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사이래 사랑만큼 많은 주목을 받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핵심 용어가 되어있다. 사랑하는 연인 때문에 전쟁으로 이어진 사건들은 이름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수 없이 많다. 트로이 전쟁과 섹스피어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헬레네 왕비를 사랑해서 도망친 사건이 전쟁으로 이어진 트로이 목마 사건은 영화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로마의 명장 안토니오가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해서 로마와 전쟁을 벌인 악티움 해전 역시 연극과 영화로 널이 알려져 있는 사랑으로 인한 전쟁의 대표적인 사건이 아닌가!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사랑을 노래로 불렀다. 대중 가요의 노래 가사들 중에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바보들의 이야기”등등 이태리의 오페라 작가 도니제티의(Gaetano Donizetti)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등장하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등은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노래가 아닌가!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고 사랑으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들을 집어 보기로 하자.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박탈당한 사람들, 부모의 편애 때문에 생기는 분노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 미움이 장기화 되면서 생겨나는 적대감정, 사랑을 얻기 위한 분노와 공격, 사랑으로 인해서 생긴 왜곡된 마음들을 다루는 그리고 그들을 정상적인 마음으로 치유를 하는 치료로써 등장한 학문이 아닌가!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은 사랑으로 치료를 한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먼저 정신분석에서는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살펴보자. 사랑은 바로 신생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서 처음 세상에 접할 때 엄마의 젖꼭지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신생아가 이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접하는 외부 세계가 바로 엄마의 젖꼭지가 아닌가? 아기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외부 대상을 인식하게 되고 그 사람이 바로 엄마임을 지각하게 되면서 엄마로 향하게 된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편안하게 10 개월 동안 지내다가 이 세상에 나오면서 외부 대상의 첫 번째 접촉이 엄마의 젖꼭지이고 여기에서 외부로부터 돌봄을 받는다는 것에서 닫힌 자아의 세계로부터 외부대상으로 향하는 열린 자아의 세계가 시작 된다.
아기는 이후에 엄마의 젖꼭지로부터 배고픔의 욕구가 충족되면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욕구 불만족이 불쾌감이 된다는 것이 아기의 머리 속에 새겨지게 된다. 즐거우면 잠을 자게 되고 불쾌하면 울음으로써 불쾌감을 표현하면서 아기는 즐거움과 불쾌감을 구분하게 되고 이 즐거움과 불쾌감은 뇌에서 기억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아기는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빨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 엄마의 품이고 엄마의 품이 안식처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는 아기를 품에 안고 젖꼭지를 아기에게 물리고 있을 때 자신의 배속에서 나온 분신인 아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선물임을 느끼면서 아기의 얼굴과 볼에 아기의 손과 몸을 만짐으로써 생겨나는 접촉 감각으로써 따뜻함과 사랑이 아기의 몸으로 전달이 된다. 여기에서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인 신제 접촉에서 느끼고 전달되는 감각적인 즐거움이 바로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라는 것이 프로이트가 이미 100전에 지적을 했다.
생리학자들은 출생 직후에 인간의 5개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이 바로 촉감이고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감각이 신체접촉 감각임을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아기들이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얼굴과 볼을 비벼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출생 후 3개월 정도가 되면 이러한 즐거움을 방긋방긋 웃는 자연스러운 미소로써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아기의 스마일인 웃음은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을 유발해서 아기는 더욱 더 신체 접촉을 많이 받고 귀여움을 즉 사랑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엄마와 아기의 신체접촉의 상호작용에서 느끼는 그 즐거움의 기억들이 경험으로 새겨짐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고통을 피하게 된다. 모든 동물들이 다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 엄마와 아기의 젖꼭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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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이 세상의 중심은 엄마이고 엄마는 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엄마는 아기에게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시작이고 끝이 된다. 아기에게 이 세상의 전부가 엄마이고 아기에게 엄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문제는 이제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 아기의 자아가 등장하게 되면서 엄마와 아기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에서 정신분석의 치료가 시작된다. 프로이트는 0세-1세를 구순기로 지칭을 했다. 입과 입술과 혀가 중심이 되는 것으로 엄마의 젖꼭지를 빨고 젖을 먹으면서 입으로 먹는 것이 중심이 된다고 했다. 이 때가 바로 위에서 기술한 아기의 중심은 엄마가 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1세-3세까지 항문기가 되는 시기에 아기의 자아가 등장하는 시기로 본다. “나”, “내가”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고 나라는 “자아”가 싹이 트는 중요한 기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에서 뒤집고 기고 서고 걷는 신체적인 분리가 엄마의 품에서 내려와서 엄마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는 아기는 자신의 자아로써 이 세상의 신비한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세상을 컨트롤하려고 하는 자아가 싹이 트게 된다. 즉 자신의 신체적인 컨트롤 즉 대소변 훈련과 주변 환경의 탐색으로 닥치는 대로 찢고 부시고 만지고 어질러 놓은 시기로 엄마와 아기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항문기라고 프로이트는 강조를 한다.
우주의 중심인 엄마의 세계와 아기가 이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는 아기 중심의 세계가 부딪치면서 충돌하게 된다. 즉 갈등이 시작된다. 엄마와 아기의 갈등 즉 엄마의 자아와 아기의 자아의 싸움은 반드시 엄마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아기는 똥과 오줌으로 공격을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오줌은 엄마에게 소총 공격이고 똥은 대포공격이라고 본다. 아기는 엄마에게 항의와 분노의 표현으로 똥과 오줌으로 그리고 아기의 욕구가 충족되어지지 않으면 데굴데굴 굴리면서 성질을 부리는 성질부리기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등장은 3세-5세의 남근기 혹은 오디팔기에서 아버지라는 거인이 등장함으로써 아기는 아버지에 대한 처벌과 두려움 즉 거세 불안으로 엄마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양심 즉 초자아가 생겨나는 것으로 프로이트는 이론화 했다. 다시 엄마와 아기의 관계로 되돌아가 보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의 자아가 안정된 자아 감각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불안한 자아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임을 강조를 한다. 엄마가 안정된 자아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신비스러운 주변 환경의 탐색을 시작하는 아기의 자아가 등장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아기가 탐색하면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엄마와 같이 나누고 싶어하는 것을 수용해서 엄마가 아기의 환경 탐색에서 홈 베이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정신분석학가인 마가레트 몰러(Margaret Mahler)가 강조하고 있다. 즉 아기는 주변 환경의 탐색에서 불안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면 엄마를 부르면서 엄마에게 달려 온다. 이 시점에서 엄마는 아기의 주변 환경 탐색을 수용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아기에게 감정의 재충전을 제공해서 아기가 점점 더 엄마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장려해서 아기가 마음대로 주변 환경을 탐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여기에서 자아가 점점 자라나고 가지 주장이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후에 아기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상을 마음대로 모험과 탐색을 하는 기초가 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세상이라는 인생 항로의 배의 키를 자신이 잡고 세상을 살아가는 기초가 된다고 본다.
그러나 불안한 엄마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엄마는 깨끗하게 정리 정돈된 주변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아기에게 참을 수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 어질러지고 흐트러진 환경을 다시 정리정돈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깨끗하게 알아 입힌 옷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갈아 입히는 과정이 엄마에게 참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엄마는 아기를 호되게 처벌해서 아기는 엄마의 욕구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게 되면서 엄마의 요구를 거부하면 처벌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기의 자아는 엄마의 눈치, 비위를 거슬리면 처벌이 온다는 것에 예민하게 되고 아기의 자아는 엄마에게 순종적인 심하면 복종적인 자아가 만들어져 갈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여기에서 엄마의 마음의 상황 즉 자아의 상황이 아기로부터 좀더 성장한 어린이에게 어떤 영향으로 작동을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예를 들어서 어린 시절에 자신의 부모로부터 피아노를 배우지 못해서 한이 맺힌 엄마는 “나는 내 자식에게는 피아노를 마음 것 소망대로 배우게 하겠다”고 결심을 한 엄마는 자신의 자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를 강압하게 된다. 강압은 어린이의 자아에 반대가 된다. 엄마의 자아가 자녀의 자아에게 강요가 아닌가? 어린이는 자신의 의지 즉 자아가 아닌 강압에 압력을 받게 된다. 억지로 하게 되면서 어린이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강요를 받게 된다. 어린 시절에 영어에 혹은 수학에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는 엄마 혹은 아빠들이 자식에게는 영어 혹은 수학을 잘 하도록 하겠다는 열등감 때문에 다른 점수들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수학 점수를 챙기고 수학을 강조하거나 혹은 영어 점수를 챙기고 영어를 강압하게 되면 그 어린이는 수학 과목에 신경을 쓰게 되거나 혹은 영어 과목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게 됨으로써 점점 그 과목들에 예민하게 되고 긴장을 하게 되면 불안해져서 결국은 그 과목에서 실수가 잦아지고 과민하게 된다. 심한 불안은 뇌 회전을 방해해서 금방 까먹어버리거나 기억의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결국은 수학 혹은 영어 과목을 두려워하게 되고 피하게 된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동물의 본성이 아닌가! 결국은 엄마의 피아노에 혹은 수학에 혹은 영어에 특정 과목에 열등감이 자신의 자식을 더 잘 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 자식의 피아노, 수학 혹은 영어를 망치게 하는 대물림 된 것이 아닌가!
다시 사랑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사랑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은 정신분석에서 나온 유명한 경구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랑을 많이 줄수록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여기에 대답은 바로 식물들을 보라! 식물들에게 물을 너무 많이 주면 그 식물은 잘 자리지 못한다. 사랑 역시 너무 과도하게 되면 과잉보호가 된다. 사랑이 부족해서 혹은 무관심으로 사랑을 박탈하면 방기 즉 방치에서 포기한 것이 된다. 반대로 너무 많은 사랑은 바로 과잉 보호가 된다. 어느 쪽이든지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사랑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적게 주거나 편애를 하거나 사랑이 잘못 흘러가면 사람을 죽을 수가 있고 과도하게 사랑이 흘러가면 사람을 질식시키거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자성어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은 과도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다음 백과 사전에서 인용)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21세기의 과학 문명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과학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정신건강 전문가들 즉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 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자동차와 유모차를 등장시키면서 엄마 품에서 아기를 분리시켜놓았다. 옛날에 엄마는 일을 하면서 아기를 등에 업고 품에 안고 일을 했다. 아기로써는 엄마와 함께 엄마에 매달려 있는 것이 즐거움이고 사랑이었다. 엄마에게는 한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겠지만 말이다. 엄마의 젖꼭지가 우유병으로 대체 되면서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신체 접촉과 피부 접촉이 그 만큼 줄어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유모차가 등장하면서 엄마는 나들이를 가면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다니면서 편리해졌다. 엄마와 접촉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 승용차가 등장하면서 아기는 이제 승용차 뒤 자석에 안전벨트를 장착한 안전시트가 들어와서 엄마의 품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여기에 아버지의 경제력에 어머니가 맞벌이로 가세하면서 일을 하는 엄마들은 아기들을 영아원, 유아원으로 내 몰리게 되면서 엄마와 신체 접촉은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있다. 영아원, 유아원은 양육 기관이 아니고 보호하는 기관이 아닌가? 아기에게 대소변과 우유를 제공하고 보살펴주는 곳이지 아기의 양육으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신체접촉이 주체가 되는 곳이 아닌지 않는가? 보모가 7명-8명의 유아들을 보살펴야 하는 곳에서 대소변과 수유에 신경 쓸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은 점점 줄어들어간다. 또 한가지는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의 핵심이 되는 대화이다. 대화는 아기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는 모체가 아닌가? 아기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과 감각과 지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아기의 표현을 장려하고 아기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 주장을 하도록 자아의 개발을 장려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엄마가 일을 하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에서 대화는 점점 수직적인 대화로 변질 되어져 가고 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가면서 이제 어린이는 엄마의 눈치, 비위를 보고 엄마의 말에 순종하는 자녀 심하면 복종적인 자녀가 되기 십상이다.
과도하게 불안한 엄마들은 자녀와 갈등이 생기면 안전부절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갈등을 불안을 창조하고 고통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갈등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고통을 유발해서 갈등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사춘기가 접어들면서 어린이가 자신의 자아의 목소리를 내는 시점이 되는 사춘기 시점에서 부모와 의견 불일치로 부모님이 화를 내거나 처벌이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심하면 복종적인 청소년으로 변모하게 되어 결국은 의사소통의 성장에 손상으로 결과하게 되어 의사 소통의 자아에 결함이 생기게 된다. 시간에 쫓기는 엄마 혹은 아빠는 자녀들과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자녀들이 유치원 혹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소상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수용해주는 쪽보다 엄마가 시간이 없으니 빨리 요점만 이야기를 하라고 다그치다 보니까 부모님과 자녀의 대화는 문답식으로 Yes와 No의 대화가 되어버린다. 묻는 것에만 대답을 하는 식으로 변하면서 자아의 소통 능력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엄마가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문제가 있는 엄마의 경우에는 아기가 점점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을 배우면서 말이 많아져서 대화를 하게 될 시점에 엄마는 자신이 스스로 자녀와 함께 있을 때 대화 기술의 부족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에 껄끄럽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는 엄마와 아빠는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사춘기의 진입이 시작되는 4학년, 5학년의 시점에서 자녀와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껄끄럽고 불안해져서 거리감을 두려고 하게 되고 자녀들 역시 부모님과 함께 하면 불편함과 껄끄러움 때문에 피하게 되어 자연히 혼자 있게 되면 불편 하지 않고 편하게 된다. 여기에 혼자 있으면서 생기는 외로움을 들어주는 게임과 휴대폰과 컴퓨터에 매달리게 되면서 전자 오락으로 외톨이를 달래게 되면서 자녀들은 동료들과 관계에서도 동료들과 대화의 기술 부족으로 그들의 눈치. 비위를 맞추는 대인관계로 변모하게 된다.
치료자는 이러한 젊은이들을 분석하고 치료를 하면서 위와 같은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결함이 생긴 자아의 결함을 가진 젊은이들을 수 없이 많이 보아왔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님의 강압과 강제와 억압과 자아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결함이 생긴 사람들이 바로 정신장애들의 핵심 요소로 자라잡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 문명을 거부하고 비판하면서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 문명이 주는 이점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결함을 직시하고 보완하고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학력들이 높아졌지만 정작 위와 같은 발달의 과정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님과 자녀들과 관계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부모님은 항상 갈등을 피하고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녀들에게 “먹여주고 입혀주었더니 이제 엄마에게 아빠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세우고 말대꾸를 하느냐?”, “엄마, 아빠를 무시하고 도전을 하려고 하느냐?”라는 말을 자녀들로부터 많이 듣는다. 자녀에게 부모님은 “이세상을 수십 년 살아 오면서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너의 시행착오를 사전에 막아서 너에게 갈등과 고통을 줄이려고 하는 것이니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 부모님에게 효자가 되고 착한 자식이 된다”는 가르침 때문에 그 결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아가 약한 사람, 심하면 자아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이 바로 심각한 정신장애자 들이라고 본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의 상호관계는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과 상호관계의 뼈대가 되어 이것이 대인관계의 핵심이 된다라는 것이 정신분석의 핵심이론인 자아 이론의 근간 이다.
엄마는 아기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두려워하게 된다. 아기가 환경 탐색을 하다가 다치거나 부상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엄마는 아기가 마음대로 환경 탐색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아기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고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아기를 환경 탐색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단초가 된다는 것은 모르고 아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기를 놓아줄 수 없다고 변명이 바로 불안한 엄마 사랑의 변장된 모습이 아닌가?
0세-3세까지 아기를 밀착으로 돌보아주고 감시하고 컨트롤해서 아이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상으로 보지만 3세 -5세, 6세 그리고 잠재기인 6세-12세까지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점에서 지나친 과잉 보호는 엄마에 복종적인 어린이로 만들어서 자녀의 자아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임을 엄마는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는 과도하게 불안해서 아기에서 어린이가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해가는 자녀를 엄마가 마음대로 컨트롤 하고 엄마가 좌지우지 하지 않으면 점점 증가하는 갈등들에서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위와 같은 문제들 즉 과도한 사랑과 방치의 결과로 자아 붕괴되고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게 된 실제 사례들로 되돌아 가보자.
A군은 27세의 청년으로 대학 입학 후에 발병한 정신분열증 때문에 5년간 대학 생활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4번이나 복학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약물로 생활 하다가 2017년 2월 달에 치료자 한데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기 시작한 청년이다. 그의 핵심 문제는 대인관계로써 동료들과 대화나 관계의 갈등 때문에 늘 회피적인 성격으로 이것이 정신분열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치료자는 그의 어린 시절을 분석하면서 의사소통의 결함과 자아의 성장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중지된 것을 분석으로 밝혀내고 그의 자아를 성장하도록 도와주면서 의사 소통으로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고 동료들과 어떻게 어울리고 어떻게 긴장을 완화시키고 불안에서 벗어나는가?를 다루면서 6개월 후에 처음으로 공과 대학에서 전교 2등으로 4.5 만점에 4.35의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성공한 대학생이 된 것 때문에 추석 때는 A군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치료를 잘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B군은 24세의 대학 3학년 학생으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동료들과의 관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그 시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종합 병원인 xx 병원의 신경정신과에서 약물의 복용으로 7년 동안 약 40%의 자아의 힘으로(B군의 표현) 동료들과 관계를 해 나가다가 2016년 12월 달부터 약물 복용에도 불구하고 99%의 자아가 작동하지 않아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진전이 없었다. 이번에는 다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합 병원인 xx 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zz 병원에서 신경 정신과의 처방으로 다시 약물을 복용을 해 보았으나 자아는 1%(B군의 표현) 박에 작동이 되지 않아서 그 약물을 처방한 신경정신과 과장에게 직접 심리치료를 요청했으니 그는 그의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다가 물러나서 개인적으로 개업을 해서 약물과 심리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후배를 소개를 해 주어서 4개월 동안 1주일에 1회씩 50분간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약물 복용을 병행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8년 동안의 약물치료에 그리고 4개월의 심리치료에서도 아무런 효과가 없게 되자 포기하고 xx 정신분석 치료소에서 50분 동안 분석 상담을 받았다, 그러나 이전의 신경정신과의 심리치료와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냥 이야기를 50분 동안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시점에서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발견하고 문자 메시지로 “저는 심리적인 장애로 고통을 받아온 학생으로 약물 치료와 심리치료를 받아보고 나서 불만족해서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을 드립니다. 선생님은 심리치료를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왔다.
치료자는 “나는 정신분석적인 심리치료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달 단계를 분석해서 결함을 찾아내고 상처를 찾아내고 분석해서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어떻게 감정을 표현을 하는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등을 분석해서 치료를 해 나가는데 증세 자체를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치료해 나갑니다. 고로 시간이 많이 결리기 때문에 6개월 이하의 치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6개월 치료 계약으로 6개월 치료 비용을 미리 받습니다. 그 이유는 치료사와 치료의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피해서 도망가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는 대인관계 기술을 배우도록 하기 위한 치료 기법으로 사용합니다. 궁금하다면 먼저 2시간 컨설팅을 받아보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컨설팅 비용은 시간 당 xx 원으로 2시간 xxx 원입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겠다고 결심이 되어 치료 계약을 하게 되면 시간당 xx 원으로 50%의 활인을 받게 됩니다.”라는 문제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B군은 2시간 컨설팅 이후에 6개월간 치료 계약을 하고 1주일에 2회씩 1회기당 2시간씩 4시간의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해서 3개월 만에(48시간) 80%의 자아 작동(B군의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회복을 하게 되었다.
위의 두 명의 청년들의 자아 결함은 자아의 연약함과 자신의 목소리가 없는 사람으로 어린 시절에 엄마와 관계의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두 청년의 경우에 치료가 약 10시간 정도로 진행이 되었을 때 치료자가 두 청년에게 지금까지 치료자와 주고 받은 내면 심리들의 문제들을 100%로 추산할 때 부모님에게 몇 % 정도로 소통이 되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어머니와 소통은 20%이고 아버지와 소통은 30%라고 대답을 했다. 어머니와 관계가 불편해서 거리감을 두게 된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어떻게 동료들과 대화를 해야 할지를 몰랐고 항상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상대방의 눈치, 비위를 맞추고 갈등을 피해서 도망을 가거나 혹은 관계를 단절한 것이 특징이었다.
위의 치료 사례들 이외에도 대표적인 사례가 실제로 있었던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샤인(Shine)의 이야기가 1996년에 영화로 만들어져서 아카데미 주연 남우상을 받았던 작품의 이야기이다. 치료자의 영화의 주인공의 심리분석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은 "정신분석은 사랑으로 치료한다"고 프로이드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이 다 위대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영화는 호주의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영화한 작품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사랑이 병든 사랑일 때는 두 사람다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영화이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 피터는 어린시절에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자신의 아버지 즉 데이비드의 할아버지의 반대로 아르바이트로 몰래 산 바이올린을 연주하다 들켜 그 바이올린을 박살 당하고 만다.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꿈을 아들인 데이비드 한데서 이룰려고 한다.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한(恨) 맺힌 소망을 풀려고 한 것이었다.
어린시절에는 아들은 아버지의 소망에 쫓아서 어려움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나아간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압, 처벌, 강제에 못 이겨 데이비드는 사춘기에서부터 미소를 잃어 버리고 복종적인 청년으로 변해간다.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아버지는 가차 없는 처벌을 가하면서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처벌을 받으면서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 다 너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아들 데이비드에게 "아버지가 음악을 하고 싶었거던 그래서 바이올린을 샀는데 그 바이올린이 어떻게 된 줄 아느냐?"라고 세뇌를 시킨다. 데이비드는 "할아버지가 박살 냈어요! 나는 행운아 예요"를 판에 박은 듯이 반복하면서 자란다.
아버지 피트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 삶을 살고 있다. 아들의 연주회 공연 스케줄을 짜고 아들의 연주 비평이 신문에 난 것을 스크랩하며 오로지 아들의 성공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대로 일등을 해야 한다. 2등은 필요없다. 1등을 해야 살아남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아들 데이비드가 미국의 저명한 음악가로부터 미국의 음악대학에 오라는 초청장이 왔을 때 아버지는 그 초청장을 불에 넣으면서 "절대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며 "만약 우리 가족을 떠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를 강조한다. 데이비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피아노 연주곡인 라흐마니노프 3 악장을 치면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을 강압한 아버지 피터는 결국 아들의 영국 왕립 음악대학의 장학생 유학을 막지는 못한다.
아들 데이비드는 영국에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가 주입 시킨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피아노 연주곡을 쳐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공을 선택하면서 지도 교수가 라흐마니노프를 치게 되면 머리가 돌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나는 이미 돌아 버린 사람이니까 라흐마니노프 곡을 치겠다고 도전을 하게 된다. 음악은 감정으로 쳐야지 머리로 치면 안된다 그리니 악보를 보지 말고 쳐야 한다. 피아노 줄이 끊어질 정도로 힘을 넣어라는 지도 교수의 말에 정말로 악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증을 보이고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데이비드는 어린시절에 아버지의 말씀이 머리 속에 입력되어져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친구관계나 사회생활을 위한 준비는 데이비드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졸업식에서 일등으로 졸업하게 되고 졸업 식장에 모인 내빈들에게 라흐마니노프를 성공리에 연주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신병원으로 실려간다.
데이비드는 소원인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러시아의 음악가가 쓴 라흐마니노프를 연주를 했지만 이후 15년의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어떻게 해서 데이비드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지는 영화의 과정에서 잘 드러나 있다.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면 정신병이 재발한 것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말에 복종해서 자신의 젊음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며 퇴원을 해도 아버지의 거부로 다시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소일하며 보내게 된다. 우연히 교회의 합창단이 정신병원에 위문 공연차 오게 되었고 그 때 피아노 연주자에 의해서 옛날 왕립 음악대학에서 일등으로 졸업하면서 귀빈들을 위해서 졸업 공연을 한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란 사실을 알 게 된 교회 피아노 반주자에 의해서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어 그 피아노 반주자의 집에서 임시로 생활하게 되면서 데이비드가 점차로 자아를 찾아게되는 여정이 시작된다.
데이비드는 오로지 아버지의 대리만족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자아가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 꼭두각시가 되면서 자신의 자아를 잃어 버린 것이었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모두 억압해 버려서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피아노를 치는 것은 세계에서 제일일지 모르지만 다른 것들 즉 친구관계, 대인관계, 이성관계 등은 제로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데이비드는 불쌍해서 구원해주려고 집에 데리고 간 그 교화 피아노 연주자가 데이비드는 나이는 어른이지만 아직 어린이에 불과하다고 했겠는가? 집에서 물을 틀어놓고 장난을 치거나 자신의 물건을 있는데로 늘어놓고 치울줄 모르는 행동 등에서 진절머리를 느끼고 데이비드에게 피아노가 있는 집을 소개해 주겠다면 집에서 쫓아내게 되고 데이비디는 헌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밤새도록 치고 싶은 피아노만 치다가 주인에게 피아노의 건반의 문을 잠가 버리는 버림을 받게 된다.
데이비드는 피아노가 문이 잠겨 열 수 없게 되자 집을 뛰쳐나와 울면서 비를 맞으며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히어떤 까폐 옆을 지나가다 창문 넘으로 주인 없는 피아노가 건반이 열린 것을 보고 미친 듯이 그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 건반을 두려리게 되고 그 연주 솜씨에 놀란 주인이 데이비드에게 매일 같이 손님들을 위해서 피아노 연구를 해 줄 것을 허락해 준다. 이후부터 데이비드는 자신감을 점차로 회복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약혼한 점성술사인 실비아에게 청혼을 하게 되고 실비아의 도움으로 점차로 자아를 회복해 간다.
어느날 데이비드가 혼자서 통조림을 열려고 하는 도중에 뒤에 누가 서 있다는 것을 알고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아버지가 와서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버지 앞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자신을 나이가 중년이 된 지금도 똑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아버지가 "옛날에 내가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바이올린을 샀는데 어떻게 된 줄 아느냐"는 어린 시절의 질문을 하게 되자 처음으로 데이비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버지에게 No라고 말하게 된다. 아버지는 졸업시에 일등 금메달을 데이비드의 목에 걸어주면서 이것은 이제 너의 것이다라며 쓸쓸히 아들과 마직막 이별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레슨비가 없어도 데이비드를 지도하여 천제성을 키워준 로젠 선생님, 결혼하여 데이비드를 내조한 실비아 들의 사랑이 데이비드가 자신의 자아를 회복하게 도와준 사람들이고 이들의 사랑이 데이비드를 살리게 된다. 아버지는 분명히 데이비드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랑을 했지만 그 사랑이 아버지 자신의 어린시절의 꿈을 데이비드에게 대리 충족을 얻겠다는 집착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데이비드의 젊은 시절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다.
자녀는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났으데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넣어주되 자녀에게 생각을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부모와 자녀 관계는 활과 활 시위와 같아서 부모는 자녀의 뒤를 밀어주는 활의 시위와 같지만 활이 날아가는 방향은 자녀들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레바논 태생의 기독교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힐지브란의 말은 이것을 잘 설명해준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어린 시절의 상처가 어른이 되어서 데이비드의 재능을 파게시켜 결국 데이비드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반 평생을 보냈고 아버지의 욕구의 대리만족으로 자신의 자아을 희생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욕구의 고착으로 즉 욕구의 발달이 중지되어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의 욕구 충족으로 되돌아가는 퇴행 현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데이브가 성기를 보여주어 여성들을 놀라게 하는 노출층 환자가 된 것도 어린시절에 로젠 선생님이 모금 운동을 해서 데이비드의 미국 유학 학자금을 들고 데이비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데이비드가 아직도 오줌을 싼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 이미 데이비드는 성적 욕구의 성장이 심리적으로 중지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신병원에서 어린이처럼 중얼거리며 병원의 이곳 저곳을 떠 돌아다니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한 것과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려지냈던 어린 시절의 재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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