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등장 Ⅱ: 히스테리아(hysteria), 최면학(hypnosis)
정신분석학을 공부를 하려면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히스테리아는 프로이트가 의사가 되어서 처음으로 진료를 하게 된 여성 환자(Anna O)가 히스테리아 환자였기 때문에 이 여성 환자를 치료 하게 되면서 프로이트의 인생이 신경과 의사로부터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자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면학(hypnosis)은 프로이트가 안나 오(Anna O)를 치료하려고 했을 때 신체적인 이상이 없는 심리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그 당시 그녀와 같은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프로이트가 프랑스에 최면학을 공부를 하려고 1년간 유학을 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에 의해서 정신분석학이 태어나게 된다.
고로 정신분석학을 공부를 하려고 하면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을 알아야 정신분석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 히스테리아(hysteria)
히스테리아는 그리스 시대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히스테리아 라는 병명을 만든 사람은 히포크라테스이다. 그는 의학의 아버지이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첫 출발을 할 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고 있는 바로 그 히포크라테스이다.
히스테리아 라는 말인 hysteria는 그리스어로 자궁이라는 말인 hyster와 i라는 병(illness)이 조합이 되어서 “자궁이 떠 돌아다니면서 병을 일으킨다”라는 말에서 유래를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 말을 신조어로 만들어 낼 때 자궁이 몸 안에서 이곳 저곳으로 떠 돌아다닌다고 생각을 해서 이 말을 만들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지금 생각하면 자궁이 떠 돌아다닌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러나 약 2500년 전에 그러한 병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자궁이라는 말은 여성과 관계된 병이라는 말이고 이것이 섹스와 관계 된다는 말로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 “여성과 섹스와 관계된 질병”이라는 뜻은 가르코트(Charcot)와 프로이트에 의해서 밝혀지게 된다(Ellenberg, 1975).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것은 히스테리아가 질병으로 분류되어져서 치료를 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히포크라테스는 담즙이 많이 생산되면 우울증이 되고 적게 생산이 되면 히스테리아 병이 된다는 식으로 병의 원인을 진단을 했다는 것을 오늘날 보면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을 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히스테리아는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질병으로 존재하다가 중세의 기독교 시대로 바뀌면서 질병에서 사라지게 된다. 19세기 말에 가르코트와 프로이트에 의해서 히스테리아는 심리적인 원인의 질병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 것을 염두에 두면 왜 중세에서 히스테리아가, 마녀, 귀신, 악령, 악마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중세는 기독교 시대로 마음은 영혼으로 대체 된다. 즉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마음, 심리인 psych가 혼, 영혼인 soul, spirit로 바뀌게 된다. 몸과 마음이 신체와 영혼으로 바뀌면서 히스테리아는 마녀, 귀신, 악령, 악마로 바뀌게 된다. 즉 마음의 병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뜻으로 기독교에서 마음의 병이 귀신, 악마, 악령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5).
중세의 귀신학은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다. 귀신에 쏠린, 마녀, 악마에게 감염된, 악령이 점령하고 있는 육체는 악령의 전염을 막기 위해서 불태워 죽이는 화형식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성녀인 잔다크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서 마녀로 화형에 처해진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마녀, 악마, 악령, 귀신이 건강한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서 악마가 된다는 믿음 때문에 건강한 사람에게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그 영혼을 불태워 죽여야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화형식으로 변질이 된 것이었다.
그 결과 14세 - 17세기 유럽에서는 귀신, 마녀, 악마, 악령에 감염 되었다고 해서 화형에 처해진 여성들이 10 만명이 넘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귀신에 감염된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용어에서 나온 말이 마녀 사냥(witch hunting)이라는 말로 오늘날 정치 사회적인 용어로써 이 마녀 사냥이라는 말이 “죄 없는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뒤집어 쓴다”, “마구 잡이 식으로 몰고 간다”라는 용어가 된 것이다. 왜 하필 여성들이 많았는지?(강간과 폭력의 희생자로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는 이후에 밝혀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3만 명이 마녀로 오인 받아서 화형으로 처형 되었고 제네바에서는 3개월에 300명이 화형으로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Ellenberg, 1975).
근대로 옮아 오면서 14세기-16세기에 르레쌍스로 문예부응의 시대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 로마의 문예 부응을 부르짖으면서 이태리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은 무지, 미신, 종교적인 맹신으로부터 절대 왕권의 시대의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질서의 시대로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로 흘러가면서 사람들이 무지, 미신, 맹목적 믿음에서 깨어나기 시작해서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변하게 된다(Ellenberg, 1975).
요약을 하면 17세기까지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귀신이 들린 사람으로 취급해서 때리거나 고통을 가하거나 고문을 가해서 몸에 숨어 있는 귀신을 몸 밖으로 도망을 가도록 하는 고통, 고문, 체벌이 귀신을 쫓아내는 유일한 방식으로 유행을 했다. 귀신이 몸에 들어와서 견디지 못하도록 고통을 주어야 그 사람의 몸에서 빠져 나간다는 방식의 유형 때문에 20세기 전까지는 여러 가진 고문, 체벌, 체형을 가하는 도구들이 정신 의학의 역사로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방식들은 오늘날 21세기에도 가끔씩 종교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굿으로 치료를 한다고 하다가 환자가 발짝을 하게 되면 귀신을 쫓아낸다고 때리고 두들겨 패서 사망하는 사건들이 자주 신문이나 TV에서 보도가 되고 있다. 더욱 더 상세한 것은 다음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귀신을 쫓아내는 굿의 등장(exorcism)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캐토릭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굿들이 유형을 했다. 이것이 바로 엑소시즘(exorcism )이다. 이것이 영화로 된 것이 공포 영화로 오멘(Omen)이라는 영화이다. 신부가 예복을 입고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귀신이 들린 소녀에게 다가가서 몸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면 불태워 죽이겠다고 십자가와 성경을 가까이 가져가면 발짝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의 모습이다(Ellenberg, 1975).
1772년에 캐토릭 신부인 가스너(Gassner)가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직접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사건이 발발했다. 그 당시에 18세기 후반기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맹목적인 믿음에서 깨어나면서 눈에 현실로써 보이는 것을 믿게 되는 시대로 발전을 한 것과 관계가 있었다.
가스너는 신부로써 정장 차림으로 예복을 입고 손에 십자가와 성경책을 들고 귀신이 들린 마녀들을 붙잡아 오게 했다. 사람들이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붙잡아 오면 광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가까이 가져가면서 “귀신아 물러가라! 네가 몸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면 불태워 죽이겠다”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와 성경을 가까이 마녀 몸에 가져가면 발짝으로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꼼짝 못하게 묶거나 붙잡아 두고 계속해서 성경과 십자가로 주문을 외우면서 몸에 가까지 가져 가면 귀신이 들린 사람은 발짝과 고함과 발악을 1시간 혹은 2시간을 하다가 나중에 힘이 빠지면서 조용해지게 된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귀신이 빠져 도망을 갔다고 눈으로 보면서 믿게 되고 마녀에 홀린 그 여성은 털털 털고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스너가 사람들에게 직접 눈으로 보도록 시범을 보여주면서 전국에 소문으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5).
캐토릭 교구에서는 신부인 가스너가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소문이 나면서 세상이 떠들썩 하게 소란이 일게 되자 이것이 귀신을 쫓는 것이 신부의 본업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수사를 하게 된 것이다. 즉 청문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청문회 수사 위원으로 참가를 하게 된 사람들이 그 당시에 유명한 의사의 한 사람으로써 메즈머(Mesmer)가 참가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5).
최면학의 등장 초반기: 유체 이론, 동물 자장 이론
메즈머는 신학을 공부 했다가 그만 두고 만학도로서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된 사람으로 가스너의 청문회의 한 멤버로써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의과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당시에 영국의 어떤 의사가 자석으로 병을 치료를 한다는 논문을 읽고 자석과 몸의 질병과 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메즈머는 청문회 멤버들 앞에서 실제로 가스너가 귀신 들린 마녀를 치료를 하는 시범에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5).
가스너가 신부 예복을 입고 십자가와 성경책을 들고 마녀에게 다가가서 주문을 외우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메즈머는 가스너의 귀신 쫓은 과정을 캐토릭 예복, 성경, 십자가가 없이 손가락 하나로써 똑 같은 과정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수사 위원회에 참가를 했던 사람들이 메즈머가 가스너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 한 개로써 시범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종교적인 행사가 아닌 일반적인 과정으로써도 유사한 결론을 얻는 것을 본 것이었다. 여기에서 최면학의 시작이 등장하게 된다.
수사 위원회의 수사 결과 캐토릭 교구에서는 최종 결정으로 가스너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귀신 쫓는 굿을 하지 말고 정해진 교구 안에서만 시행을 하도록 한정을 함으로써 가스너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메즈머(Mesmer)가 등장하게 된다.
이제 가스너 대신에 매즈머 시대가 등장을 한 것이다. 메즈머는 의사 출신으로 자신의 이론을 정리하고 한 개의 이론으로써 논문과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만유 인력과 전기 이론과 자장 이론들이 이미 등장한 과학 시대가 시작된 시쯤이었다. 메즈머는 사람들 앞에서 직접 손가락 하나로 사람들이 오고 가게 하는 시범들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메즈머의 손가락 하나로 당기면 달려오고 밀어내면 멀려 가는 신기한 자석 모양으로 사람이 끌리고 밀리는 최면의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메스머는 자신의 이론을 동물 자장 이론과 유체으로 개발을 했다(메스머(Mesmer)라는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동물 자장 이론, 유체 이론) (Ellenberg, 1975).
메즈머의 인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져서 오스트리아의 전역이 메즈머의 열풍으로 들끓게 된 것이다. 메즈머는 자신이 만유인력처럼 새로운 이론을 발명을 했다고 떠들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시범을 보이고 눈으로 믿게 했다. 메즈머의 인기가 오스트리아의 황실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 당시 황실의 원로로 나이 어린 황제의 어머니였던 합스부르그 왕가의 유명한 섭정 정치인인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면서 그녀가 메즈머를 불러서 그녀의 시종인 18세 된 장님 소녀 악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메즈머가 눈을 뜨게 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하면서 그 소녀의 눈을 뜨도록 시범을 보이게 한 것이었다. 메즈머가 자신의 유체 이론이 만병 통치로 과신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눈에 물체가 보인다고 눈을 뜨게 했다고 놀랬는데 그 다음 날에 눈을 뜬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오스트리아에서 메즈머의 인기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Ellenberg, 1975).
메즈머는 오스트리아를 피해서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직전에 사회가 어수선하게 된 틈에 메즈너가 다시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어 메즈머 열풍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의 황제의 사촌 동생인 델슨(D’Eslon)이 메즈너로부터 동물 자장 이론을 배워서 치료를 하게 되었고 수 많은 지식인들, 의사와 변호사들이 새로운 치료로 등장한 메즈머의 기술을 배우려고 몰려 들었으나 메즈머는 그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인기와 동물 자장 이론, 유체 이론을 독점으로 점유하고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했다. 즉 제자를 육성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사후에 유체 이론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Ellenberg, 1975).
메즈머는 전기 저장 기법인 라이덴 병을 모방을 해서 집단 치료법을 개발을 했다(그룹 치료, 집단 치료의 시작). 전국에서 너무 많은 귀신에 들린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서 집단 치료의 필요성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원형 모양으로 크게 만든 반쪽의 둥근 알미늄으로 만든 반구를 둘러싸고 집단으로 최면에 걸리는 방법을 사용을 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한 정신, 마음이 흐르고 병든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 흐르는데 건강한 사람의 마음이 병든 사람 한데로 흘러 들러가게 되면 병든 사람의 마음이 건강하게 수혈이 된다는 유체 이론으로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쇠 막대기로 된 레포를 사용을 했다. 레포를 들고 건강한 메즈머가 그 막대기로 병든 사람의 몸에다 대고 건강한 마음을 수혈해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치료를 하고 있었다. 이 막대기인 레포(rapport)는 이후에 마음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심리적인 관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레포(rapport)라는 말은 최면학과 심리치료, 심리 상담에서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 심리적 유대 관계라는 용어로 지금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레포가 잘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는 그의 이론을 책과 논문으로 출판을 해서 그의 인기가 최고의 절정에 도달을 했다(Ellenberg, 1975).
이 시점에서 프랑스 정부에서 메즈머가 주장하는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이론으로 실제로 치료를 하는가? 치료가 되는가? 등에 대해서 과학 학회와 의학 학회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수사 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7명-8명 정도의 수사 위원회가 조직이 되었는데 그 중에 프랑스 대사로 미국인 과학자 벤자민 프랭크린(연에 구리 선을 달아서 천둥과 번개가 전기 현상임을 발견한 과학자), 킬로틴(의사로써 단두대를 고안), 라보아제(화학자) 등의 과학자, 의사들의 팀으로 구성된 수사팀이 메즈머의 이론을 검정하고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정작 메즈머는 그들의 수사팀에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황제의 동생인 델슨(D’Eslon) 한데 가서 수사팀들이 조사를 해서 그 결과 메즈머가 발견한 것이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병든 사람의 마음으로 유체처럼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는 치료 효과가 있다. 그러나 치료를 하는 사람이 남자일 때 치료를 받는 사람이 여자인 경우에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라는 청문회 백서를 발간을 했다(Ellenberg, 1975).
메즈머의 인기는 시들어갔고 그 후에 메즈머는 독일의 고양인 컨스탄스(Constance)로 칩거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후에 메즈머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가스너와 매즈머의 등장과 퇴장은 정신 의학의 역사 속에서 의미 깊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스너는 중세의 귀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는 엑소시즘(exorcism)의 대표자로 중세의 미신, 무지, 맹목적인 믿음을 대표 하는 사람이고 메즈머는 귀신에 들린 것이 아닌 질병으로 보고 이것을 과학적으로 치료를 한 사람으로 미신에 대한 이성, 무지에 대한 과학의 승리로 본다는 점이다(Ellenberg, 1975).
그러나 메즈머는 그가 새로운 위대한 발견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죽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자신이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죽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은 신대륙을 발견한 칼럼버스이고 또 한 사람이 최면학을 발견한 메즈머이다. 전자는 그가 발견한 대륙이 서인도라고 믿고 죽었다. 그 후에 아메리고베스푸치라는 탐험가가 칼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서인도가 아니고 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이면 다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다. 메즈머는 정작 자신이 새로운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을 모르고 죽었다. 이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그것이 최면학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Ellenberg, 1975).
인공 잠과 최면학(hypnosis)의 등장
프랑스 군대의 기병 대장인 푸이세이크(Puysegur)라는 사람이 메즈머의 유체 이론, 동물 자장 이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부하 중에서 한 사람인 빅터(Vector)가 운동장에서 군대 사열 중에 기절해서 쓰러져서 그를 치료를 하고 도와주는 과정에서 수면 상태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의 부하 빅터는 자석으로 유도된 상태(최면 상태)에서 오히려 정상 상태보다 마음이 안정된다고 주장하면서“누나! 나를 심하게 괴롭히지 말라”라는 말로 그의 누나와 갈등 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 말을 듣고 깨어나서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푸이세이크가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논문을 쓰고 그 증거로써 그의 부하를 데리고 프랑스의 심리 학회에 데리고 가서 보고를 하게 되었다. 그 보고회 후에 그의 부하이 빅터가 최면 상태에서 “나를 데리고 가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실험을 하려고 하지 말라”라는 최면 상태에서 경고를 하는 것을 보고 깨어있는 상태와 최면 상태에 관계를 연구해서 이것을 계속해서 프랑스 심리 학회에 보고를 하게 되었다(Ellenberg, 1975).
푸이세이그는 이후에 이것을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약 200여명의 제자들을 길러 냈다. 그는 유체가 몸 밖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동물의 자장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자석처럼 끌리거나 밀리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그가 연구한 것을 인공 잠(artificial sleep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잠을 자는 것 같은 현상인데 잠과는 달리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잇고 그리고 깨어나면 기억을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잠, 수면 과는 달리 인공으로 만들어진 잠이라는 말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이후에 인공 잠은 영국인 의사 브래이드(Braid)에 의해서 인공 잠이 아니고 최면이라는 말을 신조어로 만들어서 최면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최면 이라는 말인 hypnosis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hypno라는 잠의 여신에서 그리고 is라는 말은 병이라는 말에서 잠을 자는 병이라는 말로 최면학이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5).
20세기에 들어와서 히스테리아의 흥망성쇠
그리스 시대의 히스테리아라는 질병이 중세를 거치면서 귀신으로 바뀌었다가 메즈머가 최면으로 질병을 치료를 하게 되면서 다시 귀신이 들린 사람이 아닌 질병으로 복귀를 하게 된 것이다. 히스테리아가 어떻게 다시 복원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메즈머가 죽고 나서 약 100년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프랑스에서 푸이세이크를 시발점으로 해서 그의 제자들이 최면학을 계속해서 연구를 해서 히스테리아라는 질병을 치료 하는 치료 기법으로 발전을 시켜서 이것이 100년 후에 프랑스에서 가르코트와 베른 헤임이 히스테리아의 치료를 의과 대학에 끌어 들이고 치료를 하는 기법으로써 세계적인 중심지로 발전 시키면서 히스테리아가 최면으로 치료 되어진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가르코트는 히스테리아의 원인이 심리적인 상처 즉 근친상간, 강간, 폭력이 원인임을 밝혀냈고 프로이트가 이후에 심리적 상처 중에서 가장 큰 마음의 상처가 근친상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가스너와 메즈머가 귀신을 쫓는 굿에서 일부에서 효과가 있었던 것은 최면 상태에서 고함을 지르고 발악을 하고 발짝을 하는 과정에서 긴장이 방출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최면은 카타르시스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설사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사처럼 속에 누적된 것을 밖으로 방출해서 내 보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최면의 특징은 기억의 회복과 긴장의 방출이 핵심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최면이 걸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쪽 치료라는 것을 알게 된 프로이트가 온전한 치료 기법으로 정신분석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후에 정신분석 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등장과 발전은 마음의 원리, 심리적인 위계 이론, 그리고 마음의 구조 이론 등으로 그리고 수 많은 정신분석 치료 기법과 치료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다.
다시 20세기의 히스테리아의 흥망성쇠로 들어가보자. 히스트리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번창하게 되었다. 정신적인 장애의 대명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치료 기법으로 정신분석이 진화를 하게 된 것이다. 히스테리아는 발생 초기에 여성들의 질병으로 그리고 섹스와 관계되어진 질병이라는 것은 이미 기술이 되었다.
제 1 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과 히스테리아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 한데서 히스테리아 증세들과 유사한 증세들이 군의관들과 학자들에 의해서 보고가 되기 시작을 했다. 즉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이 벌벌 떨거나, 오줌, 똥을 싸거나, 잠을 자지 못하거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거나, 손과 발이 마비되거나, 수면 혼란으로, 악몽에 시달리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심한 경우에는 발짝 등등으로 히스테리아적인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 보고 되면서였다. 초반기에 이들은 포탄 쇼크로 이름이 붙여졌다. 포탄에 깜짝 놀래서 정신이 혼란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는 이들 군인들을 정신이 빠진 비겁한 사람으로 취급을 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러한 군인들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고 때리고 기압을 주고 구타 폭행이 빈번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해서 도망을 가는 비겁한 군인들에게는 연금을 주지 말라는 법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포탄 쇼크는 심각한 군인들의 정신적인 질병으로 등장을 했다.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 가디너(Abraham Kardiner< 1941)가 프로이트 밑에서 1년 동안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후에 군의관이 되어서 포탄 쇼크 군인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후에 “전쟁의 심리적 상처의 신경증”(The Traumatic Neurosis of War)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군인들이 포탄 쇼크가 아니고 전투에서 생긴 신경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임을 밝혀냈다.
이것이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심약한 군인들만이 이러한 전쟁 신경증이라는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전투에서 무공 훈장을 받은 용맹한 군인들도 이런 질병에 걸릴 수 있는 정신 장애라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국방성에서 본격적으로 군인들의 포로로 전투에 대한 교육 훈련과 치료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군인들의 심리적인 연구와 심리 치료 활동에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다. 한때 유행을 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특수 부대 출신으로 무공 훈장을 받은 램보(Rambo)라는 군인이 사회에 나와서 적응 부진으로 신경증이라는 정신 장애를 앓게 되는 “램보”라는 영화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0년 대 히스테리아
1970년 대에 들어와서 민권 운동과 연결 되어서 여성 해방 운동이 등장하면서 강간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1970년대의 여성해방 운동의 대부인 베티 프레디안(Betty Friedian) 여사는 가정이 안식처가 아니고 “창살 없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선언과 여성들의 자각 운동을 전개하면서 강간에 대한 폭로 운동이 뉴욕 시를 중심으로 산불처럼 번져갔다. 1972년에 보스톤 시립병원에서 간호사인 린다 스톡홀롬(Lynda Holmstrom)과 심리 치료사인 앤 부루게스((Ann Burgess) 두 사람에 의해서 “강간에 대한 심리적 상처 효과 연구”라는 논문과 1980년대 초반에 다이아나 럿셀(Diana Russell, 1981)이 미국 전역에서 900여명의 건강한 여성들을 상대로 한 연구 조사에서 미국의 여성들 중에서 4명 중에 한 명이 강간의 상처를 그리고 3명 중에 1명이 어린 시절에 섹스 학대를 당했다는 연구 보고서가 등장하면서 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Herman, 1997).
이후에 심리학자인 워커(Walker)에 의해서 신조어로 등장한 매맞는 여성 증후군, 매맞는 어린이 증후군 등의 용어들과 가정 폭력과 자녀들의 학대 등에 대한 연구 논문이 쏟아지면서 강간이라는 용어는 뉴욕 주를 시작으로 성폭행이라는 용어로 바뀌게 되고 이후 10년 만에 50개 주에서 강간이라는 말이 성폭행이라는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각 주에서 셀터(Shelder)라는 쉼터가 미 전국에 3000여개가 생겨난 것도 이 시쯤이었다(Herman, 1997).
강간 즉 성폭행에 대한 연구는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히스테리아 증세와 유사한 증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깜짝 깜짝 놀램, 수면 혼란, 비명을 지르거나, 입맛 상실 혹은 폭식, 한번씩 상처의 재 경험(프리시백), 울음, 기억 혼란 등의 증세들이 히스테리아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원인이 근친상간, 강간, 그리고 신체적 폭력이 원인임을 밝혀내면서 유혹 이론을 들고 나왔다가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상류층 자녀들의 히스테리아 치료에서 어린 시절에 당한 근친상간, 강간, 폭력의 증거를 입증하는데 문제가 등장하고 상류층의 고소 고발의 반발에 감당할 수 없어서 상상 이론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으로 바꾸어버렸다고 이후의 정신분석 학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1970년-1980년대를 거치면서 다시 강간의 상처, 폭력의 상처 이론들이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Herman, 1997).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밝혀진 것이 히스테리아는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군인들인 남자들도 이 병에 걸리게 된다는 점 그리고 강간, 폭력의 희생자들도 히스테리아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980년에 미국 정신 의학 학회에서 10년마다 한번씩 미국 전역에서 유명한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심리치료 학자 등의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모여서 다시 등장한 정신장애들과 사라진 정신장애들을 정리하고 수정 보완해서 출판되는 정신 장애에 대한 통계와 진단 분류 지침서 제 3번째 개정안 인 DSM -Ⅲ에서 히스테리아(hysteria)는 전환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신체화 장애, 히스트로닉 성격 장애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즉 히스테리아 라는 용어는 이제 20세기 후반기에 등장하게 된 수 많은 정신 장애들에게 길을 열어주게 됨으로써 히스테리아라는 이 용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Herman, 1997). 동시에 최면학은 심리치료의 보조적인 치료 기법으로 지금도 많은 심리치료사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현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심리 과학자들에 의해서 최면 상황은 의식의 변형으로 인정을 받아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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