로 승용차를 운전해서 오기 때문에 특별히 공황 장애 때문에 시간이 늦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그녀의 뒤 시간에 다른 예약된 손님이 없으니 천천히 오라고 문자 메시시를 보내고 나서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4시 35분 경에 도착을 했고 치료자는 6개월 치료 계약으로 시작이 되었다.
E양은 현재 37세로 미혼으로 공황 공격으로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한 것은 31세 때로 약 5년 전이라고 했다. 약물의 복용으로 직장 생활을 어려움 없이 계속해 왔고 그리고 1년에 적어도 1회씩은 친구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해외 여행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녀의 가족적인 배경: 그녀가 처음으로 약간의 문제점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점에서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그 이후의 시점에서 수업 시간에 책을 읽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 마소리가 더듬거리고 생각이 연결되지 않고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는 현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에 그녀는 선생님이 지명을 하는 차례가 다가 오면 그것을 예견해서 담임 선생님에게 미리 화장실에 간다면서 피했던 기억들을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에 고생을 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져서 몇 번 병원에 실려갔던 적이 있고 그리고 사망 직전에는 중풍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했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장례식 때에 슬프거나 울음을 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회고를 했다. 이미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그녀는 유치원 시절부터 예민하고 경기를 많이하고 심장이 늘 답답해서 돌덩어리를 눌러 놓은 것 같았다고 어머니에게 자주 호소를 한 적이 많았다고 어머니를 늘 E양에게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 같다는 불평을 했다고 기억을 했다.
그녀는 이미 초등학교 4학년 이전에 병원에 가서 골수 검사로 MRI의 촬영을 몇 번 받아보았고 그 검사들은 신체적인 이상은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글을 읽을 때 피하거나 더듬거리거나 글을 읽을 때 떨리는 증세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그녀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E양이 첫 번째 공황 공격을 가진 것은 21세 때 친구와 영화 관에 가서 "나비 효과"라는 영화를 보고 있는데 그 영화의 장면들이 자주 갑자기 바뀌면서 놀라게 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호흡이 어렵고 심장이 뛰고 손과 발에 땀이 나고 현기증이 나는 증세를 경험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그러한 현상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영화관을 뛰쳐 나오고 싶었지만 꾹 참고 끝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나왔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별일 없이 잘 지나갔다고 했다. 두 번째는 친구들과 노래 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공황 증세가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다가 나왔다고 했다. 이후에는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방을 절대로 찾지 않았다고 했다. 노래는 특별히 쿵광 거리는 흥분시키거나 움직임이 많은 노래들이 그녀의 공황 증세의 촉진 요인이라고 했다.
그녀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생활이 어려워져서 고학으로 공부를 했다고 했다. 대부분이 노동으로 고학으로 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중, 고등학교 시절의 보냈지만 공황 장애의 흔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22세부터 29세까지는 골프 케디로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모두 어머니와 2살 어린 남동생의 뒷바라지로 생활비용으로 사용했다고 했다. 그녀가 가장의 역할을 해서 돈을 벌었고 힘들 일이었지만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시절이 29세까지 골프 케디 시절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녀가 공황 공격으로 약물을 복용하면서 31살부터 35세까지 별 어려움이없이 직장 생활과 여행등을 다닐 수가 있었는데 2012년 12월부터 심한 공황 공격으로 직장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칩거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약 2년 동안 직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어떤 회사의 휴양 시절에서 3개월간 일자리를 얻어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하루 만에 직장에 가잘 수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고 했다.
최근에 그녀가 6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친밀하지는 않았던 한 49세의 이혼 남자와 약 4개월간 가까이 지내다가 그가 마닐라로 업무 차 출국을 하면서 E양과 같이 가려고 했으나 E양은 공황 공격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 혼자서 출국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이후에 귀국을 하지 않고 그 쪽에서 머무는 바람에 E양이 분노해서 그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절교를 선언한 것이 약 3주일 전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와 절교 이후에 공황 공격이 심해졌다고 털어 놓았다. 그 남자는 그녀보다 12살이나 많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러 받아서 돈이 많은 남자였기 때문에 이혼 남자에다 자녀가 없어서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와 집중적인 만남은 약 4개월 정도도 2013년 여름 이었다고 했다. 그와의 관계는 계속적으로 갈등의 연속으로 서로가 성격이 충돌 하는 스타일로 서로 맞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그녀에게 먹고 싶은 것은 아낌없이 사주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가 출국해서 몇 개월이 지난 이후에도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체류하면서 다른 여성(그녀가 잘 아는 언니)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소식들을 그 언니로(그 언니는 그 남자가 E양과 사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부터 들어면서 분노해서 그 남자와 절교를 선언했다고 했다.
실제로는 그 남자와 절교를 선언하고 나서도 E양은 계속해서 그 남자의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기대리면서 학수고대하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녀가 31살 때부터 35세 때까지 근무를 했던 골프 클럽에서 안내를 맞았던 일자리는 힘들어지만 그런대로 좋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 때 프로 골프로 일반인들에게 골프 교사로 일하던 한 여성과 다툼 때문에 두 사람이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고통스러움을 털어 놓았다. 그녀는 E양에게 몸싸움과 그리고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까발기는 바람에 그녀 때문에 엄청난 수모를 당했던 기억을 회상을 했다. 그 이후에 그녀는 그 회사에서 일을 그만 두고 집에서 칩거를 하게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E양이 첫 치료 회기 시간에 비교적 이야기를 소상하게 털어 놓는 바람에 치료 회기는 화기애애하게 흥미 진전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치료실의 위층에서 방 수리를 한다고 드릴이 구멍을 뚫는 소리가 "드르르" 하고 약간 씨끄러운 소리로 들리게 되자 E양이 갑자기 공황 공격이 올 것 같다고 약물을 복용하고 싶다고 요청을 해서 치료자가 허용을 해 주었다. 이후에 그 약물 복용 이후에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서 그 치료 회기 시간은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끝낼 수가 있었다.
치료자는 2시간 동안의 그녀의 첫 치료 회기에서 E양이 했던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분석을 다음과 같이 했다.
E양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공부 시간에 글을 읽는데 어려움을 경험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과정에 문제가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미 유치원 시절부터 가슴에 돌로 누르는 듯한 답답함을 어머니에게 자주 호소를 했고 그리고 E양이 치료자에게 첫 치료 회기 시간에 가슴에 돌을 얹어 내리 누르는 답답함을 호소를 했다. 그리고 E양은 열정적인 움직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노래가 공황 공격을 불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살이나 많은 남자 친구와 사뀐 것과 그리고그녀는 몇 번의 남자들과의 사귐에서도 항상 아버지 뻘 되는 나이 많은 사람들과 사귀어진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사망했고 그리고 고혈압으로 중풍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점 등이 감정의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고혈압 환자들이 분노, 미움, 적대감정을 억압해서 내면에서 폭발하지 않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화산에 비유를 하고 있는 학자들의 연구결과 들과 연결 시켜 보면 E양은 틀림없이 내면 속에 감추어진 분노가 억압되어져 있고 이 분노가 흥분, 노여움 등과 연결되면 심장이 벌떡거리고 호흡이 막히는 것으로 공황 공격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써 E양은 흥분적인 쿵쾅거리는 록 음악은 옛날에는 무척 좋아 했으나 지금은 금기로 되어있고 그리고 전 남자 친구와 갈등에서 분노, 그리고 그녀를 모욕을 주고 수치심을 안겨준 그 프로 골프 여성과 싸움 등에서 그녀가 감추어진 분노의 표현과 공황 장애의 연결을 어렴풋이 윤곽을 그릴 수가 있었다.
다음의 홈 페이지에서는 E양의 4시간 째에서 밝혀진 문제점들이 하나씩 드러나서 분석이 되어지고 있다. 다음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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