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건강

심인성 질환 알아 보기 4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심리적인 원리들 2017. 2. 2. 06:42

심인성 질환 알아보기 4

 

일반적으로 심인성 질환이란 글자 그대로 심리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질병으로 인식되어져 있는데 이것을 잘못된 인식이다. 몸의 병을 질환, 질병으로 마음의 병 즉 심리적인 병을 정신질환, 정신병으로 알고 있는 상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질환, 정신병들은 병원에서 종합 검사 결과 신체적인 이상이 발견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미국 정신의학 학회에서는 1980년에 제 3차 정신장애에 대한 진단과 분류 통계 지침서인 DSM-Ⅲ에서 정신질환 정신병이라는 말을 제거하고 정신이상, 정신장애, 정신 혼란이라는 말로 대체 시켰다.


정신장애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한다. 신경증과 정신증이다. 신경증은 일상생활, 결혼 생활, 사회 생활(직장)이 가능하고 주로 통원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포함되는 장애들로 영어로는 뉴로시스(neurosis)이고 독일어로는 노이로제를 말하는데 불안증과 우울증이 여기에 포함된다. 정신증은 일상생활, 결혼생활, 직장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로써 정신병원에 입원이 불가피한 정신분열증, 조울증, 편집증, 망상증 등이 포함된다.


프로이트가 고안한 정신분석 치료는 신경증 치료를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은 신경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이후에 정신분석가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확대, 개선, 수정을 해서 정신증 환자들을 치료를 할 수 있게 고안을 했다. 그런데 신경증보다는 심각하고 정신증 보다는 덜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보드라인이라는 말이 1938년에 정신분석가 아돌프 스턴(Adolf Stern)에 의해서 학계에 보고 되어졌다. 보드라인(borderline)이라는 말은 신경증도 아니고 정신증도 아닌 중간에 해당되는 모든 정신장애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써 정신분석가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모든 정신장애들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로 정신장애의 쓰레기통이라고 별칭을 붙였다.

 

1960년대에 뉴욕 코넬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컨버그(Kernberg)가 정신장애를 세가지로 분류를 했다. 신경증, 보드라인 그리고 정신증으로 분류를 했다. 그러나 보드라인이라는 말에 신경증과 정신증 양쪽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정신장애들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너무나 범위가 넓고 종류가 다양하다는 반론들이 등장하면서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건드선(Gunderson)이 성격장애라는 말로써 12개의 성격 장애로 세분화 시키면서 이제 보드라인 장애는 보드라인 성격장애 속에 포함되어지게 되었고 1980년 제 3 차 개정판인 DSM-Ⅲ에서 12개의 성격장애가 포함된 성격장애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Weiner, 1977).


간단하게 정신장애의 역사를 정의를 한 것이다. 이제 심인성 질환의 의미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심인성 질환은 심리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질병, 질환을 의미한다. 본태성 고혈압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고혈압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혈압이 올라간다. 십이지장 궤양은 십이지장에 궤양이 생기는 질병이다. 루마치스 관절염은 관절에 이상이 생긴다. 이들 질병들은 약물로는 치료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고질병이라고 부르는 질병들이다. 정신분석가들이 이들 질병들을 정신분석 치료로써 치료를 한 결과 완치가 된다는 것이 학계에 보고되어지면서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기는 질병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 질병들을 심인성질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심인성 질환은 영어로 psychosomatic 이라고 부르는데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심리신체 질병 혹은 정신신체 질병으로 불린다. 종합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신경증과는 다르게 신체적인 이상이 발견되기 때문에 심인성질환 즉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기는 질병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심인성 질환은 194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미국에서 두 개의 학파로 등장하게 된다. 뉴욕학파와 시카코 학파가 그들이다. 뉴욕 학파는 뉴욕 정신분석가 협의와 뉴욕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메틸타 스페링(Metilda Sperling)에 의해서 시작되어 그녀의 제자들의 그룹이 심인정질환의 치료와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컬럼비아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필립윌슨({Philp Wilson}과 뉴저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이라 민츠(Ira Mintz)가 중심이 된 그룹이다. 두 번째 학파는 시카고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프란츠 알렉산더(Franz Alexander)가 세운 시카고 정신분석학교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학파이다.


 알렉산더는 항가리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베르린 의과 대학 그리고 영국의 켐브리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분석을 공부한 의사 겸 정신분석가로 시카고에 와서 시카고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고 L.A에 남가주 정신분석학교와 남가주(USC)의과대학 교수로 만년을 보낸 사람으로 심인성 질환의 7개의 질병을 연구발표 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따서 시카고 세븐(seven)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Wilson et al, 1989).


참고로 시카고 세븐(7)신경성 두통편두통, 본태성 고혈압, 기관치 천식, 신경성 피부염(아토피 습진), 소화성 궤양(십이지장 궤양), 과민성 대장염(크론 병(Crohn’s disease)포함), 루마치스 관절염이다.


심인성 질환에 대한 연구의 뿌리는 이미 18세기 때부터 역동적 정신의학의 발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동적 정신의학은 과학의 등장으로 마음의 연구가 시작된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몽유병과 히스테리아의 최면 치료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의사인 메즈머(Mesmer)가 자석치료 기법을 고안해서 자석 치료, 자장 치료, 유체이론을 들고 나와서 중세 때부터 귀신 이론으로 귀신들린 사람들 한데서 에소시즘(Exorcism) 즉 퇴마의식으로 귀신을 쫓는 굿을 행하여 왔던 것에서 귀신이 아닌 병에 걸린 사람으로 치료를 하는 기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메즈머의 제자들에 의해서 최면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즉 게몽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무지, 미신,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이성, 과학, 깨달음으로 바뀌면서 귀신 이론이 히스테리아라는 병으로 치료 기법으로 최면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 학자들에 의해서 최면의 본질이 제시와 긴장 방출의 효과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짐에 따라서 어린 시절의 마음의 상처와 관계된 감정이 신체적인 질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발견으로 마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본 괘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Ellenberger, 1970).


1 회 국제 심리학 총회가 1889년에 파리에서 개최되었을 때 심리학회 회장이 가르코트(Charcot)였고 정신분석의 창설자인 프로이트와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즈(William James)가 참석을 했다. 가르코트는 최면학을 의과 대학에 도입해서 히스테리아의 치료로 확대시킨 장본인으로 그의 영향력 때문에 제 1 회 국제 심리학회는 생리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체 되었다. 그러나 심리 과학은 이미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분트(Wundt)에 의해서 10년 전에 실험실에서 1879년에 설립이 되었다.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한 윌리암 제임즈(William James) 12년 동안 연구한 결과를 1890년에 심리학의 원리라는 심리학 개론의 서적을 출판했고 그리고 1895년에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해서 정신분석학의 탄생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Ellenberger, 1970).


1892년에 런던에서 열린 제 2 회 국제 심리학 총회에서 명실 공히 심리학은 과학으로써 독립된 학문으로 개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독일의 엘린겐 대학(Erlangen University)의 부총장으로 선출된 아돌프 스톰펠(Adolf Strumpell, 1892)의 취임 연설문이었다. “마음의 이미지 상들을 통해서 질병들을 치료하는 것과 질병의 원인들의 근원을 밝힘”이라는 연설문이 1892 11 4일에 취임 연설에서 강연을 한 것이었다(Ellenberger, 1970).


이 연설에서 그는 고대시대부터 인간의 질병에 대한 심리적인 효과는 인정을 받아왔다. 질병에 대한 약물의 효과는 그 환자가 그 약물에 대한 믿음의 효과(플래시보 효과)가 치료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최면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최면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젊은 의사들이 심리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최면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의과 대학생들이 교육과정에서 생리학이 필수과목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앞으로 심리학이 필수과목으로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 라는 유명한 연설로써 20세기의 심리 과학과 심리치료의 등장을 예언을 했다는 점이었다(Ellenberger, 1970).


마음의 핵심 요소인 감정이 질병에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일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즉 상사병과 향수병 울화병, 화병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심한 경우에는 사망할 수도 있다.


면역학이 등장하게 되면서 심리적인 원인의 질병인 심인성 질환이 급 스피드로 발전하게 된다. 1962년에 뉴욕 의과대학 메디칼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아드(Robert Ader)가 마음과 신경 호르몬 조직과 면역학의 상호작용 관계를 신조어로 만든 심리신경면역학(Psychneuroimmunology)(PNI)이 등장하면서 심인성 질환 의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Weiner, 1977).


지금은 심인성 질환 의학, 메디칼 심리학, 행동 의학, 심리신체 의학, 심리사회 의학 등의 이름으로 통용되어지고 있다.


1950년대에 등장한 스트레스 이론이 심인성질환 의학의 발달에 한몫을 했다. 항가리 의과대학 졸업생인 한스 셀리(Hans Syles)가 캐나다의 몬트리올 의과대학에서 1936년부터 신체 실험 생리학 연구실에서 20년 간의 연구 끝에 1956년에 출판한 삶의 스트레스 라는 책에서 스트레스가 어떻게 신체 질병을 일으키는가?를 실험으로 밝히게 됨으로써 마음과 감정이 질병을 일으키는 과정이 실험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셀리는 의과대학생 시절부터 동물들에 독극물을 주사를 할 때마다 그 동물의 부신 호르몬 샘이 커지고 임파구가 수축된다는 것 그리고 스트레스가 계속될 때 그 동물의 위와 장에 궤양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스트레스 이론으로 1949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인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기 반응(인체 조직에 경고)을 일으키고 이것이 장기화 되면 저항 반응(만성화로 적응)으로 그리고 마침내 조직 파괴(질병)로 연결된다는 일반적인 적응 증후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Weiner, 1977).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조직이 자율신경 조직이고 위기 상황에서는 교감신경조직이 작동을 해서 심장이 빨리 뛰면서 혈압이 올라가고 아드레날 호르몬이 혈관을 수축하고 심장 박동을 증가시켜서 에너지인 혈당을 뼈 근육 조직으로 평소보다 300-400배로 빨리 이동을 시키게 되면서 소화기능과 섹스 기능이 약화된다는 위기 조직의 과정을 생리학적으로 밝혀졌다. 위기가 끝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소화기관과 섹스 기관으로 에너지가 회복되면서 평상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면역 기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스트레스가 상승하게 되면 면역 기능이 감소하고 면역 기능의 감소로서 각종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면역 조직에 의해서 밝혀진 면역 질병이 바로 알레르기 질병으로 아토피 습진, 비염, 천식은 서로 사촌간으로 인체에 외부 물질인 항원이 침입하게 되면 몸 안에서 이것을 감지하는 백혈구 조직들 즉 T세포와 B세로, 식세포들 그리고 자연살해 세포 들이 동원되어 외부에서 침입한 병균들을 둘러싸고 파괴시키고 잡아먹게 되는데 이러한 면역 조직이 인체에 무해한 특수한 항원들을 적으로 간주해서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긴 질병이 자가 면역 질병으로 대표적인 질병이 루마치스 관절염이고 면역조직 세포가 악성으로 변한 것이 백혈병이고 외부의 바이러스에 의해서 면역 세포가 파괴되는 질병이 에이즈(AIDS)로 밝혀지게 되었다(Weiner, 1970).


요약해서 정리를 해보자. 감정들 분노, 짜증, 미움, , 노여움, 적대 감정들이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면서 신체적 긴장이 올라가고 긴장의 방출구가 막히게 되면서 장기화 되어 신체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심인성 질환이고 아직도 신체적인 이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신경증이고 신경증 보다 좀더 심각한 장애가 자아 장애(성격장애)이고 아주 심각한 장애가 정신증(정신분열증, 조울증, 편집증, 망상증)이 아닌가!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의 신경증 치료 이후에 다양한 장애들 즉 성격장애, 정신증 그리고 심인성 질환을 치료하는 핵심 치료 기법으로 등장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다.


치료자는 35년 동안 정신의학과 심리과학의 연구와 치료를 해 오면서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한 개의 장애 즉 우울증, 불안증, 성격장애 혹은 정신증이라는 이름을 신경정신과로부터 달고 오지만 분석 치료의 과정에서 두통, 비염, 천식, 아토피 습진, 십이지장 궤양 등의 소화성 질환들 중에서 한 개 혹은 두 개를 함께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이 한 개의 장애만 가지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고로 치료자는 이들의 이름을 페키지 치료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안증을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불안증을 치료를 하면서 소화성 문제, 아토피 습진과 같은 알레르기 질병들과 심인성 질환들을 함께 치료를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여러 개의 장애들을 한 번의 심리치료를 통해서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점에서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대상: 24세의 남자 C


증세: 손에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과 눈이 찔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젖꼭지가 물어 뜯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접촉: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보고 메일로 치료를 받고 싶다고 치료를 요청해 왔음


진단명: 다한증은 심인성질환에 포함, 눈이 찔리거나 젖꼭지가 물어 뜯길지도 모르는 것은 공포증, 대인공포증


치료 기간: 1주일에 1회씩 2시간으로 1 6개월째 치료를 받고 있음

치료의 결과: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심인성질환인 다한증과 눈이 찔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젖꼭지가 물어뜯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러나게 되었다. 다한증은 약물을 복용해 왔으나 치료가 1년을 넘어가면서 지금은 약물 복용을 하지 않고도 손에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음


치료의 과정

C군은 대인관계 문제로 치료자를 찾아왔다. 그는 처음에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 공익 근무 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같이 근무를 하는 동료들과의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치료를 시작하면서 손에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 문제와 눈이 찔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젖꼭지가 물어뜯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의 공포증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치료 초반기에 밤이 되면 창가에 비치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때문에 두려움으로 잠을 제대로 깊이 잘 수 없었으나 치료가 5개월 정도 지나가면서 밤에 잠을 자는 문제는 사라졌다.


다한증이 심할 때는 손에 땀이 흘러서 손을 물에 씻는 것처럼 주루룩 흘러내리는 정도가 되었고 인터넷에서 다한증을 치료하는 신경 정신과 의사의 치료 처방으로 약물을 복용하면서 약간 감소되었으나 계속해서 다한증은 계속되었다.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되면서 다한증이 심리적인 원인으로 심인성질환에 소속되어있다는 말을 듣고 수긍을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다한증이 심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C군의 어린 시절의 역사: C군은 유치원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유치원 때 찍은 칼라 사진첩을 가지고 와서 분석 치료 시간에 그 사진첩에 사진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부모님이 직접 찍어준 사진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불과 몇 장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치원 때 선생님이나 학부모가 찍어준 사진들을 사진 첩에 모아두고 있었다.


특별히 그는 유치원 시절에 동료들보다 인물도 뛰어나게 보이고 동료들의 리더로써 활동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씁씁해 했다. 그 때는 다른 동료들보다 뛰어났고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던 사진들이 있었다. 연극 공연 활동을 찍은 사진에는 인디안 차림의 소품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던 때 동료의 어머니가 소품을 챙겨주어서 그 동료와 같이 소품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또 군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에는 그가 한쪽 양말을 싣지 않고 맨발로 있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한쪽 발을 뒤쪽으로 빼려고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어머니에게 분노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다. 언제나 어머니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유치원 때 찍은 행사 사진에는 어머니는 거의 없었다. 부모가 어린 시절에 찍어준 사진이 거의 없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가족 사진은 거의 없었다. 동료들이나 선생님들이 찍어준 사진들이 전부였다고 울먹였다.


C군은 치료의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고통스러웠던 상처들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되어갔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 고통스러움이나 괴로움을 부모님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유치원 때 어느 날 동료들과 함께 찍은 단체 기념 사진을 선생님으로부터 받고 나서 그 사진을 들고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에게 "엄마 이 사진을 보세요. 유치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받아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으나 엄마는 계속 잠만 자고 반응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엄마는 아들 C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모르는 체 하고 잠을 자고 있었다. C군은 화가 나서 그 사진을 손으로 꼬깃꼬깃 짓뭉개 버리고 울면서 뛰어나와서 상점 앞에 걸려 있는 그가 사고 싶은 장난감을 보면서 서 있었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엄마에게 그 칼라 사진을 보여주고 칭찬을 받고 싶었고 엄마에게 그가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그 장난감을 사달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던 것이다. 유치원 때 사진 첩을 보면서 그 꼬깃꼬깃 꾸겨진 사진이 사진 첩에 들어있는 것을 치료자에게 보여주면서 분노와 적대감정으로 치를 떨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유치원 시절에 항상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엄마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의 내면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유치원 때의 자아가 울면서 C군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목소리를 듣도록 치료자가 도와주었다.


C군은 유치원 시절에는 한번도 유치원을 결석을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언제나 유치원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유치원 때 찍은 여러 장의 단체 칼러 사진 속에는 C군이 평소에 좋아했던 유치원 선생님 옆에 서서 찍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엄마는 없었고 대신에 유치원 선생님이 서 있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진에는 그가 좋아하는 유치원 선생님이 원장 남자 선생님 때문에 C군 옆에 서지 못하고 떨어져 서 있는 것에 불쾌해 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행사 공연 사진에는 그가 역할을 담당했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C군의 유치원 시절의 칼러 사진들을 보면서 C군의 어린 시절의 삶이 총 천연색으로 채색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석을 해주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유치원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다른 동료들보다 항상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행사와 공연에 참가했던 것을 회상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아버지가 주식에 손을 대면서 가지고 있던 자택을 팔고 전세 집으로 들어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싸우셨고 아버지는 늘 술을 마시고 신체 한탄을 하는 것을 보면서 C군의 마음 속에 고통이 누적되어갔고 이런 가족 사이에 갈등과 고통은 동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인으로 작동을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고 노동일을 하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일을 했고 어머니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결혼을 하면서 공장에 다니느라고 C군의 양육에는 무관심이었다. 유치원과 자택이 불과 몇 미터였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C군의 유치원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고 어머니도 유치원 행사에 거의 불참을 했다.


C군은 지금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 함께 온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 것이 단지 두 번 박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은 어린 시절에 온 가족이 모여서 같이 라면을 끓인 것을 같이 먹는 기억이었고 나머지 한 기억은 아버지가 집을 주식으로 날리고 전세 집에 이사를 가던 날 아버지와 함께 가족들이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던 기억이 전부였다. 외식을 하면서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서 신체 타령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나와 C군은 음식만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불쾌한 얼굴 표정이었고 가족들은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C군의 가족들 사이에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냥 밥먹어라, 이것해라 라는 말 이외에는 서로 말이 없었다. C군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 느낌, 지각, 상상들을 말로써 표현하는 능력에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치료의 과정에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내면 욕구와 상상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했다.


C군은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고통스러운 가족들로부터 독립해서 집에서 나오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혼자서 나와서 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했다. 혼자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이름있는 대학에 합격을 했으나 학교를 휴학하고 쉬면서 군복무를 마칠 생각으로 공익 근무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고 군 복무가 끝나면서 6개월 동안 수능을 다시 치려고 공부를 하다가 수능 성적이 잘 나오지 않게 되자 학교에 복학을 하려고 결심을 하면서 서울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는 서울에서 혼자서 원 룸에서 생활할 돈을 벌기 위해서 3개월 동안 컴퓨터 방에서 야간 일을 했다. 이후에 서울에서 원룸을 구해서 이사를 했고 일자리도 구했다. 일을 하면서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으로 심리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다.


C군은 어린 시절의 기억의 회상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쯤에 엄마에게 유명한 사람들의 전기 전집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C군의 성화에 전집을 사 왔었으나 그 전집은 C군이 요구한 그 전집이 아니고 유치원 어린이들이 보는 전집이었다. 다시 엄마에게 바꾸어달라고 했으나 엄마는 아무거나 사서 읽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에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이 기억을 회상하면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분노를 말로써 표현하게 했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많은 책들을 읽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전기책을 사서 읽다가 명절이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갈 때 그 책을 가지고 갔다고 잊어먹고 온 것을 알 게 되어 다시 그 책을 새로 서점에서 사서 읽었던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C군의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서는 지식은 머리 속에 넣어서 저장된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책을 읽었던 것들을 동료들이나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에게 졸라서 한 계례 신문을 3년 동안 구독을 했다. 그는 신문을 통해서 다양한 시사 교양 지식을 넓히기로 마음을 먹고 신문을 열심히 구독을 했다. 또 그는 야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야구 선수의 특징, 타율, 외국 야구 선수들의 이름들을 잘 알고 야구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이야기를 하는 소재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치료자는 C군에게 인간이 수 많은 경험을 하고 공부를 통해서 지식들을 쌓아가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함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재로 사용하고 내가 살아가는데 내 자아의 지식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C군은 이렇한 좋은 지식들을 머리 속에 넣어 놓고 사장해서 죽은 지식이 된 것을 지적을 했다. 대인관계에서 C군은 어떤 말을 할 것인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바로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 대인관계의 소스가 아닌가! 라고 해석을 해주었다.


최근에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된지 2개월 만에 어머니가 누나와 함께 C군이 살고 있는 원룸을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C군은 어머니와 누나의 방문이 환영을 할 수 없으면서도 No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방에서 밤 열차를 타고 서울에 새벽에 도착을 했다. C군이 새벽에 마중을 나가서 함께 차를 타고 왔다. 어머니는 C군의 원룸에서 피곤하다고 하며 6시간을 잠만 자고 오후에 바쁜 일이 있다고 하며 누나와 함께 떠났다.


가족이 세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눈 시간이 없었다. 몇 마디 인사를 한 것이 고작이었다. C군은 이번 만남에서 엄청나게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이 후유증으로 C군은 3주일 동안 휘청거리면서 이 후유증에서 회복하는데 엄청나게 대가를 치루었다. 그는 단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하는 6시간 동안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웠는데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약 20년간을 같이 살았던 고통은 어떡했겠는가!


지금까지 그 고통스러움을 참고 살아온 자신의 자아에게 미만하고 그러한 껄끄러움을 외면하고 서로 말이 없이 타인처럼 4명의 가족이 함께 살아온 자신의 과거의 시절을 안타까워했다.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느끼고 깨닫기 못하고 한 집에 살아왔던 것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를 느끼고 감지하고 깨닫고 있는 자신의 새로운 자아의 성장을 보도록 했다.


어머니는 C군을 방문하기 위해서 이번에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서 평생에 처음으로 기차를 타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C군에게 당분간 생활이 안정되어질 때까지 매달 생활 비용의 일부를 부담해 달라는 C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은행에 가서 C군에게 돈을 송금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폐쇄적인 생활 방식은 C군이 공익 근무를 하고 있었던 몇 년 전에 C군이 대형 슈퍼마켓에 갔을 때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당황해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하는 모습 즉 슈퍼마켓에 가면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주워 담아서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행동들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서 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치료자가 지적을 해 준 것은 어머니는 평생 동안 자신의 자아 안에서 갇혀서 폐쇄적인 생활을 해 왔고 이것을 C군이 동일시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데 어머니를 유사하게 닮아있는 모습을 보도록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 즉 자아 안에서 갇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피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자아의 모습을 이번 기회에 깨뜨리고 서울에 올라 와서 집도 구하고 직장도 구하고 생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살아 가고 있는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스스로 힘주어 말을 했다. 자아가 그 만큼 성장을 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어린 시절 유치원의 자아가 발달이 중지된 것을 새로 성장시키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동일시한 자아의 틀을 깨고 과감하게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치료를 받으면서 배운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C군이 치료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나가면서 그는 기말 시험이 다가 오는 6월 초순에 5개월 동안 치료를 중단했다.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 해 보고 싶다는 제안에 의해서였다. 5개월이 지난 후에 10월에 다시 치료를 재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치료는 10월 달에 다시 시작 되었다. C군의 2 6개월의 치료의 과정을 상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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