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인가? 1
1895년에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들”이라는 저서를 브로이어(Breuer)와 프로이트가 공동 작품으로 출판을 하면서 정신분석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저서에는 브로이어가 21세의 안나 오(Anna O)양이 가진 히스테리아라는 병을 최면으로 치료를 한 한 개의 치료 사례와 프로이트가 4명의 히스테라아 여성 환자들 중에 2명은 최면으로 치료를 그리고 나머지 2명은 최면에 걸리지 않는 히스테리아 여성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최면의 효과와 유사한 치료 방법으로 카우치에 눕게 하고 프로이트가 그 여성 환자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면서 생각이 잘 떠오를 것이니 마음 속에서 생각이 나는 모든 것들을 말로써 표현을 해 주세요 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그녀의 카우치 뒤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의자에 앉아서 노트를 하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낱말들은 연결 시켜서 무의식적인 뿌리를 찾아가는 자유연상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서 밝힌바 있다.
이후에 프로이트는 이 시점 이전부터 약 10년에 걸쳐서 신경증에 대한 연구를 시작을 했다. 그가 과거에 뇌 신경조직학을 연구를 하면서 뇌의 해부학 연구소의 메이네트(Mynert) 교수의 실험실에서 실어증과 마비에 대한 뇌의 조직학적인 연구를 해 왔었다. 그 이전에도 그는 그가 의과대학 3학년 초반기에 유럽에서 최소로 설립된 동물학 실험 연구소(해양 생물학 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6개월간 일을 하면서 크라우스(Claus)교수의 철저한 현미경 실험 연구사로 훈련을 받아서 그가 연구한 최초의 논문은 뱀장어의 고환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서 400마리의 장어들을 실험을 했다. 그의 첫 실험 논문은 크라우스 교수의 추천으로 논문집에 발표가 되었고 철저한 현미경 실험 연구자로서 각광을 받았다. 이어서 그는 하등동물 즉 왕새우, 가재 등과 물고기의 척추 연구로부터 고등 동물의 뿌리 신경 뭉치로 이후에 메이네트(Meynert)의 대뇌 연구소에서 청각신경의 연구에서 대뇌의 숨 골의 수질 연구로 뇌의 조직학적인 연구를 하면서 진화의 뿌리를 증명을 했다.
3학년 2학기에 그는 부케(Brucke)의 생리학 연구소에 연구 조교로 들어가서 해부학을 6년 동안 연구를 했다. 그는 그 당시 비엔나 의과대학 5년 과정을 3년 더 해부학을 공부를 해서 8년 만에 졸업을 했다. 대학에서 실험실에서 연구 교수로 남기를 원했지만 부케 교수는 프로이트보다 10살 많은 두 명의 선배 조교들이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면서 대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케 교수의 조언으로 레지던트로 개업 의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 비엔나 의과대학 부설 비엔나 대학병원에서 4년 동안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신경학자로 길을 걷게 된다. 이 시점에서 뇌 조직학 연구소에서 뇌 조직학을 연구하면서 유럽의 뇌 조직 신경학의 권위자 메이네트(Meynert) 교수 밑에서 실어증과 마비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소위츠(Kassowitz) 어린이 연구소에서 어린이 실어증과 마비를 연구했다. 35명의 어린이 환자들의 뇌의 한쪽 마비와 양쪽 마비와 장님의 연구 논문을 발표를 해서 뇌 마비 연구의 최고의 논문으로 지금도 각광을 받고 있다.
크라우스, 부케, 메이네트 교수들은 독일의 물리학회의 헤몰츠(Helmholtz) 학파의 후계자들로써 철저한 실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물리, 화학, 수학으로 해부학과 생리학을 기술한 철저한 실증주의 과학자들로써 프로이트가 그들 밑에서 생리학과 해부학에 철저한 연구와 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에 뇌 조직학에서는 실어증으로 뇌 회백질의 웨네카 지역의 감각 실어증(이해의 어려움), 브로카지역의 운동 실어증(언어 표현의 어려움), 활모양 다발 실어증(이해와 표현의 양쪽 다의 어려움), 완전 실어증(위의 전체 통합 실어증) 등으로 뇌의 회백질의 위치와 분포에 따른 복잡한 실어증으로 복잡다난 한 것을 프로이트가 연구 논문을 쓰면서 실험을 통해서 실어증에서 시각, 청각, 촉각의 구분은 뇌 회백질의 위치에 의해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기관에 의해서 구분이 된다는 실어증들의 통합으로 한 개의 통일된 실어증으로 교통정리를 한 논문을 발표를 함으로써 지도 교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음의 기관은 심리적인 요소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반발을 사게 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실어증과 마비는 신체 조직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도 있고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등장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프로이트가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프로이트는 비엔나 의과대학 종합 병원의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그 대학에서 우수한 레지던트 3명을 선발해서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첫 사업에서 선발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히스테리아 연구의 최면 치료의 대가인 가르코트를 방문하면서 뇌 신경 조직학자로부터 정신병리학자로 바뀌게 된다. 그가 뇌 연구소의 메니네트(Meynert) 교수 밑에서 뇌 조직 신경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깨닫게 된 것은 뇌의 회백질 조직으로 철저하게 물리학, 화학과 수학으로 뇌를 연구를 해서 뇌 해부학적인 연구는 발달해 있었지만 뇌 생리학적인 설명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독일의 뇌 과학자들이 인간의 마음, 심리 즉 영혼을 말살하고 인간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발해서 뇌 생리학적인 설명에 도전을 함으로써 이것이 정신병리학으로 그리고 신경증들을 연구하는 학자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뇌의 생리학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을 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는 신경학 전공 의사 즉 신경과 의사였다. 마음에 도착한 정보는 감각 기관들을 통해서 혹은 그것이 제공하는 그 화학적인 자극을 통해서 그 몸으로부터 모든 기간에 오든지 혹은 외부 세계에서 오든지 간에 한 개의 신체적인 흥분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생리학적인 개념은 에너지, 긴장, 흥분으로 시작된다. 고로 생리적인 현상은 우리의 몸 안에서 정보가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심리학으로 설명을 한다고 해도 생리학은 심리학으로부터 분리되거나 중단되어지지 않는다. 즉 심리적인 것으로 바뀐다고 해도 지속된다.여기에서 생리적인 것의 시작은 신경세포가 된다. 신경학의 기본인 신경세포의 기본 단위인 뉴론(neuron, 신경세포)은 흥분의 전달을 일정한 량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출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정량 이상이 되어야 신호인 흥분을 전달하는 것에서 자극의 량이 에너지의 량으로 측정하는 데서 출발을 했다.
여기에 물리학에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1840년에 로버트 메이어(Robert Mayer)에 의해서 제기 되었으나 40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헤몰츠에 의해서 에너지 보존이 되살아나게 되었고 여기에다 아인슈타인의 E = MC제곱(에너지는 물질과 빛의 제곱)으로 물질은 에너지이다 라는 이론들이 도입되어지면서 인간의 마음을 에너지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신경 자극 방출에 에너지 개념이 도입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신경전달 에너지는 그 흐름이 지속이 깨어질 때 의식으로 등장한다는 것과 일정량의 에너지의 전달 량이 미세할 때는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일정량 이상으로 증가하면 감각으로 나타난다는 감각의 최소 한계점(thresholds)라는 심리 물리학적인 이론을 도입을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부에서 신경 자극의 전달을 그리스어로 사이(Ψ)로 인간의 외부에서 자극 전달은 그리스어 피(φ)로 그리고 이 량을 질로 그리고 질을 량으로 바꾸는 것은 오메가(ω)로써 기술을 했다. 아이디어들의 연속이 끊어질 때 감정이 등장하는 것으로 감정이 한쪽 방향에서 다른 쪽으로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방향이 바뀜(displacement)과 대체라는 용어를 사용을 했다. 자극의 전달의 량에 감정이 첨가되면 그 힘이 커진다는 것과 일정량의 이하의 에너지는 억제하고 이것이 장기화 되면 억압으로 그리고 긴장의 증가는 불쾌감으로, 긴장의 방출은 즐거움으로 그리고 현재의 고통스러움에 직면하면 과거의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즐거운 기억으로 퇴행한다는 것과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고통으로 동일시를 하게 되면 이것이 환각이 된다는 설명으로 뇌의 생리학적인 설명을 내 놓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러한 뇌 생리학은 심리학자들에게 이해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심리학적인 용어들로 바꾸면서 일정량 이상의 신경 자극 방출을 감각으로, 이것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을 지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억압으로, 과거의 즐거운 기억의 회상을 퇴행으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의 동일시를 환각으로 신경증들의 연구에 적용하고 신경증 들의 원인들을 규명해 나가기 시작을 했다.
여기에 무의식 이론이 첨가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의 문헨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데어도어 리프만(Theodor Lipp)이 1897년에 쓴 무의식에 대한 책을 애지중지 했다. 그는 바다 밑에 보이지 않는 산맥이 무의식에 해당되는 것으로 물 위에 보이는 산은 의식으로 의식의 뿌리는 무의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론을 프로이트가 밑줄을 치고 애독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00년에 꿈들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빙산에 비유를 해서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무의식으로 물 위에 쓴 부분을 의식으로 의식은 무의식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것으로 무의식의 특징들을 이론화 했다. 무의식은 제 1차적 과정으로 신경자극의 방출이 지속되는 것으로 에너지는 불변한 것으로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특징이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흐름이 깨어지는 것이 의식이고 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확실하다. 무의식의 특징은 소망의 충족으로 억제되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 움직임의 출구를 통해서 방출된다, 실패하면 한 개의 지각을 설립을 한다. 제 2차적 과정으로 에너지의 광범위한 억제가 일어나고, 외부 현실을 고려함으로써 현실적 욕구 만족을 찾는다, 한 방향으로 에너지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방향이 바뀔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제 1 차 과정이 무의식이고 제 2차 과정이 전의식으로 무의식과 전의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로 그는 마음의 위계구조로써 무의식, 전의식 그리고 의식으로 구분을 했다.
요약을 하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탄생시키면서 정신분석적인 용어들을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마음의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의 실증주의 과학자들이 모든 자연 현상을 실험으로 증명하라는 주장에 대해서 실험 심리학과는 달리 그의 정신분석학은 실험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큰 심리학(meta-psychology)이라는 말을 사용을 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내 놓았을 당시에는 컴퓨터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실험으로 증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증주의 과학자들로부터 프로이트 이론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소설적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치료로써 카우치에 누워서 자유연상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과학적임이 증명이 되었다. 1955년에 아세린스키(Aserinsky), 클레이맨(Kleirman)과 디멘트(Dement)에 의해서 고안된 뇌 세포의 전기의 흐름인 뇌파(EEG)측정을 사용해서 이후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인 치료 즉 카우치에 누워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때 뇌파가 가장 긴장이 풀린 긴장 이완의 상태로 심장 박동, 맥박, 호흡 등이 완만해진다는 것과 긴장이 이완된 상황에서 뇌의 회전 능력이 최대가 된다는 것이 생리학적으로 밝혀졌다.
또한 꿈의 생리학적인 연구에서(스텐포드 대학의 수면 연구소) 꿈은 잠을 보호한다는 것과 꿈이 마음의 치유라는 과정이라는 프로이트 이론이 입증이 되었다. 꿈은 전체 수면의 4분의 1정도이지만 꿈을 꾸지 못하게 했을 때 잠을 자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꿈을 꾸지 못하게 하면 정신 이상을 보인다는 것도 밝혀졌다. 또한 마음은 에너지이고 신경 세포의 움직임은 에너지의 흐름이 입증이 되었다. PET(양전자 단층 촬영기기)에서 심사숙고 하거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 에너지의 분포가 붉은 색깔로써 표현이 되도록 했을 때 긴장이 완화 되었을 때보다 심사숙고 할 때 붉은 색으로 에너지가 대뇌의 회백질에 많이 흘러간다는 것도 입증이 되었다.
더 붙여서 1960년대부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대학 신경생리학 연구실에서 쥐들을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에는 장난감과 놀이 기구를 많이 넣어주고 다른 한 그룹에는 열악한 상황으로 양육을 했을 때 쥐의 뇌 세포가 24%나 차이가 났다는 연구 결과의 발표는 미국의 생리학 연구실을 흥분시켰다. 이 연구 결과로 인간에 대한 연구들에 응용되어지면서 인간 역시 지능이 후천적으로 25%정도 환경에 의해서 증가시킬 수 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하버드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의 공통 연구팀이 지능의 51%는 유전이 되지만 48%는 임신 중에 자궁 안의 환경에서 형성되어진다는 발표가 등장을 했다.
1990 년대 후반기에 버클리 대학의 신경 과학자인 다이야몬드(Diamond, 1999: 주(주): 참고)의 저서 “마음이라는 마술의 나무”그리고 시카고 대학 신경 과학자인 엘리오트(Eliot, 1999: 주(주): 참고)의 저서 “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서 두 과학자는 컴퓨터를 이용한 뇌 세포의 측정에서 어린이의 뇌 세포가 5세 때 어른 뇌의 90%, 7세 때 95%, 그리고 10세 때 97%의 성숙함을 보인다고 발표를 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주장한 3세-5세 사이에 자아들의 구조(성격의 뼈대)가 거의 형성된다는 이론이 입증이 된 것이었다. 유아기의 어린이의 뇌 세포는 어른의 뇌 세포보다 3배-4배가 많다는 것도 밝혀졌다. 고로 이 시간에 사용되어지지 않는 뇌 세포는 가지치기로 제거해버린다는 뇌 세포의 가지치기라는 용어가 새로 등장을 했다. 이것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의 시에서 프로이트가 어른 시절의 기초는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컴퓨터가 등장함으로써 프로이트의 이론들이 한가지씩 실험 증명이 되어지면서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인 에릭 프롬(Erich-Fromm)은 프로이트를 200년 혹은 300년 만에 한번 등장할까? 말까? 하는 천재로써 그의 업적을 찬양 했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에 20세기를 대표할 3대 사상가로써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로써 등장을 했고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1999, 3, 28일 날에 발간 된 TIME의 잡지사가 세계의 석학 들에게 설문 조사로써 20세기 100년 동안 인간에게 가장 공헌을 한 과학자 혹은 사상가를 100명을 선정하는 조사를 한 결과 프로이트가 1위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2위로 선정이 된 특집 기사를 발표 하면서 표지 모델로 프로이트가 아인슈타인을 카우치에 눕히고 정신분석 치료를 하는 만화를 묘사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명성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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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참고는 다이아몬드의 저서와 에리오트의 저서 그리고 에델만의 두 권의 저서는 치료자가 우리 나라말로 번역해서 소장하고 있다. 원하시는 분들은 전문 서적 안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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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치료자(필자)가 정신분석 학의 홈 페이지에 올려놓은 TIME 잡지사의 표지 모델과 프로이트의 업적을 소개한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1999년 3월 29일자 TIME지에 소개된 20세기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1순위로 프르이드와 2순위가 아인슈타인이 선정되 TIME의 표지 모델로 소개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프로이드의 환자로 카우치에 누워서 프로이드의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묘사해서 프로이드의 업적을 표현하고 있다
|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충격을 준 3대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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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의 자존심에 쇼크를 준 3대 사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지동설 중세까지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반기를 들었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것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갈릴레이 갈릴레오이다. 그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한 사람으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알리는데 앞장선 과학자였다. 문제는 그 당시에 사회적 상황이 이러한 지동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유언 비어를 퍼뜨려서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불순한 목적을 전파하고 있다는 이유로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회 전복을 목적으로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였다. 갈릴레오가 지도자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서 그들을 설득 시키기에는 그의 이론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갈릴레오는 정신이 돌아 버린 학자로 치부했다. "당신의 눈을 뜨서 하늘을 지금 쳐다 보세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눈으로 확인을 하도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십니까? 지구가 돌고 있다면 당신이 어지러워서 어떻게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에게 갈릴레오가 그 당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계속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재판장의 경고에 갈릴레오는 결국 절대로 다시 지동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결국은 풀려나서 재판정을 나오면서 하도 기가 막혀서 "지금도 지구는 돌고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이론을 전파한 것에 대한 쾌심죄로 처형을 하지 못하고 과학적 업적을 참조해서 무죄 석방한 것을 좋지 못하게 생각한 로마 캐토릭 본부에서 결국은 갈릴레오는 호적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었다. 캐토릭 신자의 명부에서 칼릴레오의 이름을 파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을 캐토릭에서는 엑스 커뮤니케이션(ex-communication)이라고 부른다. 즉 죽어서 심판을 받을 때 캐토릭 신자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은 천당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옥에 가라는 뜻이었다. 캐토릭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인 천동설에 반대해서 반기를 들고 사람들에게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가 한없이 미웠을 것은 뻔한 일이다. 갈릴레오는 캐토릭 교인의 명부에서 이름이 제외된지 몇 백년이 지난 후에 1992년에 로마 카토릭 본부에서 칼릴레오는 사면 복권한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 신문 기자들이 로마 캐토릭 대변인에게 갈릴레오가 죽은지가 몇 백년이 되었는데 왜 사면복권을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제 지동설은 유치원 아이들도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굳지 숨기고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누구도 지동설을 부인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점에 와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뜻이 숨이있다고 했다. 2008년 3월 5일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갈릴레오와 지동설에 관련된 기사를 보도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교황청에 갈릴레이 동상 세우기로
2.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Darwinism) 다윈은 1831년 22세의 아마츄어 자연주의자로 자청하고 해양 탐사선인 90피트의 길이와 24피트의 넓이를 가진 비글호(Beagles)를 타고 해양 탐선에 몸을 실었다. 5년간 남 아메리카 해안 해양지도를 만들기 위한 항해에 참가를 한 것이었다. 그가 남 아메리까 해안에 있는 갈라파고 군도(Galapagos)에 5주일 동안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그 섬에 살고 있는 거대 거북, 검은 도마뱀, 작은 새 들을 수집해서 돌아와서 25년 동안 그들을 연구한 끝에 유명한 저서인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1859년에 출판되었다. 진화론의 시작이었다. 인류학은 현재 직립 보행 인간의 기원을 크로마뇽인으로 보고 있다. 약 350만년에서 450만년 사이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인간의 기원인 네안덴탈인은 태아가 너무 커서 자궁에서 나오면서 충격으로 멸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 이후에 진화되어진 크로마뇽인을 인간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 인류학자들이 최초의 인간의 진화의 발상지를 아프리카로 보고 있고 약 75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일부의 학자들도 있다. 다윈은 처음에 진화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에 적용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인간이 원숭이에 가깝다는 말을 하는 경우에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다른 동물들의 진화를 강조했다. 다윈의 제자들이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진화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기독교 시대가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보았던 시절에 인간이 원숭이와 유사한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이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에 가까운 침판지나 원숭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진화론이 인간의 자존심에 충격을 던진 것이었다. 최근에 컴퓨터의 발달로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가 분석되어 완료되었다는 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케놈 분석은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의 차이가 단지 2%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1978년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제랄드 에델만(Edelman)의 "신경 세포의 다윈니즘"(neural Darwinsm)은 인간의 뇌 세포에도 적자 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이론을 발표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뇌 세포가 가장 자극을 많이 받는 뇌 세포는 번창하고 자극이 없는 뇌 세포들은 도태된다는 학설을 발표해서 뇌 신경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경 세포의 가지치기" 학설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3.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프로이드는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나 이다"라고 발표함으로써 그 때까지 "내 몸의 주인은 내 마음이고 내 자아 이다"라는 학설을 뒤 엎었다. 철학자들은 내 마음의 "의식" 즉 "자유 의지"가 나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어면 하지 않는 것이 내 자유로운 의지(free will) 즉 의식적 자아 이다(consciousness)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프로이드가 의식은 우리의 자아의 지극히 일부분이고 빙산에 비유하면 물 위에 뜨 있는 물 표면에 나와있는 부분이 의식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 속에 잠겨있는 부분이 무의식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70%-80%를 무의식이 차지하고 있다는 정신분석 학설을 처음으로 내 놓아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우리는 출생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경험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기억에서 사라진 부분은 즉 잃어 버린 기억은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져서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머리 속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즉 망각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고 억압되어 의식하지 못하게 무의식 속에 묻혀 있어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프로이드의 설명은 최면학에서 최면에 걸린 환자들이 잊어 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 기억을 최면 상태에서 기억을 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체계화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우리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이 된 전체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20% (빙산의 물 위의 표면부분)과 80%의 무의식(빙산의 물에 잠긴 부분)이 통합되어져서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는 이론을 내 놓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은 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어져서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컴퓨터의 등장으로 무의식 이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945년에 피카드(Packard)가 영화 스크린에 눈에 보이지 않게 자막으로 "코카콜라를 마시라"(drink coke)는 글자를 넣어서 영화를 관람한 후에 관객들이 대부분이 코카 콜라를 마시게 했다. 관객들은 왜 코카콜라를 마시느냐는 관찰자의 질문에 "그냥 먹고 싶어서" 라고 대답을 했다. 스크린의 자막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넣은 것을 의식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생리학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지각" 즉 "무의식의 지각"(subliminal perception)이라고 부른다. 이 실험은 1992년에 다시 복사되어졌다. 실험 심리학에서 피실험자들을 모아 놓고 스크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자막으로 강이라는 단어인 river와 눈에 보이는 단어인 bank를 복합어로 비추어 놓고 여기에 관계되는 단어를 찾게 했다. 1번으로 돈이라는 money와 2번으로 보트라는 boat를 선택하게 했다. 다시 말하면 갈호 안의 글짜는 스크린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뒤의 글짜는 눈에 보이게 해서 복합어를 (river)bank--->money를 선택하느냐 (river)bank--->boat를 선택하느냐를 실험한 것이다. 만약에 피실험자가 무의식적 지각인 눈에 보이지 않는 river를 모르고 bank만 보는 피실험자는 뱅크는 은행으로 돈인 money를 선택할 것이고 무의식적 지각인 river를 지각한 사람은 riverbank의 뜻이 복합단어로써 강뚝이라는 단어임으로 보트 즉 boat를 선택할 것이라는 실험 목적이었다. 대부분의 피 실험자들은 강뚝이라는 단어와 관계있는 보트 즉 boat를 선택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뇌의 세포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세한 지각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Eldelman, 2002": 주(주): 참고). 뇌 신경 과학자인 노벨상 수상자인 에델만은 그의 저서 "의식의 우주"(2002)에서 우리의 뇌 신경 세포들은 서로 정보를 연결해서 경험을 통합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 즉 무의식적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1백 50만분의 1초 이상인 지각에서는 "의식"으로 1백50만 분의 1초 미만의 지각에서는 "무의식"으로 생리학자들은 보고 있다(Edelman, 2002). 우리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도 엄마와 교감을 하고 있으며(태교) 임신 7개월에 엄마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출생 직후에 엄마의 말을 구분할 수 있고 엄마의 젖을 구분할 수 있다는 학자들의 신생아 대상 실험들이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출생 직후부터 2살까지는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뇌에서 언어 지역이 발달하는 하는 시점에 즉 기억의 뇌인 하이포켐파스(hippocampus)가 기억으로 회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2살 이후 기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이전의 기억은 회상할 수 없다. 그러나 출산 직후에 경험들은 아미그달라(amygdala)라는 감정의 뇌에 기억되어진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신생아가 엄마의 신체 접촉과 엄마의 얼굴 표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상식이된지 오래이다. 아기는 구두어인 말을 할 수 없지만 표정어인 비구두어를 사용해서 엄마와 감정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표정어들은 뇌에 경험으로 입력이 되어 우리의 마음의 일부분이 된다. 이후에 성인이 되어 이러 기간인 0세-3세까지의 엄마와 아빠와 아기의 상호작용이 3세-5세 사이에 성격의 골격 형성에 초석이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 이론의 근본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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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기에 조사를 했던 20세기를 빛낼 가장 위대한 3대 사상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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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 니체는 1890년대와 1910년대 유럽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철학자로써 이미 20세기에 들어서기 전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을 예언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이 과학을 맹신하게 되면서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인간의 오만 방자는 결국 과학을 핑계로 파괴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로써 실존주위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고 심리학자인 메이(May, 1953)는 그의 저서 "자아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니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니체는 과학이 공장이 되어가고 있음을 경고 했다. 윤리와 자아의 이해가 없는 기술을 발달은 니힐니즘으로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20세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는 “신은 죽었다”로 썼다. 미친 인간이 마을 광장에 뛰어 들어서 “신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소리치료 다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신은 이민을 갔다, 신이 항해를 가고 없다.”고 했다. 미친 사람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내가 어떻게 신을 죽였는지 말해주겠다," "누가 지평선을 없애버렸는가? 누가 태양과 지구를 떼어 놓았는가? 누가 우리를 사방으로 넘어지게 움직이게 만들었는가? 발 밑에 공허감을 느끼지 못하는가? 암 흙 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모두들 침묵으로 미친 사람을 바라다 보았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자 “내가 너무 일찍 왔나?” 고 그들에게 말했다. 니체는 전통적인 신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회가 핵심 가치를 잃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예언은 대량 학살과 독재자의 출현을 가져왔다. 거대한 이벤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유대교, 기독교의 가치가 시들어 갈 때 야만주의의 밤이 엄습하였다. 니체는 말한다. “새로운 가치의 중심을 발견해야 한다.” 모든 가치의 재 가치와 모든 가치의 변화 가치를 주장했다. 과거의 시대에 하나의 구심점을 역할 했던 가치와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새로운 구심점을 찾기 못했다(May 1953). 프로이드는 니체한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프로이드와 니체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프로이드가 니체의 이론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으로 따 온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김종만(1999)의 저서 "나"에서 니체와 프로이드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25세에 바셀 대학 고전어 교수가 된 니체는 쇼펜하우엘의 영향으로 철학자로 변했다. 그는 1890-1910년 사이에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새 시대의 예언자로 통했다. 토마스 만은 니체를 도덕 심리학자로,크라카스는 니체를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욕구들로 구성되어 있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마음의 에너지는 보존된다. 무의식은 혼란한 생각,감정,본능 속에 존재한다. 꿈 속에서 우리는 초기 인간의 마음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꿈은 개인의 과거와 초기 인간의 과거의 파편들이 나타난다. 본능에는 즐거움 추구 본능,섹스 본능,지식에 대한 본능,Power에 대한 본능 등 많은 본능들이 있다. 한 개의 본능에서 다른 본능으로 마음의 에너지가 바뀔 수 있다. 이것이 승화이다. 즉 공격 본능과 섹스 본능에서 예술 작품의 지적 추구 본능으로 바뀔 수 있다. 분노가 억제되어 어떤 대상에게로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면 거짓 도덕으로 변장되어 나타난다. 야성적인 본능이 방출되지 않고 내면으로 억제되어 죄의식이 된다. 이것이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근원이 된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양심의 목소리는 부모님,선생님,이웃,친지들의 목소리이다. 모든 인간은 마음 속에 여인상을 가지고 있고 그 여인상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 여인상으로부터 직접 자신과 무관한 여인을 존경하는 마음이 나오거나 경멸하는 마음이 나온다. 성적인 욕구의 억제는 억압으로 연결되고 이것은 의식과 기억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 즉 섹스 욕구의 억압이 심하면 섹스 욕구가 느끼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복해야 한다. 인간은 거짓 본능,거짓 도덕으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것을 정복해야 한다. 무의식은 동물적이고 어릴 때 시작된다. 무의식은 출구가 없다. 무의식은 꿈,정신 이상,열정 속에서 표현되어진다. 무의식은 해결 능력을 제시할 수 없다. 무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 없다. 자기 파괴적 본능,공격적 본능은 섹스 본능 못지 않게 강하다. 프로이드는 니체의 주장을 몇 개의 용어만 수정한 채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었다. 원초자아인 Id는 니체에서 따온 용어이고 거짓 양심은 죄의식으로,억제는 억압으로,도덕적 양심은 초자아인 superego로 바뀌었다. 원시인들은 야생의 동물 상태에서 도덕적 양심에 의해서 문화인으로 변했고 도덕과 문화가 원시적 공격 본능을 방출하지 못하게 한다. 야성의 본능이 밖으로 방출되지 않으면 내면의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니체의 주장은 프로이드의 저서 “문화와 불만”속에서 문화는 인간의 본능적 즐거움을 억압하기 때문에 문화가 발달할 수록 인간의 심리적 문제는 많아진다 로 이론화되어 있다(Ellenberg,1970).
2. 칼 마르크스(Karl Marx) 영어로 발음을 하면 맑스이고 독일어로 마르크스로서 맑스 혹은 마르크스로 발음되어 혼란을 주기도 한다.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우상으로 떠 올랐던 맑스는 공산주의 이론을 제창한 사람으로 정작 자신은 나치를 피해서 영국에 망명해서 죽었다. 그의 이론은 레린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졌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년의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 세계를 휩쓴 공산주의 이론이 이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이제 50년의 세월을 실험에 옮겨지면서 허구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지구 상에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나라들 한데서 제대로 밥을 먹고 사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이제 막을 내리고 나라 이름도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동구 유럽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중국 역시 공산주의 이론을 벗어던지고 있다. 맑스는 20세기 초반기에는 각광을 받었으나 이제 반 세기가 지나면서 20세기 후반기에 와서는 그의 이론은 큐바와 북한에서 아직도 빛을 보고 있지만 다시 재 등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맑스는 프로이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종만(1999)은 그의 저서 "나"에서 프로이드에 대한 맑스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맑스는 인간의 경제적 측면을 강조했다. 인간은 계급 투쟁에 의해서 진화되며 정의는 절대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 계급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고립된다. 노동자와 농민은 지배 계급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지배 계급들은 노동자,농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간의 경제적인 측면 대신에 프로이드는 인간은 섹스에 의해서 진화한다는 섹스적 측면이 강조되고,인간은 계급 투쟁 때문에 서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갈등 때문에 고립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무의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환자는 자신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도록 만들어 줄 때 증세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김종만, 1999).
3. 프로이드 프로이드는 이미 19세기 말에서 전 세계의 지식인들로부터 20세기를 대표할 3대 사상가로써 손꼽히고 있었다. 그가 쓴 "꿈의 해석"이 1900년에 출판 되면서 이미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그가 20세기를 대표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프로이드는 꿈 해석에서 자신과 환자들의 꿈을 약 1000여개를 분석해서 인간의 내면 심리적 움직임을 현미경을 보듯이 미세하게 관찰했다. 이 책이 출판 되면서 전 세계인이 깜짝 놀라 프로이드는 하루 아침에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명사가 되었다. 꿈 해석은 이미 100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지금에 읽어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꿈 해석이라는 책을 성서의 바이블처럼 "3년마다 한번씩 되풀이 읽어야 하는 책"으로 "꿈 해석을 읽어보지 않고는 정신분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말하고 있다.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인 실존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프롬(Erick Fromm)은 프로이드는 100년 내지 2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로써 앞으로 100년 이내에는 프로이드를 뒤엎을 정신분석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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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100년 사에서 가장 위대한 공적을 남긴사람 | |
| 20세기 말에 세계적인 시사 잡지인 TIME사는 1900년에서 2000년의 100년의 역사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사람 100명을 선정하기도 하고 전 세계의 석학들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그 결과 1위는 프로이드였고 2위는 아인슈타인이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창설을 만화의 그림으로 만들어서 표지 모델로 1999년 3월 29일짜 TIME의 표지 모델로써 아인슈타인이 환자로 프로이드의 치료실에 있는 카우치에 누워있는 만화를 삽화로 출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을 하는 것만을 즉 우리의 의식적 자아만을 자아로써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등장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80%의 무의식도 자아에 포함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의식하는 20%와 무의식의 80%가 통합이 되어서 전체 내 자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게 된 것이다. 이후에 무의식적인 "나"를 찾는 탐색의 여행이 정신분석에서 시작된다. 이 여행의 가장 좋은 예가 꿈의 분석이 정신분석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정신 의학과 심리학 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과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현대 문학 뿐만 아니라 전위 음악, 전위 무용, 추상파 미술 등에서 강조하는 무의식의 표현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소개하는 한 개의 글을 인용한다(김종만, 1999). “현대 예술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해 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로서,우리는 프로이드의 심층 심리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예술가의 직관을 통하여 막연하게 나마 파악된 바 있었던 인간 의식의 어렴풋한 분야가,이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의학자나 심리학자 못지 않게 예술가에게도 그 끼친 바 영향은 심각하였다. 프로이드의 연구는 원래 임상 의학적인 것에서 출발하였지만,억압된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일일이 헤쳐 가면서,거기서 이른바 ‘검열’에 걸려 억압된 본능적 욕망을 밝혀 냄으로써 19세기 인간관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분석학이 무의식 세계의 이름지을 수 없는 불안과 소망,욕구와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게 됨으로써,인간의 내적 심층에 대한 새롭고 넓은 시야가 열렸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괴물의 정체가 더 잘 설명될 만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욱 더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열림으로써,예술가는 자신의 감수성과 통찰력을 구사하여 프로이드가 발견한 마음의 비밀을 자기들 나름으로 또한 찾아내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1차 대전 후의 새로운 심리주의 작가들은 이 방법을 빌려서 이른바 ‘의식의 흐름’의 문학을 만들어 냈다. 즉 현실을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래의 평면적인 묘사 방법을 탈피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학은 물론 미술의 영역에까지 가장 현대적인 주장의 하나로 지목될 수 있는 초현실주의도 심층 심리학의 영향 아래 생겨났다. 그것이 주장한 바는 조화나 비례,리듬 같은 19세기적 ‘밝은 세계’의 미학 원리를 배제하고 그 대신 무의식 세계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갖가지 형상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미적 효과를 얻자는 데 있다. 초현실주의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와 심미적 윤리성과 선입견 없이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적을 따름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현실적 의식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 연상,또는 꿈이나 상상 같은 비합리성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적 차원으로 대상을 옮기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현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길로 흐르는 것은 필연이며,기존의 가치를 증오와 모멸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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