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열증(조현병)이 치료될 수 있나요? 1
우울증과 조증은 고대로부터 등장했지만 정신분열증은 고대와 중세에는 없었던 정신병이었다. 우울증의 역사적인 흔적은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을 하고 있다. 2명의 자녀를 가진 아폴로의 부인 리토(Lito)에게 14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다가 리토의 처벌로 14명의 자녀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돌로 변한 니오베(Niobe)의 인물에서 그녀의 돌로 변한 표정이 없는 얼굴의 묘사에서 우울증의 기록을 찾고 있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The Iliad)에서 아가메몬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면서 조증(mania)를 사용하고 있다. 조증이라는 mania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분노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어의 mania는 영어로 분노(wrath)이다(Georgotas & Cancro, 1988).
정신분열증은 현대 사회의 부산물로 본다. 정신분열증이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반기에 등장을 했다. 정신분열증은 1898년에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크레펠린(Kraepeline)에 의해서 편집증으로부터 분리되어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 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했다. 정신분열증의 발병은 주로 사춘기에 등장을 했기 때문에 젊은이가 치매와 유사한 정신혼란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독일어로 조발성 치매로 등장하게 되었다(Ellenberger, 1970).
그러나 젊은이들의 치매가 아니다 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세계에서 최초로 1860년에 스위스의 쥬리히에서 유럽에서 제일 먼저 대학 정신병원인 부르고졸리(Burgholzli) 정신병원을 세워서 정신과적인 질병의 연구를 시작했던 윌헬름 그레이싱거(Wilhelm Griesinger)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부르고졸리 대학정신병원의 제 3 대 총장이었던 유진 블루러(Eugen Bleuler)가 10년 동안 부르고졸리 대학정신병원에서 조발성 치매 환자들을 연구하고 치료를 하면서 1911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조발성 치매가 아니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신조어가 등장을 하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이라는 schizophrenia라는 용어는 분열이라는 그리스어의 schizo라는 말에 마음이라는 그리스어 phren에다 질병(illness)라는 그리스어가 조합으로 마음, 정신이 분열이 되는 질병이라는 말이 탄생을 한 것이다(Ellenberger, 1970). 블루러(Bleuler)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신조어와 그의 4가지 증세기술들의 특징은 지금도 기초적인 진단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연상(사고과정의 분열(association), 양면가치들 즉 모순의 분열(ambivalence), 감정(affect)의 분열 그리고 내면 세계로 철수(autism)라는 영어의 첫째 글자들인 A자를 따와서 4 A로 통용되고 있다(Bootzin et al, 1980).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분열증 대신에 조현병으로 마음의 여러 가지 기능들이 현악기의 현들이 서로 조율로써 조화를 이루지 않고 분열되어져서 따로따로 제각기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조현병으로 사용되고 있다.
쥬리히의 부르고졸리 대학 정신병원에서 치료 국장으로 있던 칼 융(Carl Jung)이 프로이트의 꿈 해석(1900)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프로이트에게 서신을 보냈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어 비엔나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룹에 가담을 하면서 정신분석학이 부르고졸리 대학병원의 블루러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수용이 되어 대학 정신병원의 모든 스텝들이 의무적으로 정신분석학의 학습에 열기를 보여준 일화는 유명하다(Ellenberger, 1970). 이후에 융은 스위스 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그리고 국제 정신분석학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을 했지만 정신분석 이론들을 문화와 종교적인 분야로 확대 너무 광범위 하게 확대 해석을 하게 되면서 비엔나 그룹과 스위스 그룹의 갈등으로 1913년에 융 학파는 비엔나 그룹과 결별하고 말았다.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정신분석학의 응용은 많은 연구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정신증(편집증, 조울증과 정신분열증, 성격장애)에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신경증 치료에만 사용할 것을 강조를 했다. 그 이유는 정신증에서는 전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정신분석학을 개량하고 개선해서 이론적인 수정을 가하게 되면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핵심 인물이 프로이트의 제자로써 비엔나에서 1923년에 영국으로 소아정신분석학을 강의를 초대받아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귀화하게 된 메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이다. 그녀는 소아 정신증 어린이들을 치료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꿈 분석 대신에 놀이 치료를 고안해서 유아들의 상상의 세계를 정신분석이라는 마음의 현미경으로 소상하게 밝혀내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그의 이론을 프로이트와 다른 이론으로 편집성-자아분열 유형과 우울한 유형이라는 신조어로써 자아(ego)는 출생 시부터 작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ego의 분열과 쪼갬에서 시작해서 통합으로 자아가 성장해 가는 과정을 기술한 유형 혹은 위치(posi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ego의 발달 위치가 어디에서 머물러 있는가?를 기술하면서 편집증, 정신분열증 그리고 성격장애의 치료에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녀의 제자로써 정신증 연구에 참석을 하게 된 세 사람의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응용이 시작되었다. 폴랜드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서 영국에서 정신분석가 자격증을 획득하고 크레인 밑에서 공동 연구를 시작한 한나 세갈(Hana Segal), 독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었으나 나치의 박해로 영국에 돌아와서 정신분석가의 자격증을 획득하고 크레인의 연구에 동참한 하버트 로렌필드(Hebert Rosenfeld) 그리고 영국의 의사 출신으로 정신 분석가가 되어 그녀에게 가담한 비용(Bion)에 의해서 본격적인 정신분석학으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연구에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로써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고 분석가가 되고 나서 생물학적인 이론에서 탈피해서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셀리번(Sellvian)의 제자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수정해서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대인관계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프로이트 이론을 수정하게 된 신 프로이트 학파(neo-Freudian)들인 셀리번, 프롬-레이크만(Fromm-Reichmann), 독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정신분석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온 호르니(Horney) 들이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와 치료에 착수하게 되었다.
셀리번의 제자로써 레이크만과 하놀드 실(Harlod Searles)이 미국의 체스트 낫트 롯지(Chestnut Lodge) 정신병원에서 입원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약물 치료가 아닌 순수한 정신분석적인 치료의 응용으로 성공적인 치료 사례들이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에서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열증 치료에 뛰어들게 되었다.
1950년데 이후에 미국에서 정신분열증의 연구에 탁월한 이름을 올리게 된 학자들이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사무실 통원 치료를 시작을 했다. 이 시쯤에서 성공적인 치료 연구서인 “정신분열증의 해석”이라는 저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펜실바니아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아리에트(Arieti, 1950)를 비롯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에일 의과 대학을 졸업한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 교수인 토마스 오가덴(Thomas Ogden)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 교수인 정신분석학자 브라이스 보이어(Brice Boyces) 그리고 일리노이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지오바치니(Giovacchini) 등이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도 전이가 형성되어질 수 있다는 연구 논문과 저서들이 출판되기 시작을 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정신분석학적인 치료가 확대되고 활기를 띄기 시작 했다.
치료자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대학, 대학원, 전문의 대학원(인턴 과정)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총 35년 동안 심리과학과 정신의학을 연구하고 치료를 하면서 위의 학자들의 이론들과 치료 기법들을 적용해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많이 치료를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들 중에서 대부분이 부모님들의 정신분열증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정신분석 치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초반기에 성공적인 치료 효과를 보여주면서도 장기적인 치료를 계속하지 않아서 치료가 무산된 안타까운 경험들이 많다.
정신분열증의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그 환자의 증세들 그 자체 즉 환각과 환청인 증세들의 그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결함을 분석으로 찾아내고 그 결함을 다루어 나가다가 보면 환청과 환각을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정신분열증은 뇌의 이상으로 보는 신경정신과 의사들과의 약물 치료는 환청과 환각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지만 약물로써 장기간 치료를 하게 되면 결국은 감정을 죽여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무감각으로 기계적인 둔감한 사람으로 변해버리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초반기에는 약물 치료로써 환청과 환각을 제거한 후에 그 환청과 환각들의 근원을 찾아내서 그 환청의 조각들이 어떻게 서로 퍼즐처럼 맞추어지게 되었는가?를 분석으로 환자가 이해를 하도록 하면서 약물을 줄여 나가면서 자아의 결함을 수정해서 약물의 힘이 아닌 자아의 힘으로 갈등과 긴장을 그리고 감정들을 스스로 통제하고 컨트롤하도록 만들어주는 과정이 정신분열증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치료의 핵심이다. 고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근본적인 자아 수정으로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부모님들은 정신분열증의 초반기에 약물로 환청과 환각이 사라지면 치료가 다 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리고 환자가 조용해지고 감정이 무디어지는 것을 치료가 잘 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스트레스와 갈등이 등장하게 되면 재발이 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약물 치료가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쯤에서는 벌써 정신분열증의 진행이 5년 혹은 10년으로 흘러가버리게 되고 자녀들은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평생 동안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된다.
치료자는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를 해 본 경험으로 성공적으로 치료를 하게 된 세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31세의 젊은이로써 그는 군대 복무 후에 대인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두문불출로 집안에서 칩거하던 중에 그의 아파트 앞 동에서 40대 초반의 한 부인과 그녀의 10대 딸이 그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거실에서 그의 활동을 쳐다보고 감시하고 조롱하고 비웃음을 당하면서 6개월 동안 견디다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파트의 도어문 벽에다 --xxx 같은 년!--- 이라는 섹스적인 욕설들을 스프레이로 휘 갈려 몇 번을 썼다가 계속해서 감시와 조롱과 비웃음에 참을 수 없어서 두 번이나 그녀의 도어 문에 신문지로 불을 지르려고 하다가 앞 동의 주인에게 적발되어 경찰서로 끌러갔다가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청년으로 그의 아파트 거실을 훔쳐 보았다고 주장을 했던 그 중년 여성과 10대의 딸은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 그의 환청임이 드러나면서 그의 어머니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치료를 요청하게 되면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심리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는 3개월간 입원 치료 후에 퇴원해서 약물이 그의 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약물 복용을 거부하고 1주일에 3회씩 1회에 2시간의 치료 회기로 치료를 시작해서 약 2년 동안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은 결과 약물의 복용 없이 환청이 깨끗하게 사라진 치료 사례였지만 아버지가 IMF로 사업에 부도가 나면서 치료를 지속하지 못한 안타까운 치료 사례였다.
두 번째는 50대 초반의 부인으로 10년 동안 환청과 환각으로 정신병원에 3년마다 한번씩 재발로 입원한 정신분열증 환자로써 그녀의 아들이 불안장애로 치료자에게 6개월간 심리치료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분석 치료 4년 후에 그의 어머니가 잠에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으로 치료자에게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의뢰하게 되면서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아서 1주일에 2회로 1회기당 3시간으로 6개월간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은 결과 정신분열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의 상처의 고통이 그녀를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분석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환청과 환각은 어린 시절의 상처의 부산물로써 조각조각으로 퍼즐들이 맞추어지면서 불면증과 환각과 환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 번째 환자는 27세의 청년으로 5년간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청년으로 3번이나 1달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그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정신분열증의 진단으로 의병 제대를 하고 대학에 복학 후에 세 번이나 학업을 중단한 청년으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3시간 30분으로 왕복 7시간의 교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시간 심리치료를 1주일에 5회씩 시간 당 2시간으로 1주일에 10시간을 그리고 두 번째 주일부터는 1주일에 1회로 3시간 분석 치료 회기를 가지게 되면서 2017년 3월에 대학에 새로 입학을 해서 지금은 환청과 환각에서 해방되어 학교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 대학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상: 57세의 부인 D씨
증세: D씨는 2000년도에 환청으로 6개월 동안 xxx 신경 정신과에서 약물 치료를 받았고 7년 후 2007년에 환청이 다시 재발 xxx 종합 병원에서 1년 동안 약물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으나 2008년에 다시 불면증으로 1.5개월 동안 xxx 종합 병원에 입원 후에 몇 개월 동안 안정되었으나 다시 한번 불면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음. 이후 지금까지 3년 동안 정신분열증,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약물을 계속 복용해 오고 있으나 최근에 불면증이 심해져서 불면증 약물 투여량을 증가시켜 복용하고 있으나 별로 효과가 없다고 했음
연결: D씨는 2년전에 결혼해서 분가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의 아들이 불안증과 대인관계 때문에 치료자 한데서 6개월 동안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았던 사람으로 그 때 그가 그의 어머니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그의 어머니를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게 하려고 다짐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최근에 약물 치료에 크게 실망한 어머니를 설득해서 어머니가 스스로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음
치료 기간: D씨는 첫 2 시간 인터뷰 이후에 1주일에 1회로 1회기 당 3시간씩 분석 치료를 하기로 했음.치료자는 보통 1주일에 1회로 1회기 당 2시간으로 치료를 하고 있으나 정신분열증의 경우는 보통 1주일에 1회로 하면 인터벌이 너무 길어서 환자가 참고 기다리기 어렵기 때문에 1주일에 3회 혹은 4회로 치료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xx 지역은 치료자가 1주일에 월요일만 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시간을 내어줄 수가 없으므로 1회기 당 3시간으로 조정을 하기로 했음. 아래의 분석은 첫 2시간 인터뷰 후에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D씨의 문제점을 분석한 것이다.
치료의 과정
치료자는 첫 인터뷰가 시작될 때 특별히 환자들에게 이곳 치료실에서는 나이나 예의 범절에 신경쓰지 말고, 말을 조리있게, 논리적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순서없이,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하라고 권유를 한다. 이유는 이곳에서 긴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 이다. 편안하게 앉아서 편한 자세로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 대로 하라고 유도를 하는 것이 첫 인터뷰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치료자가 가장 신경을 쓰서 강조를 하는 말이다.
D씨가 치료자와 인터뷰 시작 때 제일 먼저 털어 놓은 말은 이곳에 온다고 어제 저녁에 시간 약속을 정하고 난 다음에 신경이 쓰여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했다. 수면제를 평소보다 한 알 더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어떤 생각이 들어서 잠을 자지 못했으나고 물었을 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벤트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떠올라서 밤새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D 부인의 증세 에피소드들
D씨는 나이 보다는 젊어보였다. 현재 나이는 57세로 정신분열증이 처음 발병을 했을 때가 2000년으로 지금은 2011년이니 벌써 11년이나 되었다고 한탄쪼로 말을 했다.
D씨는 환청으로 2000년에 6개월 동안 xxx신경 정신과에 통원 치료로써 6개월 동안 약물 복용으로 환청이 사라져서 D씨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해서 약물을 중단했다. 이후 7년 후에 2007년에 다시 환청이 재발해서 1년 동안 xxx 종합병원에서 1년 동안 약물 복용으로 좋아졌으나 이후에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되어 다시 xxx 종합 병원에 반쯤 응급실로 실려가서 1.5개월 동안 입원 했고 이후에 퇴원을 해서 몇 개월 동안 좋아지는 듯 했으나 다시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게 되자 응급실에 실려가서 다시 항우울제와 항 불안증과 수면제를 투여 받았으나 잠이 오지 않자 병원에서 담당 의사 선생님이 더 이상 병원에서 투약을 할 수 있는 양의 수면제와 항우울증, 항불안제 등을 다 투여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최후의 통첩을 받고 병원에서 쫒겨 나와서 집에 되돌아와서 남편이 D부인의 팔과 몸을 쓰다듬어 주게 되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 3년 동안 xxx 종합 병원에서 약물을 계속해서 복용해 왔으나 최근에 다시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다시 수면제를 1.5알을 증액해서 복용해 오다가 며칠 전에 1알로 낮추어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고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D부인의 삶의 역사
D부인은 4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이나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D부인을 외할머니에 맡겨두고 재혼으로 떠났다. D부인은 외할머니와 11살 때까지 같이 살다가 다시 어머니의 가족으로 되돌아갔다. 어머니는 재혼으로 D부인이 그 가족 구성원이 되었을 때 4살되는 여동생이 있었고 이후에 3명의 배다른 동생들을 두게 되었다. D부인은 그녀 스스로 자신은 말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 진단을 했다. 양아버지 역시 말이 없는 사람으로 그녀와 양 아버지 사이는 늘 서먹서먹했었다고 털어 놓았다. 밑으로 두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들이 태어났고 특이 두 명의 남동생들을 D부인이 업고 다니면서 반쯤 키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한지 두 명의 남동생들은 D부인을 잘 따르고 좋아한다고 했다. 특별히 D부인의 바로 밑에 7살 아래인 여동생은 D부인이 엄마 집에 갔을 때 4살이었다고 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약 7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어머니가 남편에게 하소연을 해서 D부인을 같이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었고 그 때 D부인은 11살 이었다. D부인이 엄마 집에 갔을 때 4살이던 여동생과는 7살 차이가 나는데도 항상 그녀는 여동생과 다툼에 늘 지는 경향이었다. 여동생은 언제나 언니 D와 싸움에서 지는 적이 없었다. 갈등이 생기면 7살 위인 언니는 늘 울었고 여동생이 이기는 편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에 D부인은 23살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부모님이 심성이 착하고 직업도 탄탄하다는 말에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한번도 직업이 무엇인지 혹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를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결혼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직업이 없었고 학력도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사람이었다. 남편은 2살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재혼으로 양모 밑에서 자란 사람으로 밑으로 배다른 동생들이 6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누나가 한명이있고 그 누나는 남편의 친 어머니 한데서 태어난 사람으로 이후에 양모가 들어와서 다시 6명의 가족이 생기는 바람에 모두 가족이 8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양모의 여동생 즉 이모가 가진 배에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이모가 배를 처분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했다. 직장이 없자 어머니가 사둔 땅에서 목축을 하기로 했다. D부인은 결혼 전에 목제소에 경리로 3년간 다녔고 시집가기 위해서 모아둔 돈으로 젖소를 2마리 사고 그리고 어머니가 젖소를 국가로부터 분양을 받아서 모두 10마리 정도로 목축을 시작했다. 결혼 후에 남편과 D부인은 젖소 목축에 전심전력을 다 쏳았다. 어머니는 젖소들이 늘어나자 일하는 인부들을 더 붙여주지 않았다.
착한 남편과 D부인은 말없이 죽으라고 열심히 일을 했다. 젖소들이 늘어났지만 양 아버지가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는 바람에 늘 젖소들을 팔아서 그 밑천으로 들어갔다. 목축 사업으로 5년이 지나가면서 남편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D부인은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과 싸우고 싸웠다하면 주먹다짐에 피가 터져서 맞고 집에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혼 후에 5년 만에 예비군 훈련을 갔던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되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러기면서 집에 돌아오는 꼴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은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고 이것을 그녀는 이후에 알 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을 했으니 당연히 남편은 고등학교를 나왔을 것이라고 상상을 했으나 직접 물어 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직업도 없는 무직으로 일자리가 없어서 어머니가 사 놓은 산지에 젖소를 사육하는 목축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 D씨와 남편은 죽도록 불평없이 어머니에게 충성으로 일을 했다. 어머니는 D씨와 남편이 정성들여서 양육을 한 젖소들을 한 마리씩 팔아서 양부가 실패한 밑천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미안해서 돈을 조금 모아서 산 산지에 더 크게 목축을 하려는 개획을 세우면서 땅을 사게 되어 D씨의 남편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려고 했으나 D씨가 미안해서 D씨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하자고 우겨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등기를 했고 어머니는 이 땅을 팔 때 절반으로 서로 나누자고 약속을 했다. 목축을 한지 7년이 지나가는 어느날 새로 옮긴 목축장이 매매가 되었으니 비워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연실색을 했다. 몇 개월 전에 이야기를 해서 옮길 곳과 살 곳을 준비를 해 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더욱 대경실색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D부인에게 돈을 쥐어 주면서 집을 나가라고 했다. D부인은 울면서 매매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안된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그런 것이 어디있느냐고 하소연을 하자 어머니는 D부인에게 언어 폭력을 퍼부었다. "xxx 년아! 벼락 맞아 죽어라",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여죽을 것"이다. 등등으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쏟아냈다.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데 이번에는 양부가 다시 계산이 잘못 되었으니 새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서 D부인에게 요구를 했다.
이예 격분한 D씨의 어머니가 죽은다면서 목을 멘다고 산으로 올라가서 D부인이 남편을 시켜서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양부가 다시 계산을 해야 한다면서 새로 계산을 해서 돈을 더 빼앗아 가려는 것에 분노해서 자살 소동을 일으켰고 양부는 더 이상 그 문제를 끄집어 내지 않았다고 했다. D부인은 분노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인근 소도시에서 대 도시로 이사를 와야 했다. 팔린 목장 근처에서 목축을 하려고 시도를 해 보았으나 허가가 나지 않아서 실패를 하고 목축을 포기하고 대 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남편은 개인 택시를 하게 되었고 첫 5년 동안은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고 했다. 이제는 남편은 택시 회사 소속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은 나아졌으나 부인 D씨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 후에 그리고 지금까지 쌓인 한이 맺힌 것들을 쌓아두고 마음 속에서 곪아터지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첫 번째 정신분열증 발발: 2000년 xx월 xx일에 그녀는 첫 환청을 가졌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처음으로 환청을 가졌을 때 정말로 그녀의 머리 속에서 두 사람이 싸움을 하고 다투는 것으로 느꼈다. 그들의 말들은 10년이 지나가서 지금은 정확하게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대충 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그녀의 환청을 다음과 같이 기술을 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 두 사람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에게 말을 하기를 "친모가 양모가 된다--- 양부가 된다---연인인 대학 교수가 그녀에게 화장을 예쁘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니 그녀가 화장을 하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쪽으로 그렇게 하면 넘어어진다--그래서 그녀가 넘어졌다.---그녀가 울 때 울지 마세요 라고 한쪽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등등 이었다. 대충 환청의 내용은 유추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집 근처에 있는 xxx 신경 정신과에 가서 약물을 복용을 했고 6개월 후에 환청은 사라졌다. 그 시즘에서 그녀는 그녀의 머리 속에서 들리는 말들이 환청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후에 그녀는 별일 없이 7년의 세월이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정신분열증의 재발: 2007년 xx월 xx일에 그녀는 두 번째 환청을 가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가진 첫 사랑의 군인이 환각으로 직접 눈에 보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목제소에서 경리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한 군인 장교를 알 게 되었고 1년간 사귀게 되었다. 서로 편지를 교환했고 그 군인 장교가 더욱 열성적이었다. 그는 D부인의 어머니를 찾아와서 1년 정도 기다려 주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가 1년을 기다려줄 수 없다고 거절을 했고 두 사람은 결별을 했다. D씨는 그 군인과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 군인이 환각으로 눈에 보였고 환각 속에서 그녀는 그 군인과 데이트를 하면서 극장에서 본 외국 영화의 주제곡을 그녀가 부르고 있었다고 했다. 낮에 자다가 일어나서 환각 상태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가족들이 붙잡아 들여왔다고 회상을 했다. 그리고 "그 군인이 죽었는데 너(D부인) 때문이야" 하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군 장교가 죽었는지는 그녀 자신이 지금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가족들에 의해서 xxx 종합 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D부인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외할머니와 함께 7년 동안 살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외할머니 역시 첫 결혼 후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인 엄마를 데리고 재혼을 했으나 두 번째 결혼에서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으나 몇 살 되지 않아 죽어 버리는 바람에 자식을 더 이상 가질 수가 없었고 딸인 어머니가 재혼으로 집을 떠난 후에 외손녀인 4살된 D부인을 데리고 7년을 같이 살 게 되었다고 했다. 재혼한 엄마의 가족 품으로 되돌아 가기 전에 외할머니는 시골의 5일 장만 되면 빠짐없이 시장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와서는 죽은 아들들의 무덤을 찾아가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버릇이 있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러할 때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D부인이 부엌에 들어가서 죽을 끓여서 외할머니를 돌보아주었던 시절을 회고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으로 그 시절에는 D부인이 외할머니를 돌보아주면서 외할머니의 집안 살림을 살았었다고 회고를 했다. 외할머니가 재혼으로 낳은 두 명의 아들들을 몇 살이 되기도 전에 잃어 버리자 그 상실 때문에 외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가 술을 마시도록 권유해서 이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시장에 가서 술을 마시는 술버릇이 생겼다고 외할머니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했다. 외할머니를 돌보아주면서 살던 외 손녀는 11살이 되면서 그렇게 외할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새 아버지의 집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D부인은 재혼한 어머니 집에서 살면서 방학 때가 되거나 시간이 나면 자주 외할머니 집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집을 가기 직전에 외할머니 집 동네 근처에 살던 생부(D부인의 친 아버지)의 동생(작은 아버지)의 딸이 그녀를 찾아와서 생부의 사진이 있는데 가져 가겠느냐로 물어왔으나 D부인은 그냥 웃고 말았다고 기억을 회고를 했다. 한번씩 외할머니의 동네를 방문하면 그 작은 아버지의 딸을 한번씩 만났는데 그녀가 D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회상을 했다. 지금 그녀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왜 그 때 친어버지의 사진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한 적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D부인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양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와 양부는 부부 금슬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양아버지는 술 집 바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가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준비한 집을 지어서 파는 사업을 다 마련해 놓으면 양부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귀가 얇아서 팔아 버리는 바람에 손해가 나게 되고 늘 이것을 두고 두 사람은 끄칠 날이 없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양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D부인이 결혼 후에 기르게된 목축에서 젖소들이 자라면 그 젖소들을 팔아서 양부의 실패한 돈들을 메꾸어 넣어온 것을 회상을 하면서 쓸쓸해 했다. 이러한 부모 사이에 갈등들을 보고 사춘기를 보내면서 D부인은 가족 분위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을 억압해 온 것이었다. 늘 어머니에게는 미안하고 양부에게는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어 왔다고 시인을 했다.
분석의 결과
23세에 결혼을 해서 33년이 흐른 지금 그녀의 쌓인 분노와 적대 감정과 불신, 배신감 등이 누적이 되어 한계점을 넘어간 것이 처음 정신분열증의 발발의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양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감정이 쪼개져서 좋은 긍정적인 말들은 할 수 있었으나 부정적인 말들은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결혼에서 7년 동안 노예처럼 일을 해서 열심히 일을 했으나 어머니는 딸 가족을 내 쫓아낼 때 처음으로 D씨는 어머니에게 대들면서 하고 싶은 몇 마디의 말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몇 배 더 크게 분노로 땡깡을 부리면서 저주의 말들을 퍼부었다. "벼락을 맞아죽을 것"이라느니 혹은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어죽어 버려라" 하는 저주의 언어 폭력을 퍼부었다. 한번은 D씨의 딸이 덤프 트럭에 치일 뻔한 일이 있어서 어머니의 그 저주가 딸에게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의아스럽게 생각을 했다고 했다.
첫 번째 정신분열증 에피소드 폭발 때 친정 어머니가 D씨를 방문해서 D씨가 죽을지 모른다고 걱정을 하면서 통곡하고 울면서 사위(D씨의 남편)를 보고 욕을 퍼부우면서 "멀쩡한 내 딸을 데리고 가서 이렇게 불치병에 걸리게 했으니 내 놈이 물어내라!"고 호통을 치면서 난리를 쳤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장모 님에게 이런 욕설을 바가지로 덮어 쓰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 한쪽 부모를 잃어 버린 경우에 그것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D 씨와 남편은 둘 다 부정적인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없었고 그 이유는 이것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 첫 번째 정신분열증 발발 에피소드의 환청 속에는 그녀와 남편이 어머니에게 당했던 한스러움이 그대로 맺혀 있었다.
어머니에게 노예처럼 일해서 어머니의 소득을 증가 시켜주었으나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근처에 땅을 더 사면서 남편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려고 했으나 D부인이 미안에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하자고 할 때 어머니는 팔 때 50대 50으로 공평하게 하자고 약속을 했으나 어머니는 그녀 스스로 이것을 지키지 않았다. 그녀가 계약서를 보자고 했을 때 어머니는 계약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를 가려고 하면 미리 1개월-2개월 전에 이야기를 해서 이사를 갈 준비를 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어머니는 이것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런 욕심에 더 붙여서 양아버지는 그 돈을 더 받아내려고 했다. 어머니의 계산이 잘못되었다면서 다시 계산을 해야 한다고 D부인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때는 땅만 계산해서 돈을 받았지 살아 있는 젖소들을 계산하지 못했었다면서 "왜 내가 그 때 젖소들을 계산하지 못했는지"라고 한탄 쪼로 이야기를 했다. 친 어머니와 양 아버지에게 그녀는 "소처럼 부려먹고는 개처럼 쫓아내 버린 것"을 D부인 스스로가 마음 속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썹썹함을 말로써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자아가 알고 이것을 행동으로 표현하게 된 것었다.
또한 남편의 첫 술 주사를 한 것도 5년까지는 남편은 마음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은 어린 시절에 친 엄마를 2살 때 잃었기 때문에 계모의 눈치를 보면서 자란 사람이었다. 고로 남편 역시 자신의 생각, 느낌, 지각, 상상, 아이디어들을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자신의 마음 속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5년이 지나가면서 남편도 마음 속에서 장모가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을 한 것이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시비를 벌려서 죽도록 얻어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술 주사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후에 남편을 동료들과 만나면 술에 취해서 시비를 벌려서 신체가 약하고 체구가 작은 남편은 항상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을 괴롭혔다. 그러한 행동 방식이 남편의 감정 표현 스타일이 된 것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가슴 속에 맺힌 한은 응어리로 남아서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이것이 한계점을 넘어서 폭발한 것이 첫 번째 정신분열증의 등장이었다.
두 번째 정신분열증 에피소드는 D부인의 첫 사랑인 그 군인 장교의 얼굴이 보이고 둘이서 데이트를 했던 그 영화관에서 본 영화의 주제곡을 그녀가 부르고 있었고 "그 군인 장교가 죽은 것은 너(D씨) 때문이야"라는 말이 그녀의 귀에 들렸다. 그녀가 그 군 장교를 사랑했으면서도 그녀가 한마디도 그 장교나 그녀의 어머니에게 좋아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을 평생 동안 후회하고 있다는 그녀의 마음이 그 환각과 환청에서 그대로 나타나있었다.
치료자는 D씨의 배다른 동생들 즉 두명의 여동생과 두 명의 남동생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들은 다들 별일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D부인처럼 정신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특히 바로 밑의 여동생은 결혼 후에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들은 모두 다 친정이나 시가에서 틀어 놓는 것을 보고 인상적이었다고 털어 놓앗다. 남동생들은 다 잘 살고 있고 유독 D씨만 정신분열증으로 11년 동안 고통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D씨가 알도록 했다. 그녀는 동생들과 달리 그녀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지적을 했을 때 그녀가 왜 자신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치료자의 지적에 시인을 했다.
D부인과 남편은 어린 시절에 배다른 동생들을 가진 한 쪽 부모의 상실을 겪은 상처받은 사람들로써 서로 부부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늘 하는 말인 "배우자와 물은 서로 유사한 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로 배우자로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건강한 한쪽이 상처받은 다른 한쪽을 보상을 해주면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배우자는 그 보상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다 상처받은 경우에는 문제는 더욱 더 크지게 된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고통, 괴로움을 말로써 표현을 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다. 남편은 술 주사로 표현을 하고 부인은 참고 견디는 스타일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스타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고로 남편은 술 주사로 풀 수 있었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은 면할 수 있었지만 부인은 그것 조차할 수 없는 사람으로 결국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의 생활은 결혼에서도 나타났다. 결혼을 할 때 그녀는 남편에게 그녀 자신에 대한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으나 남편은 철처히 그 자신을 비밀로 했고 이후에 남편이 초등학교 졸업에다 직업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남편에 대한 배신감, 속임수, 거짓말 등에 참을 수 없었으나 말을 제대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은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서 억압되어 있다가 자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이것들이 표면화 되면서 그녀의 귀에 하고 싶은 말들로써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들리게 된 것이다. 즉 그녀의 귀에 들리는 환청들은 그녀가 하고 싶었던 그녀의 내면 속의 말들, 비밀들이었고 이러한 생각, 상상, 사실들이 뒤 범벅이 되어 현실과 상상들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머리 속은 마치 이러한 상처의 기억들이 뒤범벅이 되어 혼란해져 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 기억을을 잊어 버리지 않고 두고 두고 회상으로 재 등장을 반복하면서도 그 말들을 토해내고 애통으로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뒤범덕이 되어서 어느 것이 현실인지 어느 것이 상상인지 혼돈을 가져온 것이다.
고로 치료에서는 이런 것들을 토해내고 어린 시절의 상처 경험들을 말로써 적당하게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머리 속에서 다시 차곡차곡 정리를 해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행동으로 표현을 하지 말고 말로써 적당한 언어로써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 적당한 감정적 언어 표현을 도와주는 것이 정신분석 심리치료이다. 그녀는 첫 치료 인터뷰의 마지막 시간에 "선생님! 왜 내가 말이 적은 사람이 되었을까요?"라고 의문스럽게 물었다. 치료자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에 자신의 생각, 느낌, 감정, 지각, 아이디어들을 미주알고주알 표현을 하는 능력에 결함이 생긴 것으로 치료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경험을 새로 배우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더 붙여서 치료에서는 이러한 노여움, 분노, 적대 감정들을 표현을 하게 하고 누적된 감정들을 방출시키고 그녀의 자신의 자아와 대화를 새로 나누게 하고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게 하고 대인관계에서 자기 주장을 하게 하고 섭섭한 것들을 눈치를 보지 말고 그것을 표현하게 하는 쪽으로 치료의 방향이 잡혀질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스스로 문제를 찾으려고 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첫 만남에서 그녀가 자기 표현이 없어서 말을 많이 하지 못하고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치료자와 대화에서 그녀는 자기 표현을 그런대로 잘 할 수 있었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하는 동기가 강해서 충분히 정신분열증을 극복할 것으로 확신이 들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D부인은 그 다음 치료 회기 시간에 와서 지난 주일에는 집에 가서 편안하게 잠을 잘자게 되었다고 신기해 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약물 복용으로 이제 환청은 없어나 침투해서 떠 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이번 주일 동안 내내는 잠을 잘 자고 있다고 했다. D부인이 5시간 째 그녀의 내면 속에 갇혀있는 분노, 미움, 배신감, 적대 감정을 토해낸 치료 회기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은 다음의 치료 회기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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