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건강

새롭게 등장한 21세기 정신장애들 5:자아 치료?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심리적인 원리들 2018. 12. 17. 03:57

롭게 등장한 21세기의 정신장애 5: 자아의 치료?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이로움과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반대로 인간정신의 발달에 어려움들과 더 붙여서 상처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장애들은 마음에 어려움과 상처로 인해서 생긴 병이 아닌가? 과학이 발달하면서 점점 치료 하기가 어려운 정신과적인 문제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장애의 역사를 살펴 보면 중세와 고대로 거슬려 올라 가면 정신과적인 문제는 적었다는 학자들의 보고서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우울증 이외에는 정신과적인 장애가 거의 없었다(Georgotas & Cancro, 1988: 주㈜: 참고).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체적 질병처럼 정신적인 질병 역시 인간의 등장과 함께 등장을 했다. 단지 그들이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의 처방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신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들은 원시부족 시대에는 그 부족의 제사장에 의해서 치료되어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 책에서 배운 부족 국가가 등장하면서 유행을 했던 제정일치 시대가 아닌가?


 이후에 정신적인 문제들이 심각하게 되면서 전문 직종으로 샤만(Shaman, 무당)들이 등장을 하게 된다. 이들이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료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치료는 원시적이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종족과 부족의 지도자들이 명망과 신뢰로써 치료를 해 온 것으로 상식적인 조언들이었다. 지금도 파푸아 뉴기니아의 삼비아 족들은 샤만들이 신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병을 치료 하고 있다는 것이 상세하게 보고되고 있다(시카고 대학의 문화 인류학자인 헤르드트(Hardt)가 원시부족 삼비아 족과 함께 5년 동안 살면서 정신분석가인 UCLA 의과대학의 정신분석가인 스롤러(Stoller)와 함께 사먄들의 퇴마의식의 과정을 정신분석과 비교를 한 그들의 저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보라, 1990: 주㈜: 참고).


역동적 정신의학자인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주㈜: 참고) 14년 동안 인간의 정신장애의 역사적 추적 연구의 보고서로써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정신장애의 급격한 변화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와 그리고 1760년부터 영국에서 시작되어 1830-1840년경에 본격화된 산업혁명의 결과로써 보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귀신, 악마, 악령, 마녀 들이 인간의 영혼을 점령하고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는 퇴마의식이 계몽주의 시대의 교육과 과학의 등장의 결과로써 빙의 현상은 귀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 히스테리아라는 정신병이고 귀신에 씌인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로 그리고 치료법으로 자석 치료가 등장을 하면서 이후에 자석치료는 최면치료로 그리고 샤만 대신에 최면사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 정신병 치료의 진화와 역사이다.


이후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신장애들은 계속된 과학의 급속한 발달에 따른 사회와 문화들이 따라오면서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구조와 그것으로 인한 정신적인 어려움들이 함께 따라오게 되면서 각종 정신장애들이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신체적 질병처럼 정신적인 장애들 역시 한 개의 장애가 새롭게 등장하면 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지고 그리고 적합한 새로운 치료 기법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진화의 역사가 아닌가?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19세기 말기인 1895년에 등장을 해서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가들이 20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가면서 신경증들의 치료를 해 왔다. 즉 정신분석은 신경증을 치료해오던 치료 기법이었다. 20세기의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인간의 생활은 점점 어려움들로 둘러 싸이게 되면서 새로운 정신과 장애들이 등장을 한다 


결정적인 변화들은 1940년대에 제 2 차 세계 대전으로 특별히 미국에서 남성들이 전쟁터로 빈 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자녀의 양육이 엄마의 손으로부터 조부모 혹은 친척들 혹은 영아방, 유아방으로 이동을 하게 되면서 엄마와 아기의 상호관계의 접촉이 줄어들게 되었다. 모유에서 우유로, 유모차로 승용차로 그리고 자녀의 수가 1-2명으로 감소하고 핵가족화 되면서 자녀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각종 학원으로 배움으로 내 몰리게 된다. 인간의 삶은 한층 더 편리하고 단순화 되어 보이지만 사실 인간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들로 변해가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차례 글들에서 밝혔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삶이 편리해지고 단순화로 빨라지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한 각종 정신과적인 어려움들 역시 함께 등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8년에 정신분석학자인 아돌프 스턴이(Adolph Stern)이 정신분석으로 치료가 잘 되지 않는 신경증 환자들을 보고한 것이다. 분명히 정신증(정신분열증(조현병), 조울증, 편집증)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그들의 치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최초로 학계에 보고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통파 정신분석으로 치료가 어려운 새로운 정신장애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 1943년에 좁 홉킨즈 의과대학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레오 케너(Leo Kanner) 11명의 이상한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자폐증을 학계에 보고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장애들의 치료에는 프로이트의 정통파 정신분석으로는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20세기 초반기에 자신이 창안한 정신분석은 신경증 치료에 국한시키라고 천명을 했다. 정신증은 전이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고 선을 끄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정신분석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새롭게 첨가를 하면서 정신분석이 정신증과 자폐증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치료 보고서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정신분석적인 심리치료 혹은 역동적 심리치료 혹은 정신분석적인 대인관계 치료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메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이 창조한 대상관계 이론이고 그리고 코호트(Kohut)가 창조한 자아 심리학이다. 초반기에 그들은 정통파 정신분석가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크레인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충실하지만 수정과 보완은 인정을 했다. 이후에 정통파 정신분석을 계승한 프로이트의 막내 딸인 안니 프로이트(Anna Freud)와 크레인 사이에 갈등으로 영국의 정신분석 학파가 두 개의 학파로 쪼개지게 되었다. 크레인을 따르는 정신분석가들은 따로 모임을 가지고 국제정신분석학회라는 학회를 새로 만들었다. 또한 1970년대에 등장한 코호트 역시 정신분석에 이단으로 비판을 받게 되면서 따로 자아 심리학파를 조직을 했다.


이들의 등장은 정통파 정신분석 치료가 새롭게 등장한 정신장애에는 비효과적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시대의 정신장애에 걸맞은 새로운 정신분석 치료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연구되어지고 치료되어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항상 어려운 문제들이 등장을 하면 그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낸다. 그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방법들이 그것이다. 정신장애들에서도 마찬가지다. 21세기는 20세기와 다른 새로운 시대이다.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정신장애 특별히 자아 장애가 그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의 글에서 21세기가 왜 장아 장애의 시대인가? 라는 여러 차례 글에서 밝혔다.


이제 정신분석과 함께 시작했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인기에 눌려서 전문가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100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정신분석적인 치료가 새로운 장애들의 치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이 시점에서 과거에 등장했다가 잊혀진 새로운 치료 기법이 각광을 받고 있는 역동적 정신 의학의 한 갈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세기 말기에 1880대부터 1890년대까지는 유럽에서 히스테리아라는 정신병과 그 치료 기법으로 최면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것의 시작은 1882, 2, 13일에 의과대학 내과 교수인 가르코트(Charcot)가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전에 세 번이나 실패를 했던 그의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히스테리아 안에서 최면에 의해서 치료되는 다양한 신경증이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과학계로부터 최면을 공식적인 치료로써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최면학은 프랑스의 의과대학에서 정식으로 치료로써 인정을 받고 치료가 실시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가르코트는 히스테리아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후 10년 동안 파리는 최면학 연구의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5, 10월에 29세의 프로이트가 비엔나 의과대학 레지던트 4학년으로 카르코트의 살페트리에 병원에 최면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6개월 동안 유학을 하게 된다(Ellenberger, 1970: 주㈜: 참고).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고교 철학 교사로 있다가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히스테리아를 실험실에서 9년 동안 연구하게 된다. 가르코트의 특별 지원을 받아서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실험실에서 연구한 피에르 장은 이후에 591 여명의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치료와 관찰에서 히스테리아의 핵심을 해리 이론으로써 설명해서 각광을 받게 된다. 20세기에 진입하면서 프로이트와 페에르 장(Pierre Janet)은 히스테리아와 신경증의 연구에 쌍두 마차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둘 다 가르코트의 히스테리아의 최면 연구에서 최면의 효과에 실망해서 심리치료 쪽으로 전환을 한 대표적인 학자이다(Meares, 2005: 주㈜: 참고).


프로이트는 무의식 이론으로 심리적인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고통스런 기억을 피하기 위해서 억압으로 밀어 넣어 무의식 속에 가두어버림으로써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어 기재들을 통해서 자아를 상처들로부터 보호하게 된다고 가설화 했다. 이 방어 기재는 갑옷과 같아서 그 시점에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점차로 성장해서 어른이 된 이후에는 성장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이 방어기재를 건강한 방어기재로 수정해주는 ego 심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대신에 장(Janet)은 잠재적인 의식(무의식)을 인정하면서도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받은 자아는 의식의 통합에서 끊어져서 분리되어 의식 속에 등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이론으로 의식의 조각남, 의식의 해체로써 가설화 했다. (Janet)은 잠재의식 속에서 각인 되어져 있는 고착된 아이디어가 심한 히스테리아의 진원지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 고착된 사고를 제거해주어야 근본적으로 치료가 된다는 주장으로 어떤 점에서는 프로이트의 성장이 중지된 자아와 유사하다. 그러나 1910년 대에 정신분석의 인가가 전 세계 적으로 확대 되어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피에르 장(Pierre Janet)의 해리 이론은 무대의 뒷면에서 사라지게 된다(Ellenberger, 1970).


20세기 중반까지 장(Janet)의 해리 이론은 책상의 설합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새롭게 등장한 심한 정신장애 즉 자아 장애(최초의 장애의 이름은 스턴(Stern)이 신조어로 만든 보드라인 장애였다(보드라인 이라는 말은 신경증 보다는 심각한데 정신증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신경증과 정신증의 중간에 해당되는 경제선 인격 장애(우리나라 말로는)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드라인 이라는 이 장애의 이름은 이후에 잊혀졌다가 수정주의 정신분석가들과 역동적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치료사들에 의해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 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정신건강 치료사들에 의해서 연구들의 결과로 논문과 저서들이 홍수를 이루게 된다(Gunderson, 2001: 주㈜: 참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가려져서 그 동안에 뒤로 밀린 자아 이론가들의 이야기로서 심리치료에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 프로이트의 반대편에서 심각한 자아 장애들을 연구하고 치료를 계승한 학자들과 그들의 21세기의 새로운 정신장애에 걸맞은 새로운 치료 이론으로 들어가 보자. 그들이 바로 자아(self) 치료 이론의 계승자들이다(Meares, 2012: 주㈜: 참고).


자아(self)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신경학의 아버지로 인정을 받고 있는 존 휴글 잭슨(John Huglings Jackson)으로 1835년에 때어났기 때문에 프로이트 보다 21년 먼저 그리고 피에르 장보다 24년 먼저 태어났다(Meares, 2013). 그의 마음의 위계이론은 그 당시에 신경학적인 자아 이론으로써 동료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천재로써 인정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신경학적인 자아 이론은 어디까지나 철학에 가까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철학자로써 알려져 있다. 그는 외부 세계로 표현되어지는 자아와 내면의 세계를 대표 하는 자아로 이중적인 자아로서 마음의 위계이론을 가설화 했다. 그의 이론은 1990년에 하버드 의과대학의 교수인 맥클린(MacLean)3층으로 진화된 뇌(본능의 뇌로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로 포유동물의 뇌, 이성의 뇌로 고등동물의 뇌)의 이론에서 빛을 보게 된다.


더 붙여서 그의 자아의 위계이론은 이후에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인 월리암 제임즈(William James)의 관심을 끌었다. 제임즈는 그 때 1875년에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있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실험실을 세우고 심리학을 연구를 했다. 그는 잭슨과 편지를 교환을 했고 잭슨을 만났고 잭슨의 논문들을 그의 논문에 많이 인용을 했다. 그는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 병원을 방문하고 가르코트를 만나고 최면학을 연구하고 치료를 했다. 그가 1890년에 심리학의 원리라는 저서를 출판을 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별히 유럽의 과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의 저서는 1870년에 원고가 준비가 되었지만 출판이 늦어지는 바람에 1879년의 독일의 라이프지그 대학의 실험실에서 심리과학이 탄생된 공로를 분트(Wundt)에게 양보를 해야 했다(Meares, 20012).


역동적 정신의학에서 1859년은 브리켓(Briquet)의 히스테리아의 연구 저서인 히스테리아에서 치유의 특징이 그리고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이 된 해로 두 개의 역사적인 사건이 겹치는 해로 꼽힌다. 브리켓은 430명의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관찰하고 연구를 해서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폭력적인 감정들, 연장된 슬픔들, 가족갈등, 좌절의 사랑들 그리고 과도하게 예민함이 히스테리아의 원인으로 기술을 했다. 특별히 히스테리아 환자들은 신체적인 장애들 즉 신경증 벙어리, 신경증 장님, 신체적 마비, 기억 상실증, 몽유병 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노트를 해서 신체화 장애의 근원을 밝힌 최초의 학자로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브리켓의 뒤를 이은 제자가 바로 가르코트라고 학자들은 유추를 하고 있다(Meares, 2012).


최면학은 1893년에 가르코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기가 시들어지게 되었다. 19세가 저물어 갈 때 최면학에서 시작된 히스테리아의 치료는 프로이트, 피에르 장 그리고 제임즈 등에 의해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최면학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심리치료로 진화하게 된다. 최면의 연구가 한계점이 도달 하게 된 것이다. 최면은 가르코트의 수제자인 바빈스키(Babinski)가 최면이 히스테이아 이고 히스테리아가 최면이라는 가르코트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고 최면은 의식의 변형된 형태이며 히스테리아는 질병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최면은 최면사의 제시의 효과이고 카타르시스의 효과라는 것과 최면에 걸린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최면의 무용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20세기에 걸맞은 심리치료라는 새로운 용어로 진화하게 되었다(Ellenberger, 1970).


20세기 초반기인 1903년에 국제의학 총회에서 러시아의 생리학자인 파브로프(Pavlov)가 개의 위에 구멍을 뚫어서 고기를 주면 침을 흘리는 반사를 이용해서 종 혹은 부자를 들려주고 3초 후에 고기를 주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개는 종, 부자 소리에도 침을 흘리게 되는 조건화 학습을 발표를 해서 배움, 학습의 원리를 실험실에서 증명함으로써 1904년에 노벨상을 받게 된다. 더 붙여서 1913년은 정신의학과 심리학에 획기적인 해로 역동적 정신의학자들에 의해서 노트되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왓트슨(J.B. Watson)이 행동주의가 본 심리학이라는 논문으로부터 행동주의 심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왓트슨은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파브로프의 조건학습에 흥미를 가지고 이것을 심리학 실험실에 가지고 오게 된 것이었다.


같은 해에 미국 뉴욕에서 무기 박람회가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서 예술가들이 인간을 한 개의 기계의 부품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게 됨으로써 이후에 과학주의, 실험심리학의 등장을 예고해주었다. 이후에 20세기 초에 실증주의와 행동주의가 심리학계를 휩쓸게 되었다. 이후에 40년 동안 미국의 심리학은 조건학습의 영향으로 자극과 반응 심리학(S-R)이 실험실에서 역동적 정신의학의 설 자리를 몰아냈다. 마음, 정신은 블랙박스로 취급되어 무용지물로 심리과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65년에 국제 신경학 총회에서 슬레이트(Slater)는 히스테리아의 조종(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라는 논문으로 히스테리아의 열풍은 최면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병으로 평가절하를 했고 히스테리아라는 정신병과 그 연구의 존재가치는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을 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일부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한 신경증보다 심각한 보드라인에 연구는 계속되었다. 1967년에 코넬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나 정신분석가인 컨버그에 의해서 그의 20년 동안 연구한 보드라인의 결과가 신경증 조직, 보드라인 조직 그리고 정신증 조직이라는 새로운 분류가 등장을 해서 보드라인의 실체가 신경증과 정신증의 중간 과정임을 인정을 받았다.


보드라인에 대한 연구는 1968년에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과 학장인 크린크(Grinker)에 의해서 조직적인 연구가 실행이 되었다. 크린크는 보드라인의 실체를 인정을 했다. 보드라인은 양육으로 인한 발달의 과정에서 상처의 결과로서 성장이 중지된 것으로 그 고착 지점에서 멈춘 자아에 새로운 정보와 경험이 동화되어 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를 했다. 부모의 양육 환경의 실패를 인정을 했다. 같은 해에 파리와 미국의 대학가에서 반전 열풍이 일어났다. 미국 안에서 민권운동으로 소수민족들과 소주 인종들의 권리주장과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으로 인본주의적인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1969년에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존 볼리(John Bawlby)가 동물심리학에 근거한 애착이론을 발표를 했다. 이어서 1970년에 헨리 엘렌버그가 14년 동안 연구를 한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발달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1971년에 헤인즈 코호트(Heinz Kohut)가 자아 심리학을 발표를 했다. 동시에 엔델 튜빙(Endel Tuvling)신경생리학적인 자아 이론을 발표를 했다. 그는 에피소드적인 기억과 어원 기억을 발표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어원 기억은 죄뇌의 영역이고 에피소드 기억은 우뇌의 영역이라는 이론이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이론은 휴글 잭슨의 신경학적인 자아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잭슨의 이론이 100년 후에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1975년에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이나 정신분석가인 간드슨(Gunderson, 1984, 2001: 주㈜: 참고)이 보드라인의 진단적인 인터뷰를 통해서 보드라인의 7개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분리시켜서 발표를 했다. 1979년에 스피츠(Spitzer)와 기브슨(Gibbson)이 첫 번째 808명의 보드라인 환자들의 실험 그룹과 건강한 사람들의 컨트롤 그룹으로 그리고 두 번째 808명의 보드라인 환자들의 실험그룹과 건강한 사람들의 컨트롤 그룹의 연구 결과를 비교해서 전자를 보드라인 성격장애로 그리고 후자를 자아분열 유형 성격장애로 이름을 붙였다.


1980에 미국 정신의학회의 제 3차 정신의학에 대한 통계와 진단 분류 지침서인 DSM-에서 건드슨의 연구의 결과를 모델로 한 10개의 성격장애가 탄생하게 된다. 그 중에서 두 번째 그룹으로 보드라인 성격장애가 그리고 첫 번째 그룹에는 자아분열 성격장애, 자아분열 유형 성격장애가 공식적인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히스테리아는 1980년에 등장한 DSM-Ⅲ에서 전환장애, 신체화 장애 그리고 히스트로닉 장애, 보드라인 장애를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역시 DSM-Ⅲ에서 새롭게 등장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제 1 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 그리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군인들의 심리적인 상처들의 급속한 등장으로 행동주의와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의해서 밀려났던 역동적 정신의학이 100만에 프로이트와 피에르 장 그리고 월리암 제임즈에 의해서 20세기 초에서 잃어버린 명예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이후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보드라인의 인기와 열풍은 정신의학계를 석권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드라인이라는 장애의 특징과 치료의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보드라인 혹은 경계선 인격장애자아감정충동성에 특별이 관계되어져 있다. 프로이트는 자아(self)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모델(Model, 1996, 2006: 주㈜: 참고) 프로이트가 자아라는 말 대신에 ego(현실적 자아)를 사용한 것은 ego는 적응능력, 학습 능력, 조정능력, 방어 능력 등을 가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용어인 대신에 자아(self)는 추상적인 비과학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노트하고 있다. 이제 ego심리학에 의해서 밀려났던 자아 심리학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보드라인 장애는 경계선 자아장애, 인격장애로 우리 나라에서도 점점 많이 사용되어져 가고 있다. 보드라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아가 연약하고 불안에 쉽게 흔들린다고 불평을 한다. 과거에 익숙했던 주변 환경들이 이상하게 낯설게 보이고 한번씩 이상하게도 내가 아닌 것처럼 인식되어진다고 호소를 많이 한다. 거울 앞에선 자신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말을 한다. 거울 앞에서 선 내가 과거의 내가 아닌 것처럼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종종 내가 누구인가?로 고민하게 된다고 말을 한다.


동시에 혼자 있음의 외로움을 호소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서 다니는데 나는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 식당에 혹은 영화관에는 혼자서 갈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붙여서 그나마도 친했던 친구가 떠나간다는 말에 기절초풍하게 된다고 하소연을 한다. 버림받음을 두려워해서 공포적으로 반응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감정적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한다. 자살 충동, 자해로 면도날로 손목을 끗거나 혹은 담뱃불로 자신의 몸을 찌진다. 모순된 지리멸렬함의 생각들을 호소한다. 어떤 위기 시에 꽁꽁 얼어붙어버림을 불평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디어 혹은 머리 회전이 빨라서 상황 파악을 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없고 멍청해진다고 호소한다. 충동적이고 조그만 사소한 것에 분노가 폭발해서 노발대발 했다가 이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비난하게 되어 자신감이 납작해진다.


자아 이론가와 자아 치료사들은 프로이트의 쪼갬 방어(splitting)과 억압(repression)이라는 용어 대신에 의식의 해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현실적인 느낌이 조각이 나서 연결이 끊어진다는 낱말로 조각남(fragmentation)이라는 용어와 연상의 반대어로 연결의 단절(dissociation)이라는 낱말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의 자아는 과거의 경험들의 총합이다 라는 말은 프로이트의 용어로 종종 흔히 사용을 한다. 대신에 과거의 경험들이 서로 연길이 끊어져서 순간적으로 위기 대응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감소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아의 힘이 약해져서 조그만 불안에도 견딜 수가 없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바람에 이것이 잠을 설치게 하고 밤과 낮이 꺼꾸로 되어버린다고 불평을 한다. 특별히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지속적인 관계를 할 수 없다고 불평을 한다. 인내심이 부족해서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하나가 포기하거나 중단하게 된다. 이것은 좌절에 참을성이 없고 지속적인 자아의 연결이 끊어져서 자아의 혼란으로 기술되어진다.


치료자(필자)는 이미 미국에서 인턴쉽을 받고 있을 동안에 자아의 치료가 앞으로 결정적인 치료 기법일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신분석에서도 응용 정신분석 쪽으로 공부를 했고 10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한 이후에 귀국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심리치료를 병행을 해 왔다. 치료자가 1999년에 쓴 저서인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아(self)의 성장과 발달 그리고 자아의 치료에 36년 동안 올인 한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21세기의 정통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을 꿰뚫은 것 같은 기분으로 아직도 자아의 치료에 대한 저서를 읽고 배우고 치료에 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2년 전에 치료자가 의 후편으로 인사이드 아웃으로부터 본 내면의 세계가 지금 하나 의학사에 의해서 첫 번째 교정이 끝나고 두 번째 교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2019년에는 두 번째 저서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보드라인 장애, 경계선 인격장애 들을 가진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지만 대부분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이것을 우울증으로 진단해서 우울증 약물을 복용하고 있거나 혹은 정신분열증(조현병) 무차별 진단으로 수년간 약물 복용을 하는 사람들로써 약물의 치료에 실망해서 치료자를 찾아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약물의 효과게 불만족해서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다.


정신분열증으로 치료자에게 1년 동안 치료를 받은 H씨는 5년 동안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3개월의 심리 상담 치료를 그리고 4개월간 한의사로부터 한약치료와 태양인 태음인의 치료를 받았으나 실패를 했다고 호소를 했다. 그는 명백한 환청이나 환각은 없었다. 고로 치료자는 정신분열증(조현병)보다는 자아 분열과 진단을 했다. 자아 장애의 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진단을 했다. 그는 치료가 6개월을 지나가면서 스스로 약물 복용을 중지를 했고 이후에 6개월 동안 큰 어려움이 없이 대학의 첫 하기를 전교 2등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치료자에게 1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은 Q양 역시 우울증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교 1학년 때 난독증으로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성적이 떨어졌다. 그녀가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 페이지에서 정신분석 치료 사례에서 그녀와 유사한 여성이 치료를 받아서 좋아진 것을 아버지에게 대화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A4 용지로 4장의 호소문을 써서 아버지에게 호소를 했으나 아버지의 거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10년 후에 결혼해서 남편의 지원으로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진단받고 약물을 4년 동안 복용하고 있어나 효과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그녀는 조그만 갈등 혹은 좌절에 참을성이 없어서 남편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남편의 노트북을 던져서 파괴 시키고 분노를 폭발 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남편에게 애지중지하고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는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동을 한다고 스스로 토로 했다. 그녀 역시 보드라인 자아장애였다.


우울증으로 7년 동안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나 전혀 효과가 없는 P씨는 치료자에게 3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자아가 중지된 30대 후반의 결혼한 기혼자로 그가 상사 혹은 선배의 위협과 폭력 앞에서는 자아가 꽁꽁 얼어붙어서 생각이 나지 않고 무조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사과를 하고 나서 꼼꼼히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잘못했다고 한 자신을 처벌하고 미워했다. 그는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흥분하고 폭력적이 되거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호소를 했다. 그는 3년 동안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아서 핵심 문제에서 벗어났다. 그는 그 다음해에 이혼한 여동생에게 치료자의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추천을 했고 그녀의 여동생이 2시간 치료자에게 컨설팅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


치료자에게 1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O군도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1 달 동안 입원을 했고 그리고 2년 동안 우울증 약물치료를 받다가 치료자에게 분석치료를 받으면서 48시간 후에 약물을 스스로 중단했다. 그는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을 부모님과 조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그 돈으로 대인관계를 하려고 하다가 도벽증으로 몰려서 아버지로부터 수 차례 처벌을 받았던 젊은이로 중국에 유학으로 고교 시절을 끝내고 대학 1학년 때 학점 미달로 제적을 당하고 귀국했다가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로 입원을 한 사람이었다.


23세의 대학 2학년 학생인 K군은 8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제일 이름난 유명 대학 병원에서 신경 정신과 과장으로부터 우울증으로 약물을 처방 받아서 복용해 왔으나 결국은 자아가 1%밖에 작동하지 않아서 치료자를 찾아온 학생이었다. 그는 48시간 치료 이후에 70%의 자아를 회복했다고 스스로 고백을 했으나 부모님의 치료비용 거부로 치료를 종식해야 했다.


또 다른 21세의 젊은이는 고 1학년 때 자퇴를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한 전 교사에게 전과목에 걸쳐서 3년 동안 개인 교사로 수능 준비를 했다가 9 등급으로 수능 실패 후에 2년 동안 두문불출로 히끼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서 가족구성원과 단절하고 혼자 방 안에 처박혀 밤과 낮이 거꾸로 되었다가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모기만한 소리로 대인관계를 하고 싶다는 전화에다 집으로 방문해서 심리치료를 해 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전화로 2시간씩 혹은 3시간씩 통화를 통해서 몇 주일 후에 치료실에 나오게 되었고 2시간 컨설팅 이후에 6개월의 치료 계약을 하고 그는 1주일에 3회씩 주당 6시간씩 심리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분석의 과정에서 그는 환각증세와 환청 증세와 유사한 것 때문에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알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신경정신과를 찾지 않아서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시작해서 치료자를 신뢰하고 빠른 치료 회복을 보였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떠나갔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자녀들을 돌보아주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3년간 개인 교수에서 엄청난 돈을 투자 해준 것에 대한 실망을 준 것 때문에 자아의 처벌로써 두문불출하고 자신을 미워했던 자아분열 직전에서 1년간 심리치료 후에 건강한 마음을 회복을 해서 군에 입대 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 군대생활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남동생의 매일을 받았다. 


치료자가 지금까지 정신분열증(조현병) 혹은 우울증으로 치료를 한 사람들의 95% 이상이 전부 21세기의 새로운 장애로써 자아 장애인 보드라인 성격장애 혹은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환청과 환각이 뚜렷한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장애들이 자아 장애로 진단되어질 수 있는 것을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어 조현병 약물을 복용하고 있거나 혹은 우울증으로 진단되어 우울증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와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이미 보드라인 장애가 대세가 되었고 그 장애에 걸맞은 새로운 자아 장애 치료 기법들이 유행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TV혹은 인터넷에서 출연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자아 장애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이 우울증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정신장애의 첫 걸음인 우울증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의 치료 사례는 우울증으로 7년 동안 약물 복용해서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한 한 대학교수의 치료 사례이다.


A씨는 40대 초반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대학 병원의 정신과 과장으로부터 우울증으로 진단받아서 7년 동안 약물을 복용해왔으나 치료 효과가 전무하다고 불평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 7년 동안 명문 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귀국에서 이름난 대학에서 8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해서 4살 된 딸이 있었으나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다. 아니 스스로 이혼을 강압을 하고 나서는 후회하면서 다시 재결합을 호소했으나 거부당했다. 다행히도 부인이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그가 우울증이 아니고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자아 장애인 보드라인 인격장애라고 판단을 해서 치료자의 전화 번호를 건네주어서 치료자에게 300시간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7년 동안 근무를 한 후에 안식년으로 1년의 유급 휴가를 받은 덕택에 그 1년을 그의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에 올인 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주일에 매일 같이 주 5일을 하루에 2시간씩 분석 치료에 투자를 해서 1주일에 10시간씩 집중적인 심리치료를 받았을 수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목회 상담자에게 3년간 간간히 목회상담을 받았다고 실토를 했다. 그가 치료를 시작할 시점에 그는 부인과 딸의 가족 해체로 고립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미 7년 전에 부인과 결혼을 반대해서 친가와는 원수지간 이 되어버렸다고 토로 했다. 그가 그 당시에 부인과 결혼을 할 때 아버지가 반대를 해서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끝날 것이라고 최후의 통첩을 했다. 그러나 A씨는 강행을 했고 그 결혼 식 날에 형님이 결혼식장에 찾아와서 깽판을 치는 바람에 결혼 식장이 난리 굿으로 변해버렸다고 실토를 했다. 결혼식장에서 형님과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7년 동안 복용해온 약물을 그는 훤히 궤뚤고 있었다. 약물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아침에 5알 그리고 저녁에 5알을 복용하고 있었다. 치료 시작에서 그는 약물을 완전히 포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의 분석이 시작되었다. 분석 치료 첫 시간에 그가 지금도 자주 떠 오르는 그를 괴롭히는 한 개의 장면을 이야기를 했다. 서산에 해가 지면서 붉게 물이 드는 저녁 놀이 떠 오르면 4살 된 어린이가 울고 있는 장면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발달 단계를 분석하면서 그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 이미 6살 위의 형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4살 위의 누나도 그와 놀아주지 않았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3살과 4살이 된 A씨를 혼자 집에 남겨주고 일을 하러 직장에 나가야 했다. 어머니가 A씨를 데리고 직장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A씨는 거부를 했다. 어머니는 방에 빵과 음료수를 넣어주고 직장에 가버렸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황혼의 저녁 놀은 어머니가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이고 철제 대문을 바라보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A씨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는 것이 약 40시간의 분석에서 밝혀낼 수 있었다. 그는 황혼의 저녁 놀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어른이 되어 직장이 안정 되면서 혼자서 바닷가의 저녁 놀을 보기 위해서 xxx 해변가를 자주 찾는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 시점에서 형님으로부터 많은 폭력을 당했다. 형님은 스트레스를 동생인 A씨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 밝혀졌다. 그는 형님의 공갈 협박에 꼼짝달싹 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아버지는 친가의 4형제의 막내로 형님들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큰 형님은 조폭의 두목이라는 것을 A씨가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형님과 거리를 두고 형님의 보호 하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구두닦이(형님이 텃세를 막아주었다)로 시작을 해서 돈을 모았고 지금은 100억대의 부자가 되었다. A씨는 어린 시절에 가난해서 도시의 외각 지대에서 오두막집에서 살았던 기억을 회상을 했다. 다행히도 그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점에서 아버지의 경제적인 능력이 회복되어 아파트로 이사를 간 것을 회상을 했다. 그 시점에서 아파트 생활은 그에게 천국이었다고 회상을 했다.


A씨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점에서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이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노발대발해서 부부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어머니가 칼을 들고 싸우는 때도 있었고 경찰이 달려온 사건도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맛 바람을 피우면서 어머니가 모델에서 어떤 남자와 섹스 관계를 하고 있다는 제보를 아버지가 입수해서 경찰관을 데리고 급습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A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으로 헤어졌다.자녀들은 아버지가 보호를 하고 어머니는 혼자서 떠나갔다.

 

또 한 개의 사건은 고교 1학년 시점에서 터졌다. 형님이 A씨를 괴롭히는 것에 A씨가 반기를 든 것이었다. A씨는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형님의 폭력에 맞대응을 해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A씨가 형님에게 맞아서 이빨이 4개가 부러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누나는 일찍 시집으로 집을 떠났고 형님 역시 일씩 결혼해서 집을 떠났다. 그 이후에는 형님으로부터 폭력은 없었다.


이 시쯤에서 A씨는 수능을 앞두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공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서울 대학에 실패를 했다. 삼수 끝에 명문 대학인 xx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생활을 포기를 했다. 학점 미달로 학사 경고를 받고 군에 입대를 해서 군복무를 하면서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니 막막해서 할 수 없이 그의 특기인 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을 했다. 전역 후에 대학에 복학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에 올인 했다. 그 결과 공과 대학에서 1 등으로 졸업을 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을 했다. 그는 부모님의 이혼에서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았고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주 만나고 있었다.

 

A씨의 미국 유학은 아버지가 전적으로 지원을 해 주었다. 미국의 유학 길에 아버지가 동행을 해서 미국의 현지에서 원룸과 생활 비용을 전액으로 지원해주었다. A씨는 공부만 했다.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붕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분석으로 밝혀졌다. 공부로써 자신감을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 유학 2 -3년이 흘러간 시쯤에서 아버지와 결혼한 누나의 가족이 함께 여름 방학 때 미국에 여행을 온 것이었다. 그날이 하필 토요일 이어서 A씨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시간과 맞물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A씨에게 한국에서 모처럼 가족들이 왔으니 교회를 가지 말고 미국의 도시 구경으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요구를 했다. 그러나 A씨는 거부를 했다. 여기에서 아버지가 폭발을 한 것이었다. 가족을 선택하느냐 혹은 교회를 선택하느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독촉을 했다. A씨가 아버지의 요구에 교회에 가버렸고 아버지는 그 다음 날에 아버지는 누나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 비행기를 타버렸고 아버지와 A씨의 관계는 끝이 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유학 비용을 단절해 버렸고 A씨는 남은 4년의 기간 동안에 혼자서 고학으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버티어 냈다고 눈물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다행히도 7년의 각고 끝에 박사 학위를 얻어서 귀국을 했고 아버지와는 화해를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직장을 구하는데 따라다녔다. Xx 대학에 교수 채용에 응시를 했지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포기를 했다. 다행히도 xx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전임으로 일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지금의 전처를 만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극구 반대를 했다. 좀더 신부의 집이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집안을 원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이미 임신 3개월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이것을 이야기를 했지만 아버지는 들어주지 않았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끝이 났다. 결혼 식에는 어머니를 제외한 친가 가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은 아버지의 눈치를 챈 형님이 결혼 식장을 난투극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결혼 이후에 처가 집의 장인 장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첫째 딸이 태어났고 그리고 장모님이 양육을 맞아서 도와주었다. 그는 7년간 결혼 생활에서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지만 그가 어린 시절에 받은 심리적인 상처가 계속해서 부부 사이에 등장하면서 부인을 수 차례 폭력을 행사하고 강압과 갈등으로 부부 생활이 파경에 도달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인에게 이혼을 주장하고 전세 집과 자동차를 모두 양보하고 몸만 집에서 나와버렸다고 호소를 했다. 이후에 부인과 재결합을 요구했으나 부인은 거부를 했다. 결국은 이혼으로 종결 되었다. 그는 친가와 처가로부터 고립이 되었다.


분석 치료 초반기에 치료자는 A씨가 우울증이 아니고 보드라인 장애로 인격장애, 성격장애인 것을 밝혀냈다. 그가 사면 초가가 되면서 혼자된 고립버림받음에 충격을 받아서 자살을 결심을 여러 번 했다고 실토를 했다. 그러나 마침 부인의 권유로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전공대학에서 12명의 교수들과 완전히 단절되어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시 4살 때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내면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 대화 치료가 시작되었다. 분석치료의 과정에서 48시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는 7년 동안 단절되었던 형님과 만나서 그 동안 쌓인 감정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치료 회기 시간에 형님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를 대화 훈련을 수 없이 가졌다. 그가 형님에게 전화를 하게 했다. 식당이나 커피숍이 아닌 형님의 집에서 가족구성원들을 배제한 체 최소한 2시간 이상의 대화를 가질 수 있는 형님의 집을 선택을 했고 형님의 허락을 받아서 형님과 독대로써 4시간의 긴 시간을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쌓여왔던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형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를 했고 A씨 역시 울면서 서로 포옹으로 마무리가 되어 형님과 관계가 회복 되었다.


아버지와 A씨의 분석에서 아버지가 아들 A씨를 어린이처럼 간섭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그의 지시에 부응하지 않으면 처벌과 폭력이 따라온다는 것이 분석에서 밝혀졌다. 그 증거로써 아버지는 A씨의 미국 유학 때 어린이를 데리고 가는 것처럼 27세의 아들의 손을 붙잡고 비행기를 탔던 기억을 회상을 했다. 미국에서 아버지가 누나와 가족과 첫 여행에서 아들의 교회에 참석을 아버지와 관계와 연결시켜 강제로 강압을 한 것과 그리고 결혼 시쯤에서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을 반대한 사건들을 연결 시키면서 아버지가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을 초등학교 어린이처럼 간섭하는 것은 정장이 중지된 유아기 자아를 요구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잘못된 훈육을 조목조목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대화 훈련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누가 먼저 만날 용기가 있느냐? 라는 질문에 A씨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대면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내었다.  치료 회기가 78시간을 지나갈 무렵에 드디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아버지와 통화를 했고 아버지와 대화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아파트에서 아버지와 만남으로 5시간의 대화를 가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대인관계와 그 결과로 A씨가 파괴, 붕괴된 대인관계들을 이야기를 해서 아버지의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다.


 A씨는 그 동안에 대학의 동료 교수들과 한 사람씩 일대일로 그들을 만나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과 이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보드라인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는 부인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빈손으로 나와서 원룸을 얻을 돈이 없었다. 고로 그는 대학의 자신의 연구실에서 지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커튼을 치고 불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복면으로 저녁 때는 학생들 혹은 교수들과 만남을 피하면서 혼자서 외톨이로 살아온 것이었다. 그는 한때 자살을 꿈꾸었고 마스크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누가 걸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막가파 인생을 살면서 묻지마 살인을 계획을 했다고 실토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삼에 희망과 용기를 얻어서 12명의 교수들을 일일이 만나서 그의 약점을 실토하고 이해와 도움을 요청을 했다. 동료 교수들은 나이가 제일 젊은 A씨를 지원해주고 격려해주고 도와주었다. 그는 원룸을 얻어서 대학의 인근에서 기분 좋게 남의 눈을 학생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생활할 수가 있게 되었다. 치료가 96 시간을 지나갈 무렵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4살 때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이의 외로움과 고통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어머니와 대화에서 어머니는 A씨를 임신을 했을 때 친정 언니가 결혼 후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 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 비밀을 A씨에게 처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는 A씨를 유산하려고 시도를 했다는 것도 털어 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A씨 사이에 처음으로 대화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이후에 누나와 만남으로 가죽 구성원들과 그리고 대학의 동료 교수들과 관계가 뚫리게 되면서 A씨의 대인관계가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그가 살던 그곳을 방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가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집은 개발이 되어 유일하게 작은 터널만 남았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의 과거를 떠나 보내는 마지막 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그의 안식년의 1년을 보내고 대학에 복귀를 해서 다시 6개월간 치료를 계속하면서 1주일에 1회 혹은 2회로 치료 시간을 조정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교수로써 최고로 작은 구형의 모닝 승용차를 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자 자랑스럽게 자신의 모닝 승용차를 타고 전국을 일주를 하면서 여가를 즐겁게 보내는 생활을 하면서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아직도 2%의 치료가 남아 있다는 말을 남기고 치료를 종료를 했다. 350시간으로 1주일에 1회로 계산을 하면 약 4년간 심리치료를 받은 셈이 되었다.


A씨는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특징인 자아의 혼란스러움으로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번씩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왜 자신이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혹은 왜 자신이 한 때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에 심취를 해서 그가 졸업 후에 아파카니스탄 혹은 우주베키스탄 등의 오지의 나라로 선교사가 될 것이라고 결심을 했든지 ? 혹은 지속적으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는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만족했다. 자신의 자아 주체성을 찾으려고 미국에서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목회 상담자로부터 상담을 받았던 것을 회고를 했다. 그리고 외로움에 치쳐서 자살을 결심을 했다. 그는 친가와 처가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고 외톨이가 된 자신을 미워하고 처벌을 해 왔었다. 그리고 좌절에 견딜 수가 없어했다. 부인과 조그만 갈등이 폭발해서 폭력으로 이어진 것을 후회를 하면서도 7년 동안 약물에 의존해서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리치료를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부인과 갈등에서 먼저 이혼을 꺼내 들었고 부인이 울면서 이혼은 안 된다 라고 호소를 했지만 결국은 이혼으로 밀고 나갔다고 이후에 후회를 한 감정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급변하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21세기의 자아의 치료는 끊어진 연결 관계를 회복시키는 통합의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을 치료자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끊어진 경험들을 통합하고 자신감을 들어 올리고 단절된 대인관계를 회복하는 것에서 그리고 불안정한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치료로서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대화 치료를 사용해서 공허함과 외로움과 버림받음의 해결에 치료의 초점을 맞춘 것은 7년 동안의 약물 치료에서 벗어나지 못한 A씨를 성공적으로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본인이나 혹은 부모님의 경우에 자녀들이 우울증 혹은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고 2 3년 동안 약물 치료 혹은 심리치료 혹은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 분들은 치료 효과에 불만족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핵심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 보고 자아 장애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경우에는 내 신분이 궁금하시면 부산의 부경대학의 수산교육학과에 전화를 걸어서 10년 전에 김종만 교수님이 20년 동안 그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지 확인을 해 보세요(부산부경대학교 (051) 629-4114). 아니면 내 홈페이지에 치료자의 학력과 경력에 들어가 보세요.


혹은 전문서적 안내란에 들어가서 내가 읽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 놓은 전문서적들의 목록을 보시면 내 실력과 경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로  먼저 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세요(http://www.psychclinic.pe.kr-정신분석 심리치료). 그리고 치료 사례들을 소상하게 읽어 보세요. 나는 분석 치료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치료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이론적인 뒷받침이 필요 합니다. 치료의 사례를 읽어 보시고 치료에 대한 확신이 드는 경우에는 아래의 사항에 해당되면 결단을 내리세요.


1). 치료자의 블로그 혹은 홈 페이지에 들어가서 치료자의 자아의 이론과 자아 치료과정에 대해서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든다면 망설이지 말고 전화 혹은 메일을 보내주세요(e-메일: jongmankim@hanmail.net),psychclinic@naver.com)


2). 부모님에게 반드시 자신의 문제를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세요. 혼자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분노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분노, 미움, 적대 감정은 치료의 과정에서 말로써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방출하고 나면 부모님과 관계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서 독립하는 문제는 치료의 과정에서 치료자의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무조건 부모님과 단절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과 감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부모님의 문제는 부모님 자신의 것으로 간섭하지 않고 나는 내 자신의 문제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됩니다.


3). 마음 속에 치료를 받아 보시겠다고 확신이 들면 2 시간 컨설팅을 받아 보세요.6개월의 치료 계약을 하기 전에 한번 컨설팅을 받아서 2시간 분석 상담을 받아 보시면 핵심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 등의 윤곽을 분석으로 알려드립니다.


4) 지금 현재 내 자아가 상처 이벤트 이후에 전진이 없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면 자아 장애가 확실합니다. 친구들, 동료들은 하루 하루가 다르게 진전을 하고 진급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미래가 보이는데 나는 아직도 제자리에서 머물고 있다면 자아의 성장이 중지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는 뒤로 미루면 차일피일 늦어집니다. 눈덩이처럼 계속 커지게 됩니다. 고로 너무 늦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적합한 시기이다 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5) 첫 시간에는 부모님과 함께 오시든지 혹은 혼자 오든지 간에 2시간을 부모님과 같이 컨설팅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10분 혹은 20분 동안에 하고 부모님은 치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본인과 1시간 30분 정도 분석 상담 후에 부모님과 함께 30분 동안 문제의 핵심 원인과 치료의 방향과 어떻게 치료를 할 것인지?를 브리핑을 해 드립니다. 물론 2시간 컨설팅 비용은 6개월의 치료 비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궁금 하시면 언제든지 전화 혹은 메일로 연락을 주세요.

010-4512-1275

김종만

나는 현재 72세로 대학 강의에서 10년 전에 명퇴를 하고 월요일-금요일까지는 서울에서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부산해서 심리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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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역사: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

          : 미아레(Meares).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해리석적 모델(2012), 놀이의 은유(2005)

          : 건드슨(Gunderson). 보드라인 성격장애의 치료 사례(2001), 보드라인 성격장애(1984)

          : 모델(Model).사적인 자아(1996), 다른 시간 다른 현실(1996), 상상과 의미 깊은 뇌(2006), 맥락의 관점에서 본 정신분석(2001)

          : 헤드트와 스톨러(Herdt & Stoller, 1990). 친밀한 커뮤니케이션

          : 제로고타와 칸노(Georgotas & Cancro, 1988). 우울증과 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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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치료자가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되어져 있으니 치료자의 정신분석 심리치료의 홈 페이지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블로그에는 항상 치료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 이유는 이론 만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치료의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치료의 경험과 치료 이론의 일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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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치료 사례는 치료자의 강의를 듣고 있던 한 대학생을 컨설팅 한 내용입니다. 그는 쌍둥이 형재로 형은 군대 장교로 입대를 했고 H군은 대학 4학년으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휴가 차 나온 형님에게 물어 본 결과 형님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환청임을 알게 되었다고 치료자를 찾아오게 된 학생이었습니다.


카우치에 누워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과 분석가

 

대상: 공과대학 4학년 학생 H


증세: 간간히 2년 전에 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신음 소리가 H군의 귀에 들린다


진단: 심리 검사지인 MMPI 검사 결과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진단되었음

연결: 치료자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난 후에 자신의 심리검사를 해보고 싶다고 요청해서 심리검사 후 면담을 하게 되었음


치료 기간: 2시간 동안 인터뷰 상담을 받은 후에 치료를 권유하였으나 학교 졸업으로 소식 단절


치료 결과: 치료를 받지 못했음

 

치료의 과정

 치료자가 강의를 하던 대학의 공과대학 4학년 학생이었던 H군은 치료자의 한 학기 강의를 듣으면서 자신의 문제를 한번 상담을 받아 보겠다고 해서 찾아온 학생이었다. 치료자가 대학 부설 학생 생활 연구소에 의뢰에서 H군이 심리검사를 받아보게 했다. MMPI 즉 미네소타 다중 성격 검사지를 통해서 심리검사를 해 본 결과 H군은 정신분열증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를 가지고 치료자와 약 2시간 동안의 면담을 하게 된 것이었다.


 H군은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저녁 때 자주 들린다고 했다. 처음에는 찐짜로 들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쌍둥이로 해군 장교로 입대한 형님이 휴가를 얻어서 H군의 집에 하루밤을 같이 머물 게 되었고 그 때 H군이 형님에게 "형님은 아버지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느냐?"고 묻게 되었고 형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H군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것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환청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H군은 어머니가 H군이 고등학교 시절에 세상을 떠나고 누님은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고 형님은 해군 장교로 군에 입대하고 아버지와 H군이 함께 살아왔다고 했다. H군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약 2년 동안 다른 여성과 동거 생활을 하였으나 그 여성이 떠나고 난 후에 암으로 투병생활을 해 오다가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2년 동안의 투병 생활 중에 아버지 병의 뒤바라지와 간호를 H군이 담당해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H군이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해 왔으나 H군은 점점 지쳐갔고 나중에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죄스러워 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약 5천만원을 돈을 가방에 넣어서 지금도 그 돈을 들고 다닌다면서 부담스러워했다. 왜 은행에 저축으로 맡겨놓지 않느냐는 치료자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떠나면 불안해서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H군은 심리치료를 받아보라는 치료자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치료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론적 근거

 H군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이 투사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음을 치료자의 해석으로 알 게 되었다. 아버지가 암과 투쟁 중일 때 간호를 하다가 H군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아버지가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게 되었다. H군은 최근에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잠을 잔다고 해도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아버지를 잘 간호하지 못해서 아버지가 더 오래 살 수 있는대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치료자는 H군에게 사람은 누구나 괴로우면 부모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문제를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H군 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H군의 죄의식을 덜어주려고 했다. 아버지의 신음 소리는 자신의 머리 속에 박힌 죄의식이 투사되어서 다시 자신의 감각으로 되돌아 오는 환청임을 깨달 게 해 주었다.


 건강한 사람들은 5 감각 즉 감각이 신체의 지각으로 바뀌고 이것이 생각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인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즉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 불효 자식으로 아버지를 제대로 간호하지 못했다는 죄송함의 생각이 지각으로 머리 속에 각인 되어있다가 이것이 다시 감각으로 바뀌어서 내 귀에 청각 감각으로 들리는 것이 환청임을 알도록 했다. 죄의식을 토해내고 아버지에게 잘못했음을 스스로 용서를 빌고 자신의 마음 속에 쌓어였는 죄의식을 감소 시키면 환청이 사라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상담을 끝마치게 되었다.


치료 결과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판명이 난 이상 장기 심리치료가 꼭 필요하다는 치료자의 권유를 H군이 듣지 않았다. 정신분열증은 중병으로 그대로 방치하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 후에 H군은 치료자의 심리치료 권유를 듣지 않고 군입대를 하고 싶다면서 장교 시험을 칠 것이라고 했다. 먼저 정신분열증에 대한 심리치료를 받은 다음에 장교가 되든지 사병으로 입대하든지 해야 한다는 치료자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이후에 H군이 군에 장교로 입대를 했는지는 소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