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살아 있다 7
과거는 살아 있다 Ⅶ 부에서는 N씨와 아버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N씨의 아버지는 한번도 사업에서 성공한 적이 없었고 한번도 돈을 벌어서 N씨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사업의 실패로 아버지는 결혼 시에 어머니가 유산으로 받은 집을 날려버렸고 그리고 두 번째 사업의 실패로 은행 대출로 담보로 잡힌 큰 아버지의 집을 날리게 되면서 큰 아버지 가족들의 원망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큰 아버지의 가족들이 N씨의 집에 쳐들어 와서 행패를 부린 것을 N씨는 잊어버릴 수 없다고 고통스러워했다.
N씨의 가족들은 컴컴한 1칸짜리 지하 방에서 살게 되었다. N씨의 출생 이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계속된 부부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알코올 중독자로 변했고 끝임 없는 부부 싸움으로 N씨와 남동생에게 불안과 두려움과 분노, 노여움, 적대 감정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인 N씨에게는 한번도 폭력을 가하거나 언어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인 N씨의 능력을 인정하고 아들을 아껴주고 보살펴 준 것을 N씨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N씨가 지방의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을 하면서 서울에 SKY 대학에 경영학과에 입을 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으로 아들과 함께 처음으로 다정하게 서울에 와서 하숙집을 구해주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것이 아버지와 N씨의 만남의 마지막이 되었다.
대학 1학년 5월 달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아들인 N씨가 부라부라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45세 때 췌장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N씨는 아버지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검을 본 그 순간에 N씨는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털어 놓았다.
분석 치료의 과정에서 아버지와 N씨와 관계가 치료에서 다루어져야 했다. N씨의 마음 속에 억압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과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적대 감정과 연민 등이 치료의 과정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치료자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미움이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사랑과 미움을 하나로 본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사랑과 미움을 둘로 쪼개서 분리 시킨다. 부모님이 사랑을 표현을 하는 것은 허용해주지만 미움을 표현하는 것을 싫어해서 우리는 미움을 억압하게 된다.
프로이트(Freud)는 이것을 쪼갬 방어(splitting)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미움을 부모님에게 표현을 하게 되면 처벌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처벌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랑으로부터 미움을 분리시켜서 떼어내어 숨기고 억압으로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게 된다. 고로 그 결과 사랑은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는데 미움은 내 자아의 깊숙한 곳에 억압이 되어져서 남아 있게 된다. 이 미움의 억압이 점점 커지게 되면서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이 바뀌어서 폭발을 하게 된다. 술을 마시면 술 주사를 하는 사람들, 난폭 운전으로 보복을 하는 사람들, 사소한 시비로 싸움으로 번지는 사람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묻지마 살인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치료자가 미움 만을 이야기를 한 것은 미움, 짜증, 분노, 적대 감정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다 미움이라는 한 개의 감정 속에 포함이 되어져 있기 때문에 미움을 대표적인 감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 붙여서 프로이트는 사람의 마음은 겉으로 보면 한 개로 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면을 잘 관찰해 보면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가설화 했다. 우리의 마음을 잘 들려다 보고 관찰해 보면 본능으로부터 유래하는 의(衣)식(食)주(宙)와 희(喜), 노(怒), 애(愛), 락(樂), 에(哀), 오(惡), 욕(慾)를 담당하는 욕구적인 자아가 있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원초자아(Id: 이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본능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선(善)과 악(惡)을 구분을 하는 양심이 있다. 이것을 초자아(superego: 슈퍼에고)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실적인 판단, 선택, 결정 그리고 환경에 적응과 자아의 보호인 방어 기재들의 담당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학습과 갈등의 조정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전담하는 자아가 ego이다(ego: 에고).
우리가 어떤 과도한 욕구 충족에 매달리게 되면 초자아가 등장해서 경고를 하거나 위협으로 그리고 현실적 ego가 나타나서 갈등에 직면하면 현실적 자아가 나타나서 그 갈등을 서로 조정으로 최종 결정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보라.
출생 후에 유아기 시절에는 원초자아가 우세하고 3세 이후가 되면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초자아가 등장하고 그리고 사춘기로 성장해 가면서 성숙한 ego가 역할을 하나씩 수행해 나갈 때까지 부모가 보조 ego 역할로써 도와주면서 우리는 법적인 성인의 나이가 되면 성숙한 ego의 발달을 인정을 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를 인정을 해주어서 우리는 독립적인 자아로써 결혼과 각종 계약 등에서 합법적인 권리를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프로이트의 삼두마차의 자아(세 마리의 말(세 개의 자아)이 끌고 가는 마차(몸)가 이해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마음은 원래 세 개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이것이 서로 잘 통합이 되어져 있는 경우에는 한 개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 개의 자아들이 서로 견제하고 조정하고 갈등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가설화 했다.
최근에 정신분석 학자들은 자아가 3개 이상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쪽으로 수정이 되어지고 있다(Kernberg, 1982, Kohut, 1967, Mahler, 1975). 이러한 이론들은 프로이트(Freud)의 3개의 자아 이론은 신경증의 치료(불안증(강박증, 공포증, 공황장애 등)과 우울증의 치료)에 적합하도록 이론화 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종 성격장애들 즉 보드라인 성격장애, 나르시즘 성격장애, 반 사회적 성격장애 등과 같은 다양한 성격장애들 혹은 정신증(정신분열증, 조울증, 편집증)을 치료를 하는 대는 충분하지 못하고 부적당하다는 학자들의 연구들의 결과에 따라서 최근에는 자아를 과거의 경험의 집합으로 본다. 고로 유아기 자아, 초등학교 저학년 자아, 초등 중 학년 자아, 초 등 고학년 자아, 사춘기 자아, 성인기 자아, 노년기 자아 등으로 세분화 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대상관계 이론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Mahler, 1975).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15년 7월 달에 출시된 미국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는 단지 감정만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5개의 감정들 즉 기쁨(기쁨이), 분노(버럭이), 두려움(소심이), 싫어함(까칠이), 슬픔(슬픔이)이 서로 갈등하고 견제하면서 마침내 통합이 되어서 화합을 하는 과정을 만화 영화로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라.
이러한 자아들이 서로 잘 통합이 되어져 있을 경우에는 전체가 하나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아서 연결이 끊어지면 어떤 부분의 자아는 나이에 걸맞게 성장을 하지 않아서 그 부분이 미성숙하게 보이는 것이 그 이유이다. 예를 들어서 변태성욕자들은 3세-5세의 오디팔 기간(섹스의 욕구가 표면으로 드러나서 발달하는 기간)에 섹스적인 상처를 받아서 오디팔 단계에서 섹스 욕구의 자아가 성장이 중지된 것이다. 이들 변태성욕자들은 어른이 되어서 정상적인 섹스 관계에서 오르가즘(성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자극이나 이상한 섹스 행동으로 섹스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서 페티시즘 변태성욕자는 정상적인 이성의 나체를 보면 흥분을 하는 것이 아니고 팬티, 브라자, 부츠, 고무신 등을 보면 섹스 욕구를 느끼기 때문에 그들을 훔치거나 돈을 주고 수집을 하는 사람들이고 페도필리아 라는 변태 성욕자는 성숙한 성인의 성기를 보면 흥분(더럽다. 불결하다, 흉측하다는 느낌)하는 것이 아니고 사춘기 이하의 어린이들의 성기(음모가 없는 작은 성기는 아름답고 예쁘다라고 느낌)를 보면 섹스 흥분을 일으켜서 어린이들을 성폭행을 하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성기를 성인 어른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들이 깜짝 놀래는 비명 소리에서 섹스 욕구 충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노출증 변태성욕자들이다. 그들을 잘 들여다 보면 그들의 섹스 행동은 성숙한 성인의 섹스 행동이 아니고 3세-5세의 어린이들의 미성숙한 행동과 유사하지 않는가? 즉 섹스 자아가 오디팔 기간에 상처를 받아서 (과도한 자극 혹은 섹스 행동에 깜짝 놀램) 섹스 자아가 성장을 멈추어버린 것이다.
또 다른 점은 우리의 마음 속에 유아기 자아(A 자아), 초등학교 저학년 자아(B 자아). 초등 중학년 자아(C 자아), 초등 고학년 자아(D자아), 사춘기 자아(E 자아) 등등의 자아들이 유아기 시절에 심한 심리적 상처에 놀라거나 혹은 자신의 자아를 싫어해서 심하게 억압을 하게 되면 이러한 자아들이 서로서로 의사 소통이 끊어져서 칸막이 자아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모르게 되면서 어떤 상황에서는 A 라는 자아가 나타나서 이름과 행동과 성격이 다르게 행동을 하다가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B 라는 자아가 나타나서 또 다른 이름과 취미와 행동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C 라는 자아가 나타나서 이름과 취미와 성격과 행동이 전혀 다르게 행동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해리성 장애(자아의 연결이 서로 끊어져서 분리된 자아 장애)로 부른다.
흔히 빙의 현상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행동, 취미,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행동을 하게 되는 사람들로써 귀신이나 영혼이 들어와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여러 개의 자아가 서로 통합되어져 있지 못하고 철저하게 차단되고 서로서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칸막이로 된 자아들이 해리성 장애자들이다.
정신분석 심리치료에서(최근에 미국에서 유행하는 대상관계 이론을 지칭)는 이러한 어린 시절의 상처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치료실 안에서 재연으로 어린 시절에 상처의 경험들을 다시 느끼게 하고 그들을 표현을 하게 되고 그 시점에서 성장이 중지된 자아를 다기 성장하도록 해서 나이에 걸 맞는 성숙한 자아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분석 심리치료의 핵심이다.
그들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게 할 때 억압된 감정 에너지들이 녹아 내리고 풀려서 몸 밖으로 방출되어 나가면서 긴장이 풀리고 그리고 의사 소통의 능력이 배양되고 갈등의 해결로 나아가면서 현실 사회에서 상처 때문에 유사한 문제들을 피해왔던 것들을 직면으로 뚫고 나가게 도와주면서 현실적인 자아(ego) 능력이 배양되어지게 된다. 고로 자아의 능력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기게 되면 치료자의 지팡이 역할은 끝이 나고 치료는 종결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신분석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N씨의 아버지와 관계의 치료 과정으로 되돌아 가 보자.
N씨는 자신이 유아기 시절에 받은 상처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받은 상처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사춘기(중,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성인기 시절(대학생)에 받은 상처들을 부모님에게 한번도 고통을 말로써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면 속에 받은 상처들은 무의식 속에 밀어 넣어서 억압되어서 N씨의 핵심 문제가 된 것이 분석으로 드러났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의 이미지 상은 N씨의 마음 속에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분석 심리치료의 과정에서 치료실 안에서 N씨의 머리 속에 새겨져 있는 이 아버지의 이미지를 끄집어 내서 N씨와 직면으로 대면을 시켜서 대화를 하도록 재연을 하는 것이다. 즉 유아기 자아와 아버지의 만남을 재연해서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말로써 표현을 하지 못한 감정들을 표현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N씨는 유아기 시절에 받은 심리적인 상처들과 외로움과 슬픔과 분노, 짜증 그리고 화, 노여움 등의 적대감정을 아버지에게 표현을 하도록 했다.
아버지!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 묻혀 있는 이 한 맺힌 이야기들을 들어 주세요.
아버지! 나는 태어나자 말자 어머니 손에서 자라지 못하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에서 4살까지 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늘 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씩 엄마가 외갓집에 와서 나를 만나고 갈 때마다 나는 엄마를 보내지 않으려고 울면서 떼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늘 돈을 벌어서 오겠다고 조금한 참아야 한다 라고 나를 달래준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돈을 벌지 못해서 엄마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외갓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 전까지 보내졌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엄격한 사람으로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늘 야단을 치고 호통을 쳤기 때문에 나는 항상 할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피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보다 덜했지만 유아인 나를 예뻐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청소년이 되어서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친모가 아닌 계모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과수원에는 원두막이 있었고 나는 늘 혼자서 노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인근에 살고 있는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시냇가에서 가재들, 소라 고동들을 잡으면서 혼자서 놀았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늘 혼자 외톨이였습니다.
N씨는 어머니에게 위와 같은 감정 표현을 할 때에는 분노, 노여움 때문에 울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직면으로 감정을 표현을 할 때에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으로 3개월 동안 늘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자아와 아버지의 직면이 치료실 안에서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싸웠습니다. 외조부모와 함께 살 때에는 부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웠지만 매일 같이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차라리 외로웠지만 외조부모 밑에서 살 때가 그리웠습니다.
부모님이 싸울 때 나는 늘 두려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 다른 동무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들을 동반하고 축하를 받으면서 자신만만하게 입학식에 오는 데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도 내 옆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내 혼자서 입학식에 간 것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입학 후에 알고 보니 다른 동무들은 모두가 한글을 알고 읽고 쓸 줄 알고 있었는데 나는 한글을 모르고 까막눈으로 입학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아침 7시경에는 일찍 집을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큰 전기 밥통에 밥을 가득 해 놓고 그리고 크다란 국 통에 국을 한 그릇 끓여서 담아 놓고 갔습니다. 나는 학교에 등교하기 전에 그리고 하교 후에 집에 오면 늘 밥통과 국 통을 열어서 혼자서 식사를 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처가 맛있는 반찬을 여러가지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는데도 나는 항상 국에다 밥을 섞어서 먹는 나의 행동을 보고 왜 반찬들이 여러 개 이는데 손을 데지 않고 국에다 항상 밥을 말아서(섞어서의 사투리) 먹느냐?라는 지적에 나는 깜짝 놀랬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늘 혼자서 밥을 국에 섞어서 먹는 습관화 된 행동임 때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부인에게 그러한 과거의 상처들 때문임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표현을 할 능력이 내 자아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러한 표현의 능력을 치료실에 안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어머니는 내 목에 목걸이 대신에 열쇠 키를 만들어 목걸이로 걸어주었습니다. 방과 후에 내가 집에 들어올 때 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미국에서 나와 같은 레치트 키 어린이(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어린이들을 부르는 말)였다는 것을 치료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시점에서 나는 항상 학습 준비물 부족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내 학습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어머니에게 미술 시간에 공작물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돈을 주고 사야 하니 돈이 xxx 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어머니가 노발대발해서 호통으로 처벌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돈을 벌려 나가는 데 아침부터 돈 타령이냐?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해라” 하고 벼락같이 화를 냈습니다.
나는 그 이후에 어머니에게 다시는 돈을 달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학습 도구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나에게 “너는 왜 학습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는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한번도 어머니가 일을 하러 일찍 나갔기 때문에 학습 준비물을 챙겨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나는 “잊어버렸습니다.” “까먹어버렸습니다”라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게으른 놈으로 낙인일 찍었습니다.
학기 초에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아버지는 대졸로 사업가로 어머니는 고졸로 전업 주부로 기재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우리 집이 잘 사는 집으로 보고 은근히 돈봉투를 기대하고 어머니가 선생님을 한번 찾아주기를 기대를 했는데 어머니가 찾아오지도 않고 거기에다 나는 늘 학습 준비물 부족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게으름뱅이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미술 시간이 되면 나는 늘 친구들 앞에 나가서 벌을 서야 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집을 나가서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습니다. 학습 도구를 잘 돈도 없어서 어머니에게 학습 도구를 사 달라고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실직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어머니가 화장품 판매원, 보험 판매원(나중에 보험 설계사로 변경), 다단계 등등의 일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정작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머니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머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벌지 못하고 술로써, 술타령으로 부부 싸움을 많이 한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지금까지 심리치료사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N씨의 초등학교 저학년 자아를 등장시켜서 아버지와 대면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던 상처 이벤트를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그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상처에서 받은 감정들을 말로써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나는 늘 부모님의 부부 싸움으로 집에서 긴장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하면 나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 때문에 잠을 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수면 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동료들과 늘 싸우면서 지냈습니다. 내 얼굴에 짜증과 내 마음 속에 쌓인 분노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동료들로부터 말썽꾼, 싸움꾼으로 별명이 붙었습니다. 친구들은 나를 싫어해서 내 옆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옆에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고로 나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내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내 머리를 건드리는 것에 화가 나서 “씨발놈아!” 라고 욕설을 하면서 머리를 들어서 보니 담임 선생님이 내가 잠을 자는 것을 보고 내 머리를 건드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나를 건드린 것을 모르고 동료들이 나를 집적거린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에게 그 오해를 풀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고 동료들이 나를 괴롭힌 것으로 오해해서 욕을 한 것이라는 말을 선생님에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학교 생활이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교무실 옆으로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에게 쌍 욕설을 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들을 쳐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 학년의 자아를 등장시켜서 그 시점에서 상처 받은 것들을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어머니와 싸우면서 저녁 12시경에 아버지가 냉장고를 번쩍 들어서 문 밖으로 던지는 것을 보고 나와 동생은 놀래서 울면서 집 밖으로 나와서 두려워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동생과 나는 라면 박스를 주워서 그것을 덮고 뜬 눈으로 길거리에서 보냈던 것이 아직도 그 장면이 눈 앞에 생생합니다.
또 한번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하고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화가 나서 야구 방망이를 들고 아버지를 때릴 때 아버지가 놀래서 토끼 눈으로 나를 쳐다본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상처 받은 자아로 되돌아 가서 아버지와 직면을 해서 그 때 받은 상처들의 기억들을 회상해서 아버지에게 분노, 짜증, 화, 적대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도록 했다.
아버지! 내 이 한 맺힌 억울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고학년이 되면서 내가 공부를 잘한 덕택에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반에서 제일 잘 나가는 친구들 5 명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아들, 선생님의 아들, 면장의 아들, 공무원의 아들, 그리고 나까지 합쳐서 5명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5명의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해서 같이 식사를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들의 초대에 따라갔고 그들의 집에 가서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숭숭 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먹어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었습니다. 각각의 친구들이 한번씩 친구들을 초대를 해서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점점 내 차례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외출을 했다. 혹은 어머니가 급한 일로 집을 비우게 되었다 라고 변명을 해서 끝내 그들을 집으로 초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5명의 친구들의 집들은 아파트 혹은 단독 주택으로 어리어리한 집들과 눈부신 가구들로 잘 사는 동료들이었지만 나는 한번도 내가 지하 방에서 삭 월세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고 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비슷하게 잘 살고 있다는 식으로 거짓말로 과장을 했습니다.
한번은 학급 동료 한 사람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무시하고 면전에서 깔보고 막말을 했는데 이후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무시하고 깔보고 망신을 준 그 친구의 집에 문간방의 셋방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를 피해 다녔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수치심, 모욕감이었습니다.
N씨의 초등학교 시절은 지옥과 같은 시절이었다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러한 감정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한번도 털어 놓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아버지에게 소상하게 그 시점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들을 말로써 표현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N씨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사춘기 자아를 등장시켜서 그 시점에서 아버지에게 분노, 화, 짜증, 적대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도록 했다.
아버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막지 말고 들어 주세요. 내가 중학교 학생이 되면서 다행히도 어머니의 친구가 빌려간 돈 대신에 다방을 물러 주어서 어머니가 다방 마담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회복은 되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다방 마담 직업을 문제 삼아서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어머니가 다방이 잘 운영이 되면서 3개의 다방을 경영하는 마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숫한 남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파는 매춘부 취급을 해서 어머니를 때리고 폭력을 행사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죽도록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학급 동료들과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해서 학급 반장 혹은 부반장으로 학급을 운영하고 동료들을 리더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세칭 일류대학인 SKY 대학에 경영학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버지가 나와 같이 하숙방을 얻기 위해서 서울에 같이 와서 아버지와 몇 일을 보낸 것이 나 삶에서 아버지와 만남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성숙한 성인의 자아로써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못하다 한 이야기를 털어 놓도록 했다.
이제 나도 청년이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와 적대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고 아버지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내 이야기를 차단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 주세요. 내 한 맺힌 이야기를 해야 내가 가진 문제들이 해결을 할 수 있다고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내 이야기를 차단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셔야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주세요.
나는 대학 1학년 때 서클 활동으로 놀이패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독재 정권에 맞서서 시위를 하고 데모를 하는데 그 투쟁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뒤에서 격려하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 주는 서클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연습 도중에 내가 동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머리 속에 하얗게 되면서 나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여기에서 내 증세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후부터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나서서 발표를 하거나 리더로써 이끌어 나가는 것을 극구 피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장학금으로 6개월 중국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그 학원에서 발표를 하는 것 때문에 나는 며칠 후에 학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6개월 동안 하숙방에서 시간을 때우고 귀국을 하게 되었고 겨우 졸업을 했고 다행히도 대기업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내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우울하고 외롭고 내가 왜 삶을 살고 있는지? 왜 내가 이러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지?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발표를 하려고 하는 것을 피해 다니는 것에 대해서 내가 내 자신을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기업에서 근무를 한지 7년 째 나를 아껴주고 지원해 주던 부장님께서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약 12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어떤 것을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많은 준비를 해서 발표를 하는 그 순간에 내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생각이 나지 않고 부들부들 떨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내 증세가 드디어 회사 직원들에게 노출되었고 나는 망신을 당하고 모욕감,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가 반장을 했고 학생들 앞에서 늘 발표를 했고 그리고 내가 학급의 리더로써 동료들 앞에서 내가 지휘하고 학교 학생회에서 반 대표로써 발표를 한 내가 왜 대학생이 된 지금에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발표를 하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는지? 를 몰라서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유아기 시절의 발달 과정에서 받은 상처들(옆에는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분리불안)과 초등학교 시절의 상처들로 인해서 내 가슴 속에 비밀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친밀관계를 피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모두가 내 어린 시절의 비밀을 감추려고 하는 내 어린 시절의 자아가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어린 시절의 자아는 내 비밀이 다른 동료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눈치, 비위를 살피고 그들의 비판과 비난을 고려해서 나는 항상 조심을 하다가 보니까 그들 앞에 나서게 되면 너무 긴장을 해서 과도한 불안이 나의 뇌를 점령해서 내 머리가 하얗게 되고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리 속의 연결들이 모두 끊어져버리고 말을 더듬거리거나 벌벌 떨거나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빨리 뛰어서 내가 죽은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숨기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부터 나오는 수치심과 모욕감, 멸시, 조롱들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나는 어린 시절의 내 수치심과 모욕감과 멸시, 조롱들을 직면으로 끄집어내서 다루고 대화를 통해서 씻어내고 닦아내야 내가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된고 내 어려움들을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내가 깨달았기 때문에 먼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에게 물어 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 왜 아버지는 결혼을 해서 자식들을 낳았으면 책임을 지셔야 하는데 왜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큰 사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몇 번의 큰 사업에 있는 모든 돈들을 투자를 했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으면서도 왜 큰 사업만 고집을 했습니까? 어머니가 죽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녀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습니다. 사업에 매달릴 것이 아니고 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는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조그만 일에서 시작하지 않고 큰 사업만 고집을 했습니까? 차리리 가족을 떠나서 아버지 혼자서 살았더라면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술을 마시고 모든 화풀이를 어머니에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서 열등감이 술을 마시게 했고 그 열등감을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어머니가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다, 무시한다, 비웃는다 라는 아버지의 마음 속에서 열등감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으로 그것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어머니를 처벌하고 보복하고 아버지의 문제들을 어머니 탓으로 어머니에게 복수를 한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는 삶에서 시달려서 우리들을 돌보아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노동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한 것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왜 아버지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물어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버지는 늘 큰 사업을 해서 한번만 성공을 하면 지금까지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방만 고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방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고통들과 상처들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3개의 다방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대학생이 되어서 그러한 어린 시절의 상처들이 내 문제로 표면화 되어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어른이 되어서 꼼꼼히 분석해 보면 아버지는 사회적 적응 능력에 결함이 있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습니다. 대학 생활에서 학도 호국 단장을 지냈다고(대학에서 학생회장) 자랑했고 그리고 박정회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고 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동업으로 큰 백화점 사업을 하다가 친구에게 고소를 당해서 6개월간 감옥 살이를 한 것을 보세요, 아버지는 대인관계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러 받은 단 한가지 유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내 단점을 이야기를 하지 말라 라는 무의식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나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지금까지 내 아픔과 고통과 과거의 상처들을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입을 닫고 내 과거의 상처들을 모두 무의식 속에 묻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문제의 핵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자신의 고통을 가슴 속에 묻고 절대로 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술로써 어머니를 괴롭히면서 내면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갈등과 미움과 적대 감정들 때문에 그것이 신체적으로 흘러가서 40대 중반으로 암으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닙니까?
N씨는 아버지 문제를 다루면서 약 3개월 동안 눈물로 통곡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연민과 용서와 미움과 적대 감정들을 쏟아냈다. N씨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수첩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아버지를 마음 속에서 미워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불쌍함으로 늘 고통스러워했다. 아버지의 사진을 치료자에게 보여주었을 때 아버지는 키도 크고 핸섬하고 신체 건강하고 외형적으로는 나무랄 때가 없는 멋진 미남자로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면의 마음 속에서는 골병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40대 중반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N씨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아버지를 닮아있는 모습에 경악했다. 즉 고등학교 시설에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친구가 아니면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들과는 가끔 모임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과 상처들은 아버지처럼 절대로 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치료자는 N씨가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대기업의 높은 봉급에도 불구하고 봉급의 절반이 다른 사람들의 빚을 갚아주고 이자를 물어 주변서도 정작 자신은 한 푼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문제들은 모두가 N씨 자신의 어려움을 말로써 표현을 하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들을 비밀로 하고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상대방과 생긴 갈등들을 피하고 속만 끙끙 앓고 있는 N씨 자신의 모습이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한가지 차이점은 아버지는 봉급자 생활은 쩨쩨한 직업으로 할 수 없고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과장된 나르시즘적인 면(학도 호국 단장과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자신이 아버지를 빼 닮았다는 것에 깜짝 놀랬다.
치료자는 N씨의 어른의 자아를 끄집어 내어서 남동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동생아! 나는 너에게 할 말이 많다. 너는 내 보다 머리가 좋아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바둑을 두면 나를 이겼다. 나는 네가 머리가 좋으면서도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분노해서 반항적으로 부모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공부를 포기하고 가출해서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집에서 받는 고통보다 차라리 집 밖에서 비록 불량학생들이지만 그들이 너를 이해해주고 격려를 해 주었기 때문에 네가 가출을 한 것을 이해를 한다. 내가 너를 보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도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빌빌거렸는데 내가 너를 도와줄 힘과 능력이 없었다.
네가 나에게 5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사실 나는 돈이 없었다. 어머니가 이미 약 1억 정도를 빌려가서 갚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빚을 많이 지고 은행 이자까지 물어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너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너의 첫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은행에서 대출로 5천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내가 소식이 없는 너를 이상하게 생각해서 수소문해 보니까 너는 그 돈을 도박으로 날려버린 것을 알고 너를 죽이고 싶었을 정도로 너를 미워했다. 네가 형님인 나를 속이고 나를 이용해서 그 돈으로 사업을 하지 않고 도박으로 날려버린 것에 대한 배신감에 칠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너를 원만하지 않는다. 네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양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적인 문제로 너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남으로 너 너보다는 조금은 나았지만 나도 이런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너는 오죽하겠느냐? 내가 좋아지면 너를 심리치료를 받도록 배려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 치료자는 N씨의 자아를 끄집어 내서 돈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를 했다가 상처를 받아서 그 이후에는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고 그 상처가 어른이 되어서 어머니의 사업 자금의 요구, 그리고 남동생의 돈의 요구, 처가 집의 돈의 요구에서 No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것들과 고교 동창들의 모임에서 동료들의 회식 비용 지불에 No라고 말을 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부하 직원들의 빌려간 돈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N씨 자신의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의 경제적인 어려움들을 솔직하게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때문에 돈을 지원해줄 수 없다는 말을 대화 즉 의사 소통으로써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못한 의사 소통과 감정 표현에 연결되어진 문제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회피라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라는 치료자의 지적에 동의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5명의 친구들에게 거짓말과 속임수로써 일부러 잘 사는 집으로 보이려고 했고 자신의 차례가 올 때마다 변명으로 회피를 했던 그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자아를 불러 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 놓게 했다.
친구들아!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사실 아버지가 실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화장품 판매업, 보험 판매업, 다단계 등으로 겨우겨우 하루를 먹고 사는 부모님 때문에 나는 지하 방에서 살고 있다. 내 체면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숨기로 비밀로 한 것이다. 만약에 너희들이 내 사정을 알게 되면 너희들이 나를 피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나를 떠날 것이 두려워서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치료자는 만약에 N씨가 그 당시에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가정 환경을 이야기를 하고 소통을 했더라면 친구들이 오히려 N씨를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칭찬을 해 주었을 것이고 더욱 더 친밀관계가 돈독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우리는 친구를 돈이 있는 출세한 친구들만 사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직하고 정직하고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을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귄다는 것을 N씨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지적을 했다.
N씨의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자아를 끄집어 내서 선생님에게 씨발년이라고 욕설을 한 것을 사과하고 이해를 시키도록 했다.
선생님! 내가 선생님에게 씨발년이라고 한 것은 선생님인 줄 모르고 친구가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한 말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집에서 아버지가 실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매일 같이 어머니와 싸우고 어머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 없었습니다. 부부 싸움 때문에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피곤해서 잠을 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나를 집적거리고 괴롭히는 것에 화가 나서 친구가 한 것으로 오인해서 욕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하고 용서를 해 주세요.
N씨의 어른 자아로 되돌아가서 다시 고교 동창생들에게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친구들아! 나는 대기업에서 회사원으로 높은 봉급을 받고 있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사업 자금으로 1억 원 정도를 빌려가사 갚지 않고 그리고 남동생이 사업자금으로 5천만 원을 빌려가서 갚지 않고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에 내 회사로 찾아와서 하소연 하는 바람에 6천만 원을 빌려가사 갚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 봉급에서 절반이 은행 빚으로 차압을 당해서 내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빈털터리임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회식비용을 내가 냈으면 좋겠는데 너희들은 결혼을 했고 경제적으로 나보다는 좋으니 오늘 회식 비용은 너희들이 분담을 하든지 그것이 어려우면 작가의 분담으로 나누어내도록 하면 어떠하겠느냐?
새내기 부하 여직원이 환송회가 끝나고 시간이 너무 늦어서 택시 비용으로 3만원을 빌려가고 나서 깜짝 무소식에 대해서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그 부하 여직원에게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Xx양 어제 회식 후에 빌려간 돈을 왜 돌려주지 않는지? 내가 팀장으로써 그러한 돈을 거론을 하는 것이 쩨쩨해 보인다고 말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공과 사를 구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나에게 사적으로 빌려간 돈은 금액이 적든지 많든지 간에 빌려간 돈이 아닙니까? 선후배 사이에 이런 것들이 구분이 없어지면 서로 갈등이 생기고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시작을 하면서 N씨는 정신분석 치료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알고 치료를 받으러 왔다 치료 1년이 지나가면서 N씨는 그 회사에서 지방으로 전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치료자에게 계속해서 심리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이후에 서울로 다시 복귀를 하게 되면 계속해서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겠다고 약속을 하고 치료를 종결하게 되었다.
'의학, 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는 살아 있다 9 (0) | 2016.05.14 |
---|---|
과거는 살아 있다 8 (0) | 2016.05.06 |
과거는 살아 있다 6 (0) | 2016.04.22 |
과거는 살아 있다 5 (0) | 2016.04.14 |
과거는 살아 있다 4 (0) | 2016.04.08 |