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Freud)는 체코슬라바키아의 모라비아 지방 프레이버그(Freiberg) 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1856,5,6 生). 4살 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Vienna)(독일어로 빈)에 이사를 와서 80세까지 살았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유태인 박해가 가중되어지면서 프로이트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지나갈 무렵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가 프로이트를 마중을 나올 정도로 프로이트는 세계적인 명사(名士)가 되어 있었다. 영국 망명 후에 영국 왕립 과학원으로부터 회원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듬해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 1주일 전에 오스트리아 망명 정부의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83세로 세상을 떠났다(1939, 9, 3 死). 그의 사후에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생가에 프로이트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카우치와 치료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관광 명소로 되어 있고 그가 태어난 프레이버그는 프로이트의 이름을 딴 거리가 프로이트가 태어난 곳을 기념하고 있다(Ellenberg, 1970, Jones, 1963).
프로이트 가족은 대가족으로 복잡한 가족이었다. 아버지(Jakob)는 유태인 양모(양털 포목상) 상인으로 40대 초반에 첫 번째 부인의 사망으로 20세의 프로이트의 어머니(Amalie)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5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으로 8명의 형제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이미 21살된 아들과 16살 된 아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20세, 큰 아들인 21세와 둘 째 아들인 16살 사이에 미묘한 심리적인 움직임들이 이후에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밝히고 있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수재(영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들에 걸쳐서 광범위한 책들을 읽었다. 학생 시절에 그의 별명이 “책벌레"였다. 이후에 이런 광범위한 독서가 그의 정신분석 이론의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고 노트되어지고 있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법과 대학을 희망을 했으나 유태인이라는 장애물을 알고 스스로 의과 대학에 들어갔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최대의 강대국으로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청년에게 암살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항가리와 오스트리아로 양분되어졌고 제 2차 세계 대전 시에 영세 중립국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그 당시에 수도 비엔나(Vienna)(독일어 빈)는 유럽의 최대의 도시로써 비엔나 의과 대학은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대학이었다. 그 당시 의과 대학은 5년째였으나 프로이트는 8년 만에 졸업을 했다. 유급이 된 것이 아니고 부케 교수의 해부학 연구실에서 연구 조교로 3년을 더 근무를 자청해서 했다. 의과 대학에서 그의 전공 분야는 신경학이었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4살 연하인 22세의 마르타 베르네이(Martha Bernays)와 결혼으로 그는 6명의 자녀들을 두었고 막내 딸인 안나(Anna)가 프로이트의 계승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다. 26세에 약혼을 했고 약혼 기간 4년 동안에 800여통의 편지를 교환 한 것으로 유명했다. 특별이 편지 한 통에 무려 34페이지의 글을 써서 약혼자에게 보낼 정도도 글을 쓰는 솜씨도 뛰어났다고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미국인 의사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은 밝히고 있다. 존은 미국 출신의 의사로써 그가 영국에 망명한 후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후에 영국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로이트를 영국으로 망명하도록 도와주었으며 프로이트의 제자인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을 영국으로 초대해서 귀화하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이후에 프로이트가 죽은 영국 땅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정신분석의 대가들이 태어나는 토양을 제공한 장본인으로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이다.
프로이트는 의과 대학 졸업 후에 새내기 의사가 되었으나 환자가 없어서 의과 대학 3년 선배인 그의 동료이자, 선배이자, 스승으로 프로이트를 돌보아주고 안내를 해 주었던 유태인인 브로이어(Breuer)(그는 프로이트 한데 최면학과 히스테리아 환자를 소개해 주고 새로운 학문으로 이끌어 준 은인으로 프로이트가 노트) 한데 찾아가서 환자를 한 사람 빌려달라고 요구를 했다. 브로이어는 이미 졸업 후에 명의(名醫)가 되어 있었다. 브로이어는 그가 2년간 치료를 하고 있던 환자를 한 사람 프로이트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유태인 백만 장자의 딸로 5개 국어(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히브루어)를 유창하게 하는 재능을 가진 21세의 아가씨 안나 오(Anna O)(가명)였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이 안나 오(Anna O) 양 때문에 그의 삶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안나 오 양은 5개의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스트레스 시에는 눈이 장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쪽 손에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는 무감각, 한번씩 손이 5개의 머리를 가진 뱀으로 보이는 현상, 오랜지 주스를 마시지 못함, 한번씩 모국어인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로 말을 하는 증세들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안나 오 양을 치료를 하려고 신체 검사를 해 보았을 때 안나 오 양은 신체적인 이상이 없었다. 8년 동안 해부학 연구실에서 배운 프로이트의 의과 대학 지식이 무용지물이 된 것을 깨닫고 그의 선배인 브로이어 한데 찾아가서 그녀의 병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녀를 2년 동안 치료를 했는지?를 물어 보았다. 브로이어는 안나 오 양은 히스테리아(hysteria) 환자로써 그녀를 최면으로 치료를 했다고 털어 놓았다. 히스테리아 라는 병은 오늘날 신경질 적이고 예민하고 화를 잘 내는 히스테리칼한 환자와는 다르다. 그 당시 히스테리아 라는 병은 정신병의 이름이었다(hysteria 와 최면학은 이후에 상세하게 다루어진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최면학을 배우기 위해서 1년 동안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프랑스 파리에는 히스테리아(hysteria)를 최면으로 치료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가르코트(Charcot)가 있었다. 가르코트는“히스테리아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의과 대학 내과 교수였고 그리고 왕의 주치의였다. 그 당시 가르코트는 부와 명성을 얻는 의사이자, 과학자이고 예술가로 이름이 높았고 그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음악가들을 집으로 초빙을 해서 같이 음악회를 가지는 음악 애호가이자 예술품들을 수집하는 골동품 애호가였고 과학자였고, 세계적인 명망 있는 의사였다. 가르코트 학교(Charcot School)라는 학교를 세우고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들의 교육과 임명을 맡은 명사로써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Ellenberg, 1970).
가르코트가 어떻게 최면학을 배우게 되었는지?를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의과 대학 생 시절에 인턴과 레지던트 훈련을 받았던 살페트리아(Salpetriere) 병원은 3,000명-4000명의 환자들을 가진 대형 병원이었으나 사실은 부랑아, 매춘부, 거지,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집합소였다. 치료를 하는 병원이라기 보다는 이들의 집단 수용소적인 임시 감금소였다. 가르코트가 졸업을 하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살페트리아 병원에 원장으로 임명이 되면서 이 부랑아, 거지, 히스테리아의 합숙소가 세계적인 히스테리아를 치료 하는 명소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살페트리아에 병원을 히스테리아의 치료를 위한 실험장으로 바꾸었다. 그는 셰게 최초로 병원을 진료실, 치료실, 교육실로 나누었고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최면으로 치료를 하는 것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고 강의를 했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가 가르코트 밑에서 1년 동안 프랑스에서 히스테리아를 최면으로 치료를 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최면으로 히스테리아를 치료를 한다는 소식은 전 세계 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가르코트 한데로 몰려들게 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정신분석학을 창조한 프로이트(Sigmund Freud),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William James), 그리고 프로이트의 명성에 의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1970년대 이후에 그의 업적이 알려지게 된 해리 장애(빙의 현상)를 이론적으로 치료적으로 규명을 한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그들이다(Ellenberg, 1970).
가르코트는 화요일에는 전 세계에서 온 명사들을 위해서 대 강당인 교육실에서 그의 이론적인 강의를 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로 하여금 병원에 입원을 한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부축해서 실험실로 데리고 오게 해서 직접 최면을 걸어서 치료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제자들이 발짝을 하는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양쪽에서 부축을 해서 실험실로 데리고 왔을 때 가르코트는 그 환자에게 “내 눈을 똑 바로 응시해 쳐다보라”고 제시를 한 후에 “눈가풀이 무거워지면 눈을 감으라”라고 하면서 환자가 눈을 감고 최면에 걸리게 되면 어린 시절에 있었던 기억들을 더듬어 보게 했다. 그 히스테리아 여성 환자는 갑자기 고함과 흥분으로 소리를 치면서 폭발을 했다. “나를 강간하지 말아, 너를 죽이고 싶다, 나를 때리지 말라”라는 비명들과 고함들과 울음으로 발짝이 계속되면서 하고 싶은 말들을 토해내게 했다. 약 30분-40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환자가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가르코트는 내가 셋을 카운트를 하면 눈을 뜨세요 라고 제의를 하고 “하나, 둘, 셋”을 카운터를 하면서 그 여성 환자는 눈을 떴다(Ellenberg, 1970).
최면에서 깨어난 직후에 가르코트가 그 여성 환자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그 여성 환자는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프로이트가 이 장면을 보고 이후에 무의식 이론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가르코트의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최면 상태에서 과거의 상처들을 기억을 하는 것을 보았고 최면에서 깨어난 상태에서는 과거의 상처들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 인간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연구하여 마침내 무의식을 이론화 하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0).
가르코트 밑에서 프랑스에서 1년 유학 후에 비엔나로 돌아와서 프로이트는 그가 가르코트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르코트가 프로이트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르코트 밑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의과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의사를 가르코트가 기억을 했는지?를 모르지만 프로이트는 가르코트의 강의와 논문들을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소개를 했고 그가 배운 최면으로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치료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최면에 걸리는 사람들은 치료를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최면으로 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즉 최면 치료는 반쪽 치료임을 깨닫고 최면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해서 무의식 속에 묻힌 기억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 내기 위해서 5년 후에 다시 프랑스에서 가르코트와 최면학에서 쌍벽을 이루는 베른헤임(Bernheilm)을 방문하게 되었다(Ellenberg, 1970).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르코트와 쌍벽을 이루는 최면학자로 의과 대학 내과 교수인 베른헤임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낸시(Nancy) 라는 지역에 라보라는 괴짜 의사가 돈을 받지 않고 이상한 치료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괴짜 의사인 라보를 찾아갔다가 최면학을 배우게 되고 의과 대학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면학 교과서를 쓴 사람이었다(Ellenberg, 1970).
베른헤임과 가르코트는 사소한 이론적 논쟁 때문에 서로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을 불러 내어서 실험실에서 최면을 걸어서 그 제자에게 왼쪽 팔에 감각이 없게 될 것이라고 제시를 한 후에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그 제자는 왼손을 만지면서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왜 감각이 없는지?를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에 다시 최면 상태에서 감각이 돌아오도록 제시를 한 후에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감각이 회복되는 것을 최면으로 보여주면서 히스테리아 = 최면학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Ellenberg, 1970).
그러나 베른헤임은 최면은 제시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세이고 히스테리아는 병이라는 공식으로 히스테리아 =/= 최면이라는 의견 때문에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게 되면서 프랑스에서 학파가 둘로 나누어지고 후배들을 교육하는 기관도 Charcot School 과 Nancy School로 두 개로 양분이 되게 되었다. 가르코트 사후에 최면은 제시에 의한 것이고 히스테리아는 병이라는 베른헤임의 이론은 옳다는 것을 가르코트의 제자인 바빈스키(Babinski)가 밝혀냈다(유아들의 바빈스키 반사를 밝혀낸 공로). 가르코트는 사후에 제자들이 그의 강의 내용을 노트를 한 것을 책으로 13권의 저서로 출판이 되어졌다. 가르코트는 프랑 파리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그의 업적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2명의 과학자로 가르코트와 파스테르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가르코트 밑에서 1년 유학을 한 후에 5년 후에 다시 베른헤임을 방문하고 그가 환자를 최면을 걸어서 치료를 하고 나서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 조금 전에 그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이야기를 한 것을 물었을 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조용하게 앉아서 몇 개의 실마리를 주었을 때 그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했던 기억들을 되살리는 것을 프로이트가 직접 보게 되었다(Ellenberg, 1970).
프로이트는 비엔나로 되돌아와서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들을 위한 온전한 치료 기법을 찾기 위해서 최면 상태와 유사한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환자를 비스듬하게 눕게 하고(침대와는 약간 다르게 비스듬하게 누울 수 있는 침대의 일종으로 카우치를 사용을 했다) 이마에 손을 대고 기억이 날 것이라고 제시를 한 후에 눈을 감고(최면시에 눈을 감긴다) 머리 속에서 떠 오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로써 표현을 해 보도록 했다. 환자는 두서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프로이트는 환자가 보이지 않는 카우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환자가 하는 말들의 반복되는 말들을 기록을 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유명한 치료 기법인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기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0).
이후에 프로이트와 선배인 브로이어가 환자들을 치료를 한 치료 사례와 치료 이론들을 책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으니 그 때가 1895년에 두 사람의 공동 저자로 “히스테리아의 연구(Studies on hysteria)”라는 서적으로 이 책에서 브로이어가 2명의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를 했고 그리고 프로이트가 2명의 히스테이아 환자를 최면으로 그리고 3명은 최면이 아닌 카우치에 편안하게 누워서 자유연상으로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는 치료 과정이 상세하게 수록된 책으로 출판 되었다. 이 책의 출판 연도를 정신분석의 탄생으로 기록되고 있다(Ellenberg, 1970).
분트(Wundt)가 독일의 라이프지그(Lipzig) 대학 실험실에서 심리 과학이 탄생한지 15년 후에 프로이트가 자유연상의 방법으로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더욱 더 프로이트에 대해서 상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필자가 쓴 "나"(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의 프로이트는 어떤 사람인가? 프로이트(Freud): 출생에서 사망 까지에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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